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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철학, 심리85

선불교의 철학 / 한병철 __ 허무주의가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최고의 긍정 불교의 무나 공 같은 개념을 이처럼 개념적으로 엄밀하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니. 비어 있음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무한한 개방성이자 세계에 대한 최고의 긍정이다. 서양철학과 종교는 존재의 유한성을 영원성과 무한성을 지닌 신에게 귀의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지만, 여기엔 유한성에 대한 부정의 정신이 깃들 수밖에 없다. 반면 선불교는 유한성 그 자체를 개인의 욕망과 의지가 얽히지 않은 맑은 눈으로 거울처럼 바라보고, 덧없는 사물들 곁에 머무르며 자기 자신도 덧없이 지나가게 한다. 그 덧없음과 함께 하고 덧없음 속에 머무르며 그 속에서 깊은 슬픔을 경험한 이가 지닌 것은 모든 존재자와 세계에 대한 친절이다. 저자는 그것을 사교적 친절과 대비하여 태고의 친절이라 부른다. 두 번 읽었는데, 책 사서.. 2024. 2. 25.
폭력의 위상학 / 한병철 __ 21세기는 왜 폭력적인가 100페이지 남짓한 저자의 다른 책에 비하면 꽤 두꺼운 책이다. 그래도 200페이지를 넘지 않으니 일반적인 철학서에 비해서는 얇지만. 이 책이 조금 더 두꺼워진 이유는 역사적으로 행해진 폭력의 양상을 시대별로 개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물리적 폭력에 대해 비판적이다. 죄인을 광장에서 참수하고 전시했던 절대권력 시대도 아니고 감옥, 병동, 수용소 등으로 개인에게 규율을 강제했던 산업사회 초반도 아니다. 후기산업사회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수반하는 외적 강제나 규율이 거의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폭력이 줄어든 평화로운 시대인가? 저자의 대답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어느 시대보다도 폭력이 증가한 시대다. 물리적 폭력보다 더 강하고 전방위적이며 음험한 폭.. 2024. 2. 18.
정보의 지배 / 한병철 __ 데이터 가축, 소비 가축이 된 인류 한병철의 책을 읽노라면 100페이지의 얇은 책에 늘 간지를 잔뜩 끼워넣게 된다. 그만큼 다시 곱씹고 싶은 함축적인 문장들로 가득하다. 예전 책은 얇고 가벼워 백에 넣고 다니거나 지하철 등에서 보기 참 좋았는데, 요새는 다 하드커버로 나와서 안 사고 빌려본다. 하드커버로 안 나왔으면 하는 바람. 저자는 21세기 인류를 가축에 빗댈 때가 많다. 왜 노예가 아니고 가축인가. 노예는 주인에게 저항하지만 가축은 저항하려는 생각 자체가 없을 만큼 완전히 체제에 길들여졌기 때문. 저자가 보기에 지금 인류는 데이터 가축, 정보 가축, 소비 가축이 되어 있다. 정보가 과잉 생산되는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자기를 공연하는 데 혈안되어 있고 그 공연의 방식은 소비이다. 인플루언서들은 소비가 자기실.. 2024. 2. 18.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 김용옥 사람이 선하게 산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일 경우도 많다. 시간이 흐르면 마음에 억울함이 쌓인다. 이 난제를 철학과 종교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칸트는 신을 요청한다. 신이 미래에 보상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도덕의 근거를 확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에 반해 불교가 요청하는 것은 윤회다. 현생보다 더 광대무변한 시간을 요청한다. 나의 행위의 결과는 지금 당장이 아니라 더 멀고 긴 시간 속에서 돌아온다는 것이다. 내가 어릴 때는 전생과 후생을 미신적인 개념으로 잘못 이해했기에 불교의 이 시간관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불교 시간관의 본질은 우리 행위의 인과관계가 우리의 앎을 넘어서서 드넓은 맥락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삶의 인과관계에 대한 단선적인 이해를 넘어 삶을.. 2024. 1. 3.
법구경을 펼치며, 풍요의 시대에 고통이 많은 이유 를 읽고 넘 감명 받아서 불교 관련 책들을 다시 들쳐보는 참이다. 집에 뭐가 있나 보니 98년 발행된 법구경이 있다. 그때 이후로 읽어본 적이 없었네. 지금은 절판된, 법정 스님 번역이다. 이 작은 책을 가볍게 훑어보고 알았다. 이 풍요로운 현대사회에 왜 고통이 많은가를… 현대에 고통이, 특히 심적 고통이 만연한 이유는 현대 사회에 쾌락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고통과 쾌락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존재한다. 우리를 자극하고 유혹하는 쾌락이 너무 많기에 그만큼 그걸 얻지 못하는 고통도 크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도파민 중독'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크고 작은 쾌락에 중독되어 그것이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우울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법구경에 좋은 문장이 많았지만 요번엔 이게 젤 기억에 남아 옮겨 적어본.. 2023. 12. 2.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 파울 페르하에어 저자의 전작, 에 비해서는 가독성이 떨어졌지만, 권위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십분 이해할 만하다. 사람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권위의 역할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권위는 우리가 속한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조율하고 통제하며 사람들의 행동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끈다.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경제'를 제외한 모든 전통적인 권위가 힘을 상실했다는 것인데, 저자는 그 전통적인 권위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 권위들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영구히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권위의 상대성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과거의 권위에 무조건적인 향수를 가질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그 권위들은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교화하고 사회를 안정시켰으나 여성을 비롯하여.. 2023. 10. 19.
