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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역사, 인물

일본산고 / 박경리 _ 철저한 반일작가, '토지'의 박경리 선생

by 릴라~ 2021. 7. 27.

“나는 철두철미 반일작가입니다.”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이렇게 지명도 있는 분이 여러 오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정체성을 이렇게 분명히 표현하다니.

물론 박경리 선생은 그 뒤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나는 철두철미 반일작가지만 반일본인은 아닙니다.”

박경리 선생의 반일은 반군국주의, 반제국주의와 궤를 같이한다. 한 마디로 반파시즘, 반나치즘이다. 그렇다면 그건 어쩌면 당연한 얘기다.

독일과 일본의 차이는 과거사를 사죄했냐 문제가 아니다. 독일은 2차대전 패전국이라 사죄했지만 승전국 영국, 프랑스는 아프리카 등에서 저지른 학살에 사과한 적이 없다.

문제는 독일은 반나치즘이지만 일본은 군국주의를 여전히 미화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일왕 중심의 신국사상, 조선 지배를 시작으로 대동아공영론의 야욕을 뻗었던 그 시대에 대한 너무 큰 향수를 지니고 있다.

1926년생 박경리 선생. 식민치하에서 약 스무 살까지 보냈으니 누구보다 식민지 시대를 예민하게 경험한 세대다. 그가 일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박경리 선생의 관점에 동의하든 안 하든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 시대의 군국주의를 뼛속까지 경험한 박경리 선생은 군국주의를 철저히 거부한다. 그래서 반일이다.

일본은 가깝지만 잘 모르는 나라다. 나는 교토에서 일본의 찬란한 불교 문화에 감탄했다. 우리나라 불교가 고려에서 절정을 이루고 조선조에 탄압받았기에 불교가 계속 융성한 일본에서 15세기 이후 불교문화가 가장 찬란하게 꽃핀 건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풍부한 문화적 예술적 유산이 일본의 전부가 아니다. 일본에는 일왕 중심의 독특한 사관이 있고 사무라이 이래 칼의 문화가 있고 그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할 소지가 언제나 있다. 이웃나라와 평화롭게 지내려 애쓰되 결코 경계의 시선을 놓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그런 면에서 다른 책이 주지 못하는 통찰을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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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흔해빠진 그 통곡이 일본에서는 흔치가 않다. 일본의 문학작품 속에서 통곡이라는 말에 부딪치게 되면 아주 특이한 느낌을 받게 된다. 어딘지 모르게 고답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다. 땅을 치고 통곡하는 원초적이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독무대 같은 모습의 우리네들 통곡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다. 분출되기보다 안으로, 안으로 밀어 넣으며 슬픔을 구속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실상 그들의 통곡에는 소리가 없는 것으로 표현되기 일쑤이며 소리 없는 통곡, 그러니까 흐느낌과 비슷하고 오히려 나키사케부가 우리네 통곡과 가깝지만 역시 통곡과 울부짖음은 다르고 통틀어 그들의 울음을 생각할 때 소리가 없는 것이 특징이며 또 별로 울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에 대한 인상이다.

통곡이 없는 민족, 울지 않는 민족, 왜 울지 않을까? 슬픔도 마치 실루엣같이 소리가 없다. 너무나 정적이다. 본시부터 그러했을까? 그들이라고 울지 않을 리 없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칼로 상징되는 그들의 역사 탓일 것이다. 사실 일본이 이웃에 끼친 피해의 규모가 크고 참혹함도 자심한 것이었지만 그들 스스로, 동족들 목줄기에 들이댄 칼의 세월이 훨씬 길다. 그리고 그 참혹함도 타민족에ㅐ 대한 것에 못지 않았다. 예를 하나 들자면 일본 정신을 의식화한 것 중에 하라키리라는 게 있다. 나는 그것을 몬도카네로 표현한 적이 있지만 일종의 새디즘과 마조히즘의 복합으로 보아도 과히 틀리지는 않으리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혹은 강자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것은 한 개인의 고통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하라키리는 자기 고통의 하수인이 자기 자신이며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게 되는 잔인무도한 의식이다. 식순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장은 또 얼마나 추악한가. 동맥을 끊는 목이 있고 심장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복부인가. 생선 배 갈라 내장 꺼내는 것같이, 복부이기 때문에 절명에는 시간이 걸리고 이른바 가이샤쿠라 해서 칼을 들고 ㅣㄱ다리고 있따가 배 가른 사람의 목을 쳐주는데 두 번 죽음이다. 자살은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용감한 사람만이 자살하는 것도 아니다. 흉악한 범죄자도 자살하고 천하의 독부도 자살하고 삶을 이길 수 없는 무력한 사람도 자살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고통이 적은 방법을 취하는 것이 본능이다. 추악하고 잔혹하고 야만적인 그 자살 방법에 일본은 그야말로 긴란, 돈수, 비단을 휘감아서 미화하고 일본 정신의 표본으로 자랑한다.

