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소설, 시99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다시 읽기 프라하 여행 전에 함 봐야지 하며 집어들었다가 너무 재밌어 단숨에 읽은 책. 90년대 샀던 책들은 노랗게 변색되어 다 정리했는데, 감사하게도 민음사 판 이 책은 내지가 짱장한 채로 내 책장에 여태 꽂혀 있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이 소설이 이렇게 훌륭한 소설이었다니... 이십대에 읽었을 땐 이 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네... 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각각 대변하는 테레사와 사비나. 이십대 시절엔 테레사의 무거움이 낯설었다. 그때는 이것저것 고민이 많았지만 내 삶이 존재론적 무게를 짊어진 건 아니었다. 부모님은 아직 건장했고, 대학생인 내겐 나 자신의 앞가림만 문제였을 뿐 타인에 대한 책임감 같은 건 없었으니까. 내 삶이 무거워지기 시작한 건 취업 이후부터고 결정적으로는 결혼 이후다. 마치 늪처럼 .. 2025. 3. 7. [우리들 /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__ 디스토피아 소설의 원조 "병이 심하군요! 영혼이 생긴 겁니다." 영혼? 고대에 사용하다 오래전에 사라진, 이상한 단어. '영혼을 일깨워', '영혼 없이'라는 표현은 종종 사용해도, '영혼'은? "몹시... 몹시 심각한가요?" 내가 중얼대자, 가위가 매섭게 자른다. "치유 불가능." (...)"하지만 영혼이 갑자기 왜, 왜 나오나요? 나는 지금까지 영혼이 없었는데, 갑자기... 왜... 아무도 없는 영혼이 왜 나만...?" (...) "상상력을 잘라내야 한다고. 누구든... 상상력 박멸. 오로지 수술, 철저하게 수술하는 방법으로..." 1.이 훌륭한 소설을 이제야 읽다니... 조지 오웰이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보다 영감이 더 풍부하다며 극찬한 책이다. 그의 '1984'에 깊은 영향을 주기도 했고. 1894년생 자먀찐은 볼셰비.. 2025. 2. 3. [동물농장 / 조지 오웰] 다시 읽기 에서 으로 넘어왔다. 은 조지 오웰이 194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스탈린 체제를 풍자했지만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그린 것이 아니다. 권력의 부패 과정을 속속들이 탐구하면서 부패한 권력 속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왜곡되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정치적 통찰을 담고 있다. 와 주제가 일맥상통하지만 가 체제 속에 갇힌 개인의 비극을 그렸다면 은 특정 체제가 만들어지고 변질되는 좌충우돌의 과정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의 디스토피아적인 암울함과 달리 비극적 사건 속에서도 명랑함을 잃지 않는 소설이기도 하다. 오웰의 정치적 풍자와 해학이 가장 빛을 발하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오웰은 다른 에세이에서 원래 자신은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는 성향이라고 말한 바 있다.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자연주의.. 2025. 1. 27. [1984 / 조지 오웰] 다시 읽기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1984'로 넘어왔다. 이 작품은 세 번째다. 20대에 처음 읽었고, 블로그에 2013년에 다시 읽은 기록이 있다. 십여 년의 간격을 두고 2025년 또 다시 이 책을 펼쳤는데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거나 예전엔 놓쳤던 소설의 디테일적인 면을 확인하면서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책장을 덮고 결말이 남긴 깊은 슬픔에 사로잡혀서 생각했다. 는 20세기 최고의 소설이라고. 어떤 작품도 만큼 인간에 대해, 사회에 대해, 이 정도로 날카로운 고민을 담아내지는 못했다고. 소설을 읽을 때, 나는 대개 문장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전체적인 스토리에 주목하며 빠른 속도로 후루룩 읽어가는 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한 문장도 놓칠 .. 2025. 1. 20. [카탈로니아 찬가 / 조지 오웰] __ 스페인 내전이 말해주는 인간의 존엄 찰스 디킨스를 읽고 이제 조지 오웰을 다시 펼친다. 봄에 있을 런던 여행을 앞두고 찰스 디킨스, 조지 오웰, 셜록 홈즈, 버지니아 울프 등을 소환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도 다시 보면 좋을 듯한데 시간도 부족하고 다 아는 이야기이기도 해서 손이 갈 지는 모르겠다. 중학생 시절 내게 소설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 것이 디킨스라면, 성인이 되어 나의 최애 작가가 된 분이 조지 오웰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양 작가를 꼽으라면 베스트 5에 들어가는 작가다. 저널리즘에 가까운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유머와 위트로 무장한 비판 정신, 독창적인 스토리 전개와 미래에 대한 혜안까지. 