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여행 전에 함 봐야지 하며 집어들었다가 너무 재밌어 단숨에 읽은 책. 90년대 샀던 책들은 노랗게 변색되어 다 정리했는데, 감사하게도 민음사 판 이 책은 내지가 짱장한 채로 내 책장에 여태 꽂혀 있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이 소설이 이렇게 훌륭한 소설이었다니... 이십대에 읽었을 땐 이 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네...
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각각 대변하는 테레사와 사비나. 이십대 시절엔 테레사의 무거움이 낯설었다. 그때는 이것저것 고민이 많았지만 내 삶이 존재론적 무게를 짊어진 건 아니었다. 부모님은 아직 건장했고, 대학생인 내겐 나 자신의 앞가림만 문제였을 뿐 타인에 대한 책임감 같은 건 없었으니까. 내 삶이 무거워지기 시작한 건 취업 이후부터고 결정적으로는 결혼 이후다. 마치 늪처럼 점점 삶의 무거움에 빠져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 것도 마흔 넘어서인 것 같다.
이 소설은 20세기 후반작이다보니 현대인들이 맞닥뜨리는 실존적 불안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네 명의 남녀가 직면하는 다채로운 연애 감정과 상충되는 욕망들 사이에서 영원회귀와 순간성, 필연과 우연, 운명과 자유 등 다양한 철학적 주제들이 교차한다.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은 책이다. 다 읽고 나면 삶의 덧없음과 무게감을 동시에 실감하고 성찰하게 되는 책이다.
1.
우리 삶은 가벼운 것일까, 무거운 것일까. 소설은 이와 같은 묵직한 화두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을 니체가 의도한 바와 다르게 해석한다. 니체는 영원히 반복해도 좋을 만한 것들을 사는 것이 진짜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가 내린 선택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우리는 결코 함부로 선택하지 못할 것이고 그 선택은 엄청난 무게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 삶은 한 번 뿐이다. 우리는 동일한 순간을 반복해서 경험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결코 알지 못한다. 이미 그 시간은 지나갔기에 무엇이 더 나은 것인지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작가에겐 반복하지 못하는 삶은 살아본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 한 번이라는 것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삶은 본질적으로 덧없고 공허한 것이다. 보통 우리는 한 번밖에 살지 못하기에 삶을 무거운 것으로 간주하고 윤회 등 다시 살 기회가 있다면 삶을 좀 더 가볍게 여기게 되는데, 작가는 정반대다. 아무런 반복이나 영원성이 없는 삶의 유한성은 모든 선택을 가볍게 만든다. 어떤 것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인식은 삶을 운명과 책임, 필연적인 것들로부터 해방한다. 이 소설에는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 속을 방랑하는 두 커플이 등장한다. 자유의 가벼움을 마음껏 누리는 인물들이 있는가 하면 운명과 책임의 무거움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관계 속에서 예상치 못한 변화를 겪는다는 점이다. 가벼웠다가 무거워지기도 하고, 무거웠다가 가벼워지기도 한다. 그 삶의 행로를 하나하나 따라가보자.
2.
실력을 인정 받는 프라하의 외과의사 토마스는 사랑을 한없이 가벼운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누구에게도 충실하지 않으며 대상을 자주 바꾸며 섹스를 즐긴다. 그는 3의 법칙에 따라 한 사람을 자주 만난다면 3번 이상 만나지 않고, 오래 만난다면 3주 이상의 간격을 두고 만난다. 여인들을 자기 집에 재우지도 않는다. 토마스에게 유일하게 무거운 것은 의사로서의 본분이다. 수술이 잘 안 되면 집에 와서도 괴로워할 만큼 그 일은 그에게 의미를 준다. 하지만 여인들은 그에게 의미론적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
그런 토마스가 변화하는 계기는 테레사와의 우연한 마주침이다. 이들의 만남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우연성 위에 예상치 못한 '시적 연상'이 덧붙을 때다. 테레사는 토마스에게 모세처럼 '강물에서 바구니에 실려온 아기'를 연상시킨다. 토마스는 결국 그녀와 결혼하지만 그는 결혼 후에도 자유분방한 애정 행각을 멈추지 않는다.