사물의 소멸 & 리추얼의 종말 / 한병철 에리히 프롬이 우리 시대를 봤다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소유' 대신에 '존재'를 설파했던 철학자가 지금을 봤다면 '소유' 대신 '이상한 존재'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았으리라. 사물 대신에 정보가 우리를 지배하는 시대. 사물은 삶을 안정시키지만 정보는 우리를 정처없이 배회하게 한다. 정보는 사물과 타자에 깃든 시간, 촉감, 불가해성이 없다. 정보가 넘쳐나고 모든 게 명료하지만 세계는 점점 멀어지는 역설의 시대가 펼쳐진다. 사람들은 세계를 바라보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말을 건다. 리추얼은 또 어떤가. 공동체의 의례 혹은 시간적인 형식으로 번역할 수 있는 리추얼은 흘러가는 시간에 마디를 맺어줌으로써 시간을 우리가 거주할 수 있는 집으로 만들어준다. 리추얼이 사라진 시대에는 개인의 자기 표현과 가식 없는.. 2023. 10. 18.
고통 없는 사회 / 한병철 __ 우리 앞에 도래한 '좋아요'의 사회 십여 년 전부터 저자의 책을 꾸준히 보고 있다. 투명사회, 시간의 향기, 피로사회, 에로스의 종말, 심리정치, 타자의 추방, 권력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의 구원 등... 100여 쪽 남짓한 얇은 책이지만 다양한 철학적 개념이 촘촘히 박혀 있고, 그러면서도 어렵지 않게 잘 읽힌다. 그 안에 담긴 사유의 깊이도 남다르다. 이분의 관심사는 모두 '현대인' 우리 자신의 현 모습과 우리 자신이 처한 생태계이다. 동일한 문제의식을 조금씩 다른 측면에서 조명하는 책들을 썼다. 철학적 개념을 반복적으로 동원하여 세상을 거울처럼 명료하게 보여준다. 철학자의 글이 왜 가치있는가를 보여주는 시리즈. 최근 출판된 것은 못 읽었는데, '고통 없는 사회'에서 읽기를 시작한다. 리추얼의 종말, 서사의 위기, 폭력의 위상학 등을 더.. 2023. 10. 7.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 파울 페르아에허 __ 걍 최고임 이 책은 단지 심리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한 인간의 정체성에는 반드시 타자 맟 집단간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서의 서사가 깃들어있다. 뇌의 작용과 신경 호르몬 등 개인적인 성향이 당연히 영향을 미치지만, 정체성의 본질적인 내용은 반드시 외부 세계로부터 온다. 그리고 오늘날, 그 외부 세계가 심각하게 문제가 된다. 인간의 이타심이 아니라 이기심만을 극도로 강조하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왜 이런 모양과 이런 지향으로 살고 있는지, 특히 젊은이들이 왜 그러한지 이 책보다 더 잘 설명하는 책은 없을 듯하다. 종교는 사라졌지만 이제 성공이 그 자리를 대체했고, 종교적 신념 대신에 외부의 '평가'가 그 권위를 대체했다. 사람들은 과거 종교에서 죄책감을 느꼈듯이 외부의 평가에 흔들리고.. 2023. 10. 2.
[책] 망설임의 윤리학 / 우치다 타츠루 우치다 타츠루 선생의 종합적인 문예 비평서. 일본에서 출판된 책에 대한 비평이 많다. 보통 모르는 책에 대한 비평서는 재미있게 읽기가 어려운데 선생의 책은 그렇지 않다. 그 책을 몰라도 세상 돌아가는 모양에 대한 선생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일본 사회가 고령화나 신세대의 변화 면에서 우리 사회와 비슷하게 가고 있어서 (아니, 우리가 일본 비슷하게 가는 걸 꺼다.)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이 우리를 좀 더 잘 보여주기도 한다. 페미니즘 등의 사상이 꼭 필요하다고 보지만 그것이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선생의 견해도 흥미롭다. 어떤 사상은 그 야생적인 면으로 사회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지만 지배 이데올로기가 될 때는 위험하다는 것. 모택동의 사상이나 히피 운동이 그 예가 되겠다. .. 2023. 9. 2.
