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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철학, 심리

고통 없는 사회 / 한병철 __ 우리 앞에 도래한 '좋아요'의 사회

by 릴라~ 2023. 10. 7.

십여 년 전부터 저자의 책을 꾸준히 보고 있다. 투명사회, 시간의 향기, 피로사회, 에로스의 종말, 심리정치, 타자의 추방, 권력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의 구원 등...    100여 쪽 남짓한 얇은 책이지만 다양한 철학적 개념이 촘촘히 박혀 있고, 그러면서도 어렵지 않게 잘 읽힌다. 그 안에 담긴 사유의 깊이도 남다르다. 이분의 관심사는 모두 '현대인' 우리 자신의 현 모습과 우리 자신이 처한 생태계이다.  동일한 문제의식을 조금씩 다른 측면에서 조명하는 책들을 썼다. 철학적 개념을 반복적으로 동원하여 세상을 거울처럼 명료하게 보여준다. 철학자의 글이 왜 가치있는가를 보여주는 시리즈.

 

최근 출판된 것은 못 읽었는데, '고통 없는 사회'에서 읽기를 시작한다. 리추얼의 종말, 서사의 위기, 폭력의 위상학 등을 더 볼 참이다. 

 

책의 내용은 아래 발췌로 대신한다. 이분의 문장이 좋아서 따로 요약할 필요를 못 느끼는 책. 세계경제공황과 양차대전이라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통과한 인류가 어쩌다가 '좋아요'의 사회를 만들게 되었을까.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를 쓴 지 백 년이 다 되어가는데, 진짜로 그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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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사회와 성과사회는 서로 조응한다. 고통은 약함의 신호로 해석된다. 고통은 숨기거나 최적화를 통해 제거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고통은 성과와 병립될 수 없다. 고통의 수동성은 능력에 의해 지배되는 능동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다. 오늘날 고통은 모든 표현 가능성을 빼앗긴다.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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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진통사회는 좋아요의 사회다. 진통사회는 좋음의 광기에 빠진다. 모든 것이 만족감을 줄 때까지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좋아요는 우리 시대의 징표이자 진통제다. 좋아요는 소셜미디어뿐만 아니라 문화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어떤 것도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예술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 인스타그램에 적합해야 한다. 다시 말해 고통을 줄 수 있는 모서리나 귀퉁이, 갈등이나 모순이 없어야 한다. 고통이 정화한다는 사실은 잊혀진다. p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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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산물들은 갈수록 소비의 강제하에 놓이고 있다. 문화생산물들은 소비될 수 있는, 다시 말해 만족감을 주는 형태를 지녀야 한다. 이러한 문화의 경제화는 경제의 문화화와 동시에 진행된다. 소비재들에 문화적 잉여가치가 덧붙여진다. 이 잉여가치는 문화적, 미적 체험을 약속한다. 그래서 사용가치보다 디자인이 더 중요해진다. 소비의 영역이 예술의 영역을 침범한다. 소비재들은 스스로를 예술작품처럼 연출한다. 그래서 예술영역과 소비영역이 뒤섞이고, 그 결과 이제 예술 스스로 소비미학을 활용하게 되었다. 수용자를 기분 좋게 하는 예술이 되는 것이다. p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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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책임을 져야 할 고통이 사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로 간주된다. 개선되어야 할 것은 사회의 상태가 아니라 영혼의 상태다. 영혼을 최적화하라는 요구는 실제로는 지배 관계에 적응하라는 요구이며, 사회적 폐해를 은폐한다. 이런 식으로 긍정심리학은 혁명의 종언을 확정 짓는다. 혁명가들이 아니라 동기부여 트레이너들이 무대에 올라 어떤 불만도, 나아가 어떤 분노도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극단적인 사회적 대립을 몰고 온 1920년대의 세계경제공황 직전에는 부자들의 탐욕과 빈자들의 비참함을 고발하던 수많은 노동자 대표들과 급진적 활동가들이 있었다. 이와 달리 21세기에는 전혀 다르고 수도 더 많은 이데올로그 무리가 그 반대 주장을 확산시켰다. 심각하게 불평등한 우리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좋으며,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더 잘, 훨씬 더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동기부여자들과 긍정적 사고의 대변자들은 지속적으로 급변하는 노동시장으로 인해 경제적 파멸 직전에 있던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아무리 두려운 '변화'라도 환영하고 그것을 기회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p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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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으로 처방되는 진통제는 고통을 낳는 사회적 상황을 덮어 감춘다. 