조지 오웰은 내게 '지성'이 무엇인지 알려준 작가기도 하다. 그는 어떤 사안이든 이념적 편견이 없는 균형잡힌 시각으로 본질을 꿰뚫어 .. 2025. 1. 14. [위대한 유산 / 찰스 디킨스] 다시 읽기 '올리버 트위스트'와 '두 도시 이야기'에서 끝내려 했는데 뭔가 살짝 드는 아쉬움에 내친 김에 '위대한 유산'까지 읽었다. 이 작품 역시 중학교 때 너무 재밌게 읽은 책이다. 세 작품을 차례로 읽으니 한 작가의 내면을 탐험하는 느낌이 들어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위대한 유산'은 디킨스가 중년의 원숙기에 쓴 작품이라 그런지 훨씬 깊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일인칭 화자가 자전적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어서 앞의 소설들과 느낌이 사뭇 다르다. 주인공의 내적 독백이 인상적이며 캐릭터들도 훨씬 생명력이 있고 메시지도 풍부하다. 1.이 소설의 주인공은 누나네 집에 얹혀 사는 고아 소년 핍이다. 핍의 부모님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소설은 핍이 돌아가신 부모님과 그의 다섯 자녀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 묘지에 서 있는 장.. 2025. 1. 12. [두 도시 이야기 / 찰스 디킨스] 다시 읽기 '올리버 트위스트'에 이어 '두 도시 이야기'를 다시 읽다. 이 작품도 중학생 때 너무 재미있어 두세 번은 읽었던 책이다. 흥미진진한 캐릭터, 드라마틱한 서사, 결말의 웅장함을 보면 그때 왜 그렇게 빠져들었는지 이해가 간다. 학창 시절 읽었던 책들을 다시 순례하며 새롭게 느껴지는 점도 많았다. 학생 때는 시대적 배경이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나와는 상관없는 흥미로운 먼 나라 이야기 정도로 여겼던 탓이다. 놀랍게도 '두 도시 이야기'가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하다는 사실은 내 기억에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세부 내용도 대부분 잊어버렸는데, 몇 장면은 기억 저편에서 살아돌아왔다. 바스티유 감옥에서 풀려난 뒤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때때로 기억을 잃고 구두를 수선하던 마네트 박사의.. 2025. 1. 9. [올리버 트위스트 / 찰스 디킨스] 다시 읽기 30년이 넘는 세월을 훌쩍 건너 뛰어 디킨스 소설을 다시 읽었다. 중학생 때 왜 디킨스 소설이 왜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그 이유를 이제 알겠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생생하게 몰입하게 되고, 영화 같은 장면 전환이 계속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탄탄한 서사, 선악이 뚜렷한 캐릭터, 감정적으로 울컥하게 만드는 해피엔딩까지, 대중소설의 모든 매력을 골고루 갖춘 소설이었다. 영국 여왕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할 정도였으니. 신문 연재로 발표된 소설이라 각 장이 더욱 긴박감 넘치고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것 같다. 디킨스는 25살 때 이 작품으로 큰 명성을 얻는다. 그 나이에 이 정도 필력이라니, 대단하다 싶다. 1.는 권선징악과 가족 찾기라는 모티프로 보면 한편으로는 세련된 신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2025. 1. 9. [장미의 이름 / 움베르토 에코] 다시 읽기 900페이지의 긴 책도 단 한 줄로 마음에 깊이 남을 수 있습니다. 에코의 이 그런 책입니다. 대학생 때 감명 깊게 읽고는 10여 년 전에 다시 읽어야지 하며 책을 사놓았다가, 이제야 펼쳐든 책입니다. 20여년의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난 '장미의 이름'은 서문의 인용구에서부터 저를 감동시켰어요.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아 켐피스(1380-1471) 움베르트 에코가 인용한 이 구절은 중세 작가 토마스 아 켐피스가 남긴 말입니다. 책이 어떤 사물보다도 인간의 정신적 탐구의 중심에 있음을 암시하는 말인데요. 장미의 이름은 바로 이 '책'을 중심으로 중세 이탈리아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미스테리 살인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얼핏 보면 추리소.. 2024. 12. 19. [소년이 온다 / 한강] 다시 읽기 한 문장, 한 문장 넘어가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 후에도 다시 꺼내들지 못한 책, 소년이 온다... 2015년 1월에 블로그에 짧은 소감을 남겨 놓은 걸 보니 읽은 지 딱 10년이 되었다. 10년 전 샀던 책은 읽고 바로 동료에게 선물했기에 언젠간 읽어야지 하며 10주년 리커버판을 사놓은 게 올 여름이다. 서가에 꽂아두기만 하고 펼쳐들 엄두를 못 냈던 책. 그 '소년이 온다'를 이제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땐 광주의 아픔에 몸서리쳤던 기억이 난다. 잠깐씩 멈칫거릴 수밖에 없는, 내면을 파고드는 문장들 속을 서성이면서. 