테레사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시골마을 바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던 테레사에게 사랑은 무겁고 진지한 것이었다. 그녀에게 사랑은 운명이자 구원이었으니까. 토마스는 그녀를 억압적인 어머니와 시골 생활로부터 탈출시켜준 존재였다. 토마스를 따라 프라하로 이주한 테레사에겐 토마스만이 삶의 의미를 지탱하는 기둥이었고, 그 외 모든 것은 한없이 가벼웠다. 그녀는 사진 작가라는 새로운 일에 열정적으로 몰입하지만 그 일을 그만두는 것에 미련이 없다.
그 결과 테레사는 토마스의 바람끼에 끝없이 고통 받는다. 토마스는 태레사를 안쓰러워하지만 자신에게 다른 여인과의 관계는 축구경기 관람과 다름없었기에 테레사를 사랑한다고 해서 다른 만남을 왜 그만두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테레사는 죽을 만큼 괴로워하고 토마스를 떠나려고 시도한다. 토마스는 테레사와의 사랑만큼은 가볍게 여길 수 없었기에 서로를 때로 증오하면서도 마지막 순간에는 언제나 테레사를 선택한다. 그 선택은 토마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1968년 인간적인 사회주의를 주창했던 프라하의 봄은 소련군의 진주로 짧게 끝난다. 토마스는 안전한 스위스로 피신하지만 결국 테레사를 따라 프라하로 돌아온다. 공산주의 체제에 협력하기를 거부한 토마스는 의사직을 박탈당하고 창문 청소부로 일한다. 결국에는 외진 시골로 내려가 트럭 운전사로 살아가게 된다. 프라하나 제네바처럼 토마스를 유혹하는 여인들이 더이상 없는 곳이다.
십 년의 세월 끝에 두 사람은 평온한 일상 속에서 단순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토마스는 테레사를 이해하게 되고 의사라는 천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테레사는 자신이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토마스를 막다른 곳에 이르게 했다는 깨달음에 이르고 토마스에 대한 의심과 원망이 연민으로 바뀐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 속에는 포기한 것들에 대한 슬픔과 다가올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 작가는 종착점에 이른 그들의 삶을 두고 '슬픔은 형식이고 행복은 내용'이라고 말한다.
3.
사비나는 자유롭고 가벼운 삶을 추구하는 화가다. 그녀는 공산주의 체제뿐 아니라 모든 관습과 키취(kitch)를 거부한다. 키취는 통상적으로는 고급문화에 상반되는 저속한 취향, B급문화를 의미한다. 하지만 작가는 키취를 더 폭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키취는 고상한 척하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모든 감정적 가식을 뜻한다. 이념적 가치나 가족사진을 보며 따뜻함을 연상하는 등 '신파'와 가까운 감정들은 모두 키취에 해당한다.
사비나는 그녀를 현실에 묶어두는 모든 것을 떠난다. 프라하를 떠나자 자신에게 따라붙은 체제에 저항하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못견뎌하고 고상한 인격을 지녔던, 자기와 가장 잘 맞는 남자인 프란츠도 떠난다. 그녀는 프란츠의 숨겨진 애인으로는 만족했으나 프란츠가 자기 부인을 떠나 사비나와 정식으로 결혼하고자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사회적 역할을 연기하고 키취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사비나와 프란츠가 세상을 얼마나 다르게 보는지를 '이해되지 아니한 단어들'이라는 장을 통해 조목조목 보여주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사비나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닫는다. 프란츠에게 계속 머물렀더라면 이해되지 않은 단어들이 이해로 바뀌었을 거라고. 아마도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거라고. 그녀는 조금 후회하지만 떠남과 배반을 계속한다. 결국 자신의 출신도 숨기고 미국이 주는 익명성 속에서 살아간다. 그녀는 삶의 무거움을 일면 이해하면서도 끝까지 가벼움 속을 항해하다가 죽는다. 자유롭지만 아무도 기억해주지 못하는 삶이다.
대학교수 프란츠는 마음속에 이상과 가치라는 무거움을 품고 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나 아내 안에 있는 여성을 존경하기에 그녀를 떠나지 못한다. 그는 사비나의 자유로움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마침내 사비나와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그의 영혼이 어느 순간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내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그때 사비나는 떠나버린다.