고통을 오로지 의학과 약학으로만 처리하는 것은 고통이 언어가, 나아가 비판이 되는 것을 막는다. 고통의 대상성이, 더욱이 사회성이 제거되는 것이다. 약이나 매체로 둔감하게 만듦으로써 진통사회는 비판에 면역된다. 소셜미디어나 컴퓨터 게임도 진통제처럼 작용한다.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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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사적인 문제가 된다. 고통 또한 개인적인 실패의 결과로 해석된다. 그래서 혁명 대신 우울이 있다. 자신의 영혼을 치료하려고 이리저리 애쓰는 사이에 우리는 사회적 불화를 낳는 사회적 연관을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는 그 책임이 사회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함께 느끼는 고통이야말로 혁명의 효소다.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는 이런 고통의 싹을 질식시킨다. 진통사회는 고통을 의학적 문제로, 사적인 문제로 만들어 탈정치화한다. 이를 통해 고통의 사회적 차원을 억압하고 은폐한다.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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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사회는 좋은 삶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그 자체가 목적으로 떠받들어지는 건강을 위해 향유마저 희생된다. (...) 어떤 값을 치르고라도 삶을 연장하는 것이 세계 어디서나 다른 모든 가치에 앞서는 최고의 가치로 승격된다. 생존을 위해 우리는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어주는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한다.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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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히스테리는 삶을 근본적으로 덧없는 것으로 만든다. 삶은 최적화해야 할 생물학적 과정으로 축소된다. 삶은 형이상학적 차원을 모조리 빼앗긴다. 자가추적이 컬트의 대상이 된다. 디지털 건강염려증, 건강 앱 및 피트니스 앱을 통한 지속적인 자가측정은 삶을 하나의 기능으로 격하시킨다. 삶은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서사를 빼앗긴다. 이제 삶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측정할 수 있는 것, 셀 수 있는 것이다.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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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는 좋은 삶에 대한 서사가 없다. 자본주의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이 늘어나면 죽음이 줄어든다는 무의식적인 믿음이 자본주의의 자양분이다. 죽음에 맞서기 위해 자본이 축적된다. 자본은 생존을 위한 재산으로 상상된다. 삶의 시간이 유한하기 때문에 자본의 시간이 축적된다.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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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고통 경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고통이 무의미한 것으로 지각된다는 것이다. 고통 앞에서 우리를 지탱해주고 방향을 제시해줄 의미연관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통을 감내하는 기술을 완전히 상실했다. 고통이 오로지 의학과 약학으로 다루어야 할 대상이 되면서 "고통 처리의 문화 프로그램"이 파괴되었다. 이제 고통은 진통제로 제거해야 하는 무의미한 질병이다. 그저 육체적 고통에 지나지 않는 고통은 상징적 질서에서 완전히 퇴출된다.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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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고통은 오로지 육체적이기만 한 고통으로 사물화되었다. 고통이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예컨대 고통을 신학적 강제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적 행위로 일면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통의 의미 상실은 생물학적 과정으로 축소된 우리의 삶 자체가 의미를 상실했음을 암시한다. 고통이 의미를 지니려면 삶을 의미 지평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서사가 먼저 있어야 한다. 더는 이야기하지 않는, 의미를 상실한 벌거벗은 삶 속에서만 고통은 의미를 상실한다.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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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현실이다. 고통에는 현실을 깨닫게 하는 효과가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고통을 주는 저항이 있을 때 현실을 지각한다. 진통사회에서의 지속적 마취는 세계를 탈현실화한다. 디지털화 또한 갈수록 저항을 축소시키며, 저항하는 상대, 대립, 대립체를 점점 더 소멸시킨다. 지속적인 좋아요는 둔감함을, 현실의 해체를 낳는다. 디지털화는 무감각화다. 