일본을 모르는 사람 중에도 뭐 그게 대단한 죽음의 철학인 양 현혹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런 죽음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체념과 마조히즘이 그 장본이다. 체념이라는 말에서 생각이 나는데 우리들에게는 체념이 그리 오래된 말은 아닌성싶다. 어릴 적에 늘 낯설지 않게 들어온 말에는 포한, 한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체념이라는 말 대신 단념이라는 말이 있었다. 재미나는 것은 체념과 한과 단념 이 세 가지 말이 지닌 뜻과 그 뉘앙스다. 체념에는 최소한도의 타협이 있다. 운명에 순종하며 살아남으려는, 체념한 대상에서 방향을 바꾸려는 계산이 있다. 한은 소망을 이루지 못한 소망이 저애된 슬픔이다. 그러나 체념과는 다르며 소망을 연장해본다.

자신의 미래를 향해, 자식을 향해 또 내세를 향해, 해서 포한은 풀어야 하는 것이다. 단념은 끊는 것이다. 타협이 아닌 끊어버리는 그 자체, 체념과 같은 타협이나 순종이 없다. 일본에는 아키라네라는 순수한 일본말이 있고 그 말은 일상에서 흔히 쓰인다. 또 그 비슷한 말에 간넨이 있는데 자신을 달래는 뜻이 포함된 아키라메와는 달리 외부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스스로를 끊어버리는 단념과도 다소 다른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까 포한이나 단념이 주체적이라면 아키라메나 간넨은 타의에 의한 것이다. 하라키리는 간넨의 행위이며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그들의 현실, 종교에 있어서 신은 내세에 대한 약속을 한다. 일본의 신은 내세에 대한 약속이 없다. 신국의 대본신 아마테라스도 현인신인 왕들도 내세에 대한 약속을 못했다. 도요아시하라라는 일본국은 만세일계 아마테라스의 자손이 다스릴 것이란 말밖에, 아마테라스는 종교적 말씀이 없었다. 일본역사에서 모노노아와래와 맥을 같이 하는 허무적 내세관을 심어준 것은 불교다.

그러나 힘으로 형식으로 대부분 변질되었고 내세관은 가냘프게 연명된 것 같다. 그러나 가톨릭은 일본의 정신계를 뒤엎어엎을 뻔했다. 순수하게 힘차게 하라키리와는 전혀 다른 순교를, 그러나 시마바라의 난에서 가톨릭은 철저히 분쇄되고 전멸했떤 것이다. 일본에서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아니었나 싶다. 하여간 일본에서의 죽음이란 어둡고, 어둡고, 캄캄한 나락이다. 까마귀의 그 음산한 검은 빛깔과도 같이. 그리고 흑색에 치중하는 그들 문화의 편린이 잡힐 듯도 하다. 내가 일본을 생각할 때는 검은빛에서 시작된다. p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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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암흑을 향하여, 그곳에 눈송이같이 휘날리는 벚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무심이다. 일본에도 사슬을 끊을 기회는 몇 번 있었다. 천주교가 들어오고 소위 후미에에 의해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을 때, 그러나 시마바라의 난으로 교도들을 모조리 불태워 죽임으로 끝나버렸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전토에 만연하여 국체를 부정했던 사회주의도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권부에 의해 궤멸했다.

어느 역사건 절대 권력과 절대 복종은 있어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수없이 변화하여 흘렀다. 다만 일본만은 고착하여 변할 줄 모르고 시간을 멈추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이 아니라도 그 체제 속에서 굳어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소심하고 겁이 많으며 축소 지향에다 창조력이 고갈되고 기능만을 능사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얘기가 좀 달라지지만 작년, 한일학생회의 회원들이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상당수의 일본인 학생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철두철미 반일 작가지만 결코 반일본인은 아니다" 하고 말했다. 내 반일 사상에 대해 해명하고 싶은 기분도 있었고 일본인 학생들을 어색하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진심이기도 했다.