그녀가 떠난 후 비로소 프란츠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그는 대학 앞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고 난생 처음으로 그 자신의 취향으로 공간을 꾸민다. 그에게 여태 느끼지 못한 새로운 활력이 찾아오고 그는 곧 여대생과 동거를 시작한다. 그는 아내를 떠나서 행복했고 정신적 자유로움을 느끼며 즐겁게 연구에 몰두한다. 하지만 다시 무거움으로 돌아가고 마는데, 그의 내면에서 지금 현재의 삶보다 그가 가치 있다고 이상화한 삶에 대한 동경이 더 큰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사비나는 체제나 이념, 통념 등 키취를 강력하게 거부했었다. 하지만 프란츠의 마음 속에서 사비나는 이상화한 관념으로 자리잡으며 그에게 또다른 종교로 승화되었다. 프란츠는 지식인들이 캄보디아 지뢰밭을 행진하는 행사에 자원한다. 그것이 진짜 가치 있는 행동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사고를 당해 죽음을 목전에 두고야 자신의 삶에 진정 의미 있는 대상이 여대생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사비나에게 배운 가벼움을 무거운 이상으로 바꿔버린 인물, 소설에서 가장 안타까운 대목이었다.
4.
네 명의 인물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무거움과 가벼움을 살아간다. 토마스의 가벼운 욕망과 테레사의 무거운 사랑, 사비나의 가벼운 방랑과 프란츠의 무거운 이상,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하는가? 토마스와 테레사의 슬픔이 깃든 행복, 사비나의 외롭고 헛헛한 자유, 이 둘 중에서 무엇을 택하고 싶은가? 사실 우리의 삶은 그 둘 중 하나라기보다는 항상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우리는 자유와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한다. 운명은 무겁지만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유는 가볍지만 결국 공허함에 빠지게 된다.
이 소설이 훌륭한 이유는 무거움과 가벼움이 한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요소라는 점을 잘 간파한다는 사실에 있다. 사랑은 인간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강력한 힘이지만 고통과 집착이라는 무거움을 동반한다. 그래서 사비나는 떠날 수밖에 없다. 그녀의 떠남은 자유인가, 도피인가.
작가는 작중인물들의 선택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삶이 가볍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이 아니며 무겁다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다. 다만 작가는 사랑이 주는 행복에는 고통과 슬픔이 깃들어 있으며, 책임으로부터의 자유에는 외로움과 헛헛함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가만히 보여줄 뿐이다. 작가는 토마스와 테레사를 통해 사랑의 무거움을 긍정하면서 사비나의 가벼움도 그 자체로 존중한다. 운명의 무거움을 받아들이는 것과 통념을 배반하는 것에는 모두 용기가 필요하다.
작가가 비판적 시선을 보내는 것은 공산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의 무거움과 키취의 가벼움이다. 현실에서 곁에 있는 여대생보다 자신의 내적 신념을 더욱 사랑했던 프란츠의 죽음은 그의 모든 진심이 오해된 채 결국 키취로 끝이 난다. 어쩌면 자기 삶을 사랑하는 힘이 미약하기에 공산주의 체제나 관념적 이상에 도취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삶에 의미를, 일종의 무거움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가 보기에 체제나 키취는 운명적인 것과 거리가 멀기에 삶에 의미를 주지 못한다.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전쟁은 한없이 무거운 것이지만 그 결과는 키취라는 점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이 소설은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지, 그리고 그 덧없음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아름답고 철학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삶이 본질적으로 덧없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기에 토마스와 테레사처럼 사랑의 무거움을 받아들이고 그 길을 따라가도 좋다고. 사비나처럼 솜털처럼 가볍게 살다가 흩어져도 좋다고.
한 생이 끝나고나면 모든 것은 키취(뻔한 결말)로 변한다. 키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죽음은 없다. 그러므로 지금 흐르는 이 시간, 이 덧없음 속에서만 진정한 자유와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이 덧없음 속에서만 시적 연상이 태어나 사랑이 시작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삶은 '슬픔은 형식이고 행복은 내용'이다. 이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