[책] 스몰 트라우마 / 멕 애럴 '빅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대개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다. 전쟁, 폭력, 이혼, 실직, 가족의 죽음 등 우리 생애를 뒤흔드는 사건들이다. 하지만 이런 큰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을 조금씩 좀먹는 존재가 있으니 저자는 이를 '스몰 트라우마'라 부른다. 이 스몰 트라우마는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거나 별 것 아닌 일을 문제 삼는다고 생각해 타인에게 잘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댐에 작은 구멍이 나면 어느 순간 무너지듯이. 작은 상처는 시간에 따라 누적되면서 삶을 크게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이 책은 '스몰 트라우마'의 개념을 밝히면서 삶 속에서 그것을 이겨내고 극복할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것이 개념을 밝히는 부분이 소략하고 처방을 이야기하는 부분의 내용이 많다는 거다. 심리적 .. 2023. 8. 28.
[책] 말에 구원받는다는 것 / 아라이 유키 어떤 책은 단 한 챕터 때문에 읽을 가치가 있다. 이 책이 그랬다. 설렁설렁 책장을 넘기다 한 부분에 꽂혔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일,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하는 말, 그런 일과 말을 생각한다. 수업시간에도 응용할 만한 질문이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일, 그건 가슴 벅찬 감동 그런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소소하게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는 일, 그런 것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뭐가 있을까.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 자전거 타고 동네 한 바퀴. 화장하기. 3분만에 끝내는 간단한 화장이지만. 자기 전에 누워서 좋아하는 음악 듣기. 산에 오르기. 언제나 가장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일. 책을 읽다 문득 멈추고 좋은 구절을 음미하기. D랑 포옹하거나 곤히 자다가 깨서 이야기하기. 식탁에서 .. 2023. 8. 26.
[책]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 크리스텔 프티콜랭 결혼 전 D와 긴 연애 중일 때 여행할 때마다 한 번씩 말썽이 있었다. 숙소 문제인데, 소리에 민감한 나는 에어컨이든 뭐든 소음이 들리면 잠을 못 자기 때문에 항상 방을 배정받으면 꼭 한 번씩 방을 바꿔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그러면 그 큰 캐리어를 끌고 다시 방을 옮겨야 하기 때문에 한두 번 그런 뒤부터는 아예 방을 배정받자마자 꼼꼼이 체크해서 바로 방을 옮기곤 했다. 방을 두 번이나 바꾼 일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D는 나의 예민함에 대해 조금도 짜증내거나 힘겨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우리가 계속 만났던 이유에는 그러한 점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시각적으로 예민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패션과 외모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하다. 다만 소리엔 매우 민감해서 목소리가 좋은 남자를 좋아한다. 전화기에서 .. 2023. 8. 23.
[책] 운이 좋다고 말해야 운이 좋아진다 / 하시가이 고지 내 독서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어떤 작가가 마음에 들면 그가 쓴 다른 책을 죄다 검색해서 보는 방법. 그러면 한 사람의 시대인식, 문제인식, 사유의 테두리를 대강 가늠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책을 죄다 대출해서 발췌독 하는 방법. 예컨대 윤동주에 관심이 있으면 윤동주에 관해 다양한 사람들이 쓴 책을 다 빌려와서 훑어보는 방법이다. 전자는 저자 위주의 섭렵이고 후자는 주제 위주의 섭렵이다. '섭렵'의 사전적 의미는 "물을 건너 찾아다닌다는 뜻으로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거나 다양한 경험을 쌓음을 이르는 말"이라 한다. 섭렵하게 되면 오독의 위험을 줄이고 좀 더 공정한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어찌 보면 공부한다는 것은 섭렵한다는 것인데 학교 공부에서는 섭렵의 기회가 매우 제.. 2023. 8. 21.
[책] 아직도 당신의 머릿속에는 부모가 산다 / 하시가이 고지 우리 인생을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일까? 운명일까? 우연일까? 의지나 노력일까?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뇌 속에 깔린 프로그램, 생각의 틀이라고. 주체 행동형, 반영 분석형 문제 해결형, 문제 회피형 타인 기준형, 자기 기준형 과거 기준형, 미래 기준형 절차 중시형, 선택 중시형 감각 중시형, 결과 중시형 목적 지향형, 경험 지향형 비관형, 낙관형 내부 분리형, 내부 중시형 의무형, 욕구형 한정적 자아, 절대적 자아 결과 대기형, 결과 행동형 저자는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는 열두 가지 생각의 틀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런 틀이 어떻게 형성되어왔는지를 이어서 이야기한다. 우리 생각의 틀을 가장 강력하게 형성하는 것은 바로 부모의 목소리다. 저자는 이를 '머릿속 부모'라고 부른.. 2023. 8.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