세계는 지금 개방되어 지구라는 단위 속에 인류는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되고, 부정해야 하는 것은 인류의 생존을 저해하는 것이지 인간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p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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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문학은 무엇이냐, 맨정신으로 묻는 것도 쑥스러운 노릇이나 문학은 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는 것도 상투적인 정의겠습니다만, 인생은 꾸미는 것이 아니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니며 보다 고통스럽게 무량한 우주의 비밀을 헤치고 나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진실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생명에 대한 자비, 혹은 연민이 핵이 되는 선성의 추구 없는 아름다움이란 종이꽃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유미주의 또는 탐미주의는 쾌락주의와 상통하는 일종의 허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탐미주의와 쾌락주의는 특히 일본 문학의 전통입니다. p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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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꼬지 마십시오. 저의 일본 얘기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감정이 좀 지나쳐."
"과거 일본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감정이 좋을 리 없지요. 그리고 일본에 대해서 향수를 가지는 사람을 보면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요. 징병과 징용, 위안부, 농토를 빼앗기고 거지가 되어 도시를 헤매던 군상, 남부여대 정든 고향을 버리고 만주로, 연해주로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 내 산천을 찾겠다고 만주 벌판 눈보라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 고문과 인체실험으로 사라져간 사람들, 죄 없이 일본인 앞에서 떨어야 했던 어린 영혼들의 상처...... 일본에 대하여 향수를 느끼겠습니까. 이름도 우리말도 없애버린 그들, 반일의 피는 방방곡곡에서 들끓고, 꽃이며 심장이던 젊은 학도들은 결코 순종하지 아니하며 전쟁 말기에는 유치장이 미어졌습니다. 아주 소수의 친일파는 겨레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일본인이 먹다 남긴 찌꺼기나 얻어먹는 신세, 사실 마음 놓고 거들먹거리지도 못했습니다. 그 당시 이광수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미미한 친일파가 해방이 되면서 숙청을 당하기는커녕 미 군정과 이승만에 의해 교묘히 일본을 답습하고 나라를 휘어잡았습니다. 허나 오늘 일본에 향수를 느낄 당자가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았을까요. 그러나 그들이 뿌려놓은 씨앗은 대단한 것입니다. 식민지 사관의 뿌리가 아직 뽑히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그리고 일본의 회유정책에 힘입고 혹은 개인의 이익을 계산하는 새로운 친일파가 대거 등장했습니다. 참 그 세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반일을 논하면 소탕하자는 기세니까요."

"병이 도졌군. 또 흥분하네."

"하지만 과거에 얽매일 만큼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글 쓰는 사람의 태도도 아니구요. 여러 해 전에 일본 문예지의 편집장이 내 집을 찾았을 때, 나는 철두철미 반일작가라 하며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그 후 일본 학생들이 방문했을 때 나는 철두철미 반일작가이지만 반일본인은 아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도 인류의 한 사람이며 군국주의의 희생자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가미카제 특공대며 인간어뢰, 국민 전원의 옥쇄 계획, 원자탄의 희생도 그렇고, 젊은 생명들이 그 얼마나 전선에서 죽어갔습니까. 남자의 씨가 마를 지경으로, 심지어는 만주의 출병 구실을 찾기 위해 마적단을 매수하여 그곳에 거류하는 동족을 미끼로 내놓고 살해하게 했습니다.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답시고 결국 출병했지요. 못할 일이 없었어요. 국민들은 모두 천황의 세기키라는 것은 공공영한 그들의 인식이었습니다. 천황의 소유물이란 뜻이지요. 인류에게 일본은 어떠한 존재인가. 핵무기를 가질 때 그들은 그것으로 어떤 짓을 할 거인가. 세계 정복의 청사진은 일본 체제의 확대를 의미합니다. 전 인류가 모두 현인신의 세키시가 되는 거고 소유물이 되는 거지요. 신국사상을 청산 안 하는 이유가 거기 있을 겁니다. 저의 이런 생각은 결코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이 나타났다는 우려는 일본인이 핵무기를 가졌을 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우려하는 것과 같습니다." p14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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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과거에 원한을 갖고 일본을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본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묻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일본의 민족성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 스스로도 희생자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체제입니다. 체제가 뭐냐를 물어야지요."

박씨는 엄격히 말해 일본의 문화는 문화가 아니라고 말했다. 문화는 삶을 위한 것인데 일본의 문화는 그것이 칼로부터 시작됬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죽음의 문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문화는 살림의 문화가 본질입니다. 이번에 아시안게임을 보셍. 개막식의 그 모습이 얼마나 가난하게 보입니까. 우리 올림픽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요. 문화적 틀이 없으니까 그런 겁니다. 틀이 있어야 변화가 올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생명이 있습니다. 문화에 역동성이 있지요. 샤머니즘이 여기에 있습니다."

작가는 우리의 샤머니즘은 내세에까지 교신하려고 하는 열렬한 소망이라며 모든 게 공리적이고 유물론적인 일본은 그게 없다고 비판했다.

"일본의 이런 사고는 20세기 과학만능시대와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본과 틀이 없기 때문에 허위 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샤머니즘은 사람이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력할 뿐이지요. 그러나 일본은 사람이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자니 세계중추국이니 우상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사고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작가는 최근 국내에서 잇따라 터진 각종 사고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작가는 이 모든 게 물질만능에서 오는 것이라며 결국 이들은 영성을 믿지 않아서 생겨난 것이라고 했다.

"영성이 없으면 부패합니다. 살아 있는 순간의 쾌락만 꼽지요. 지구가 떠 있는데 원심력과 구심력이 필요하고 사람이 태어났는데 죽게 되는 것은 존재가 항상 모순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자연의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한쪽에 쏠리면 반드시 부딪히게 됩니다."

작가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근간은 같습니다. 운영방법이 다를 뿐이지요. 두 가지 모두 운명은 같습니다. 똑같이 벽에 부딪혔습니다. 지구는 공해 때문에 멸망직전입니다. 두 가지 모두 공범자예요. 이제는 궤도를 수정해야 합니다. 자본이니 공산주의니 떠드는 거은 모두 구시대적입니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모두가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탁상공론에 불과합니다." p20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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