이번엔 전체 구성이 좀 더 눈에 띄었다. 7개 장을 통해 작가가 촘촘하게 쌓아올린 여러 문학적 장치들에 감탄했고, 그 속에 담긴 작가의 질문과 고뇌가 한층 또렷하게 .. 2024. 12. 12. [원청 / 위화] __ 운명 속에서 인간의 의지를 묻다 1.위화 작가의 책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국 현대사, 격변기라는 말로는 부족한, 그 어마무시한 광풍을 배경으로 그 시대적 고난의 한가운데를 헤쳐가는 개성 또렷하면서 인간미 넘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대단한 흡입력을 가지고 독자를 매혹한다. 위화 작가의 책은 한 번 책장을 들추면, 다음 날로 미루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끝을 봐야 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예전 지하철에서 아무 생각 없이 책을 펼쳤다가 내리는 역을 두 번이나 놓친 적이 있고, 어제는 새벽 1시 반에 가까스로 책장을 덮었다. 여운 때문에 2시 반까지 못 잤고. 어떤 중요한 일도 내 잠을 방해하지는 못하는(시험이고 발표고 뭐고 잠부터 잔다) 잠순이인 내가!! 어느 인터뷰에서 본 일이 있는데,.. 2024. 12. 1.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3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아니, 도스토옙스키가 이렇게 수다쟁이였나. 말 그대로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인물들에 대한 끝없는 묘사와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의 향연... 작가의 수다는 주연, 조연 가리지 않고 끝이 없어서, 마치 그 시대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서 내가 그 동네 까페에서 이야기를 엿듣는 것 같았다. 대화는 또 왜 그렇게 긴 지... 장광설에 다소 지칠 만하면서도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건 정말 다음 장면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작가의 필력이 실감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한 권에 600페이지가 넘는 3권의 책을 끝마칠 무렵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아니고, 엉엉 울고 있다. 그렇게 드라마틱한 결말이 아님에도...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들이 그렇게 참신한 내용이 아님에도... 눈물이 그치.. 2024. 11. 27. [제주도우다 1~3 / 현기영] — 제주 4.3을 집대성하다 "영미야, 너 방 안의 코끼리란 말 알지? 우리가 자는 어둡고 좁은 방에 들어와 있는 코끼리, 너무 크고 너무 어두워서 그 실체를 잘 알 수 없는 것. 그게 4.3이야. 우리를 깔아뭉개버릴 것 같은 압도적인 무게와 거대한 부피. 정말 무섭다!" (3권 p357) 팔순을 넘긴 현기영 선생이 쓴 역작 '제주도우다' 3권을 이제 다 읽었다. 선생의 필력이 없었더라면 끝까지 읽지 못했을 소설.시작하는데 오래 걸렸을 뿐, 책장을 접어들자 이야기의 끝이 궁금해중단할 수가 없었다. 대작가는 다르구나 했다. 이토록 많은 등장인물과 이토록 끔찍한 사건들... 작가는 '안창세'라는 소년과 조천리 마을 사람들을 중심 기둥으로 잡아서이야기를 풀어간다. 그 이야기 속에는제주 사람들이 조선 이래 대대로 겪어왔던 거칠고 투박한 .. 2024. 10. 17. [철도원 삼대 / 황석영] __ 부커상 후보작 감탄과 아쉬움이 동시에 들었던 작품. 부커상 후보작 '철도원 삼대'를 읽었다. 워낙 두꺼운 책이라 주말 하루가 소요되었는데 그럼에도 꼼꼼히는 못 읽고 조금 속독한 책. 감탄한 부분은 철도, 그리고 영등포를 무대로 우리 근대사를 꿰뚫은 점. 철도는 근대화의 상징이자 식민 통치의 상징이다. 그 철도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6.25 전쟁과 분단, 이산가족, 그리고 현대 고공농성 철탑에 오른 후손까지... 한 마디로 한반도 백년사를 철도를 중심으로 아우른다. 그 천부적인 이야기 솜씨에 감탄했다. 아쉬운 점은 작가가 시도한 '마술적 리얼리즘'이 소설 중심부를 차지하지 못하고 주변에 머문 것. 사실 이 소설에서 가장 캐릭터가 살아있고 재미있고 생동감 넘치는 부분은 죽어서도 문득문득 나타나는 주안댁과 신기 있는 신금.. 2024. 5. 22. [사랑과 혁명 1~3 / 김탁환] — 19세기 천주교인들을 만나다 1권을 보면서 다 읽는데 적어도 일주일 이상 걸리리라 생각했다. 말이 세 권이지 1권은 600페이지, 2권 3권도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이라 보통 책으로 5권 분량은 족히 넘는다. 하지만 시대적, 공간적 배경과 각 인물들의 개인사가 등장하는 1권만 다소 천천히 읽었을 뿐, 2권부터는 정신없이 읽었다. 이 이야기가, 각 인물들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라는 철학적이고 무거운 소재를 이토록 빠져들어 읽게 하다니 역시 대작가다운 필력이었다. 곡성을 배경으로 천덕산, 동이산, 순자강... 곡성 들판과 강줄기와 이름 모를 숱한 골짜기들을 내가 직접 보듯이 생생한 감촉을 느끼면서 19세기 삶의 공간 속에 흠뻑 빠져들었다. 옹기 굽는 덕실마을의 교우촌의 삶도 인상 .. 2023. 11. 1. 이전 1 2 3 4 ···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