 

가짜뉴스와 딥페이크가 존재하는 탈사실적 시대에는 현실에 대한 둔감성, 나아가 무감각성이 생겨난다. 우리를 이로부터 빼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고통스러운 현실충격뿐이다.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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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자기 지각을 강화한다. 고통은 자아의 모습을 드러낸다. 고통은 자아의 윤곽을 표시한다. 증가하는 자상 행위는 나르시시즘적이고 우울에 빠진 자아가 자신을 확인하고 느끼려는 절망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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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도 우리 시대의 사회를 진통사회라고 부를 것이다. 진통사회의 특징은 생의 감정이 매우 빈약해졌다는 것이다. 삶은 약화되어 안락한 생존이 된다. 건강이 새로운 여신으로 등극한다. 니체는 극단적인 고통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는 비극적인 것이 삶으로부터 사라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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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전반적인 마취화는 고통의 시학을 모조리 소멸시킨다. 마취는 고통의 미학을 몰아낸다. 진통사회에서 우리는 고통이 이야기하고 노래하게 만드는 방법, 고통을 언어화하고 서사로 이끄는 방법, 아름다운 가상으로 고통을 덮고 속여넘기는 방법을 완전히 잊고 만다. 오늘날 고통은 미적 상상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고통은 의학 기술의 문제로 바뀌어 탈언어화된다. 이야기와 상상보다 진통제가 먼저 작용하여 이야기와 상상을 잠재운다. (...) 진통사회에서 고통은 더 이상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이야기의 강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은 인간을 막다른 골목으로 이끈다. p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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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은 고통이다. 정신은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새로운 인식에, 더 높은 앎과 의식의 형태에 도달한다. (...) 고통은 정신을 변환시킨다. 변환은 고통과 결합되어 있다. 형성의 길은 고통의 길이다. "따라서 다른 것, 부정적인 것, 모순, 분열은 정신의 본성에 속한다. 이 분열 속에서 고통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어떤 방식으로 고통이 세계 안으로 들어왔느냐 하는 질문이 제기되었을 때 사람들이 잘못 생각했듯이  고통은 외부로부터 정신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절대적인 분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만 진리를 획득한다." 정신의 위력은 "부정적인 것을 똑바로 쳐다보고""부정적인 것의 곁에 머물러 있을 때" 드러난다. 이에 반해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는 긍정적인 것"은 "죽은 가상"으로 쪼그라든다. 고통의 부정성만이 정신을 살아있게 해준다. 고통이 삶이다. p6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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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부정성은 사유에 필수적이다. 사유를 계산 및 인공지능과 구별되게 하는 것은 고통이다. 지능이란 어떤 것들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지능은 구별능력이다. 따라서 지능은 기존의 것들을 벗어나지 않는다. 지능은 완전히 다른 것을 산출하지 못한다.  이 점에서 지능은 정신과 다르다. 고통은 사유에 깊이를 부여한다. 그러나 깊은 계산이란 없다. 사유의 깊이란 무엇인가? 계산과 반대로 사유는 세계에 대한 완전히 다른 관점을, 나아가 다른 세계를 산출해낸다. 오직 살아있는 것, 고통의 능력이 있는 삶만이 사유할 수 있다. 인공지능에는 바로 이 삶이 없다. (...)

 

인공지능은 계산장치일 뿐이다. 물론 인공지능은 학습능력이 있고 딥 러닝 능력도 있지만 경험을 하는 능력은 없다. 고통이 비로소 지능을 정신으로 변환시킨다. 고통의 알고리즘은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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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우리가 짐작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그 치유력을 선물한다.  - 하이데거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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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인간이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그에게 멈출 곳과 머무를 곳을 제공해주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해준다. 고통은 인간의 현존재를 떠받쳐준다. 이 점에서 고통은 쾌감과 다르다. 고통은 벗어날 수 있는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고통은 인간 현존재의 중력을 형성한다. p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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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질서, 대지의 질서는 오늘날 종말을 맞고 있다. 이 질서는 디지털 질서에 의해 대체된다. 하이데거는 땅의 질서를 사유한 마지막 사상가였다. 죽음과 고통은 디지털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방해일 뿐이다. 슬픔과 동경도 의심스러운 것들이다. 디지털 질서는 가까움과 멂이 주는 고통을 모른다. 가까움 안에는 멂이 기입되어 있다. 디지털 질서는 가까움을 얄팍하게 만들어 거리 없음으로 바꿈으로써 가까움이 고통을 주지 않게 한다.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제는 모든 것을 도달할 수 있고 소비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꾼다. (...) 디지털 질서에는 "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주저하는 머뭇거림의 느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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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계는 아우라를, 나아가 향기를 잃는다. 이 세계는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은 타자의 다름, 즉 타자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타자성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다. "근원적 거리"거 없다면 타자는 너가 아니다. 타자는 그것으로 사물화된다. 타자는 그 다름 속에서 호출되는 대신 소유된다.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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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매체와 네트워크에서 과도하게 등장하는 고통과 폭력의 영상들 또한 우리가 침묵하는 관객의 수동성과 무관심성에 빠져들도록 강요한다. 이런 영상들은 너무나 대량으로 유포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영상들을 인지적으로 처리할 수 없다. 이 영상들은 그것을 지각하도록 우리를 압박한다. 그것들은 수전 손택이 고수하는 도덕적 명령, 즉 "그 그림은 말한다. 그것이 끝나게 하라 개입하라, 행동하라."라는 명령을 낳지 않는다. 폭력과 고통을 보여주는 대량의 영상들은 지각을 행동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킨다. 집중적인 관심과 당혹감이 있어야 행동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이 파편화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당혹감은 생겨날 수 없다.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과음증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흔한 인간학적 가정은 공감 능력이 급속히 줄어드는 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갈수록 공감이 상실되어가는 것은 타자의 소멸이라는 근본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통사회는 고통으로서의 타자를 제거한다. 타자는 대상으로 사물화된다. 대상이 된 타자는 고통을 주지 않는다. p29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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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영구히 지속되는 고통 없는 삶은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이 아닐 것이다. 삶의 부정성을 억압하고 내쫓는 삶은 스스로를 제거한다. 죽음과 고통은 서로 뗄 수 없다. 고통 속에서 죽음이 선취된다. 모든 고통을 제거하려는 자는 죽음 또한 없애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고통이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좀비의 삶이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철폐한다. 인간은 불멸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삶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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