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로니아 찬가'에서 '1984'로 넘어왔다. 이 작품은 세 번째다. 20대에 처음 읽었고, 블로그에 2013년에 다시 읽은 기록이 있다. 십여 년의 간격을 두고 2025년 또 다시 이 책을 펼쳤는데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거나 예전엔 놓쳤던 소설의 디테일적인 면을 확인하면서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책장을 덮고 결말이 남긴 깊은 슬픔에 사로잡혀서 생각했다. <1984>는 20세기 최고의 소설이라고. 어떤 작품도 <1984>만큼 인간에 대해, 사회에 대해, 이 정도로 날카로운 고민을 담아내지는 못했다고.
소설을 읽을 때, 나는 대개 문장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전체적인 스토리에 주목하며 빠른 속도로 후루룩 읽어가는 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한 문장도 놓칠 수가 없어서 문장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었다. 간결한 문장, 놀라운 아이러니, 그 아이러니가 전달하는 깊은 감정들... 체제 비판적인 이야기가 그 어떤 연애소설보다도 깊고 강렬한 감정을 불러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 체제가 인간성을 개조하는 과정이 우리에게 인간성과 자유의 본질에 대해 가장 깊고 아프게 사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웰은 늘 내게 경이로움을 선물하는 작가다.
그렇다면 이제 이 작품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소설의 주인공 윈스턴이 살고 있는 시대는 각 나라들이 세 개의 거대한 제국으로 통합되어 있다. 윈스턴이 사는 오세아니아는 전체주의 국가로 모든 것이 당에 의해 통제된다. 그 당의 통제 방식은 독특하고 교묘하다. 빅브라더로 대표되는 그 당은 그저 무력과 폭력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정상적인 사고와 비판 자체를 무력화할 수 있는 통치 기술을 갖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의 무의식까지 지배하고자 시도한다. 그 방법은 '말'을 통제하는 것이다.
윈스턴이 사는 1984의 세상은 가치가 전도된 '말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그는 외부당원으로(내부당원보다 계급적 지위가 낮음) '진리국'에서 일한다. 진리국이 하는 일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현재에 맞게 끊임없이 과거의 사실을 수정하는 것. 그래서 당은 자기가 했던 말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지만, 언제나 옳다. 과거에 했던 말을 고치면 되니까. 인간의 판단력은 과거에서 현재에 이어지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사건을 이해하고 그것을 비교하는 가운데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오세아니아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기에 질문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그러한 정신 상태를 작가는 '이중사고'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중사고는 다음과 같은 경로로 사람들에게 뿌리내린다. 먼저 당의 선전 선동과 조작된 뉴스가 텔레스크린에서 쉴새없이 울려퍼지기에 사람들은 일어난 사건들을 연결하여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다. 텔레스크린은 계속해서 새로운 사실을 공포하고 사람들은 며칠 전에 일어난 일도 몇 초만에 쉽게 망각해 버린다. 그러다보면 점차 논리적 모순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게 된다. 상반된 사실들이 잇따라 등장해도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당의 명령을 진실로 간주하고 비판적 사고는 완전히 마비된다.
이 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해 오세아니아는 크고 작은 전쟁을 동원한다. 내부적으로는 골드스타인 세력과의 전쟁이 있다. 그가 실존 인물인지 당이 지어난 가상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골드스타인은 잡히는 법이 없으며, 당은 언제나 골드스타인 일당의 테러를 보도하면서 사람들에게 증오와 혐오감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외부적으로는 다른 제국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 잊을 만하면 도시 어디선가 폭탄이 터진다. 윈스턴은 진리국에서 진실을 조작하는 일을 해왔기에 과연 이 전쟁이 진짜일까 의심하곤 한다.
당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아예 생각의 싹을 잘라야 한다. 사상경찰의 감시만으로는 부족하다. 당은 기존의 언어를 신어로 대체해가는데, 아예 단어를 삭제하는 작업을 한다. 신어에는 추상적인 관념이나 섬세한 감정 표현과 관련된 모든 단어들이 조금씩 사라진다. 이 작업을 맹렬한 열정으로 해나가는 사임은 당에 충성했지만 그의 뛰어난 두뇌 때문에 결국 '증발'된다. '증발'이란 당이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결정한 사람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자유연애는 물론 허용되지 않는다. 이성간의 에로스와 가족간의 따스한 돌봄 등 모든 인간적인 감정은 체제에 위협적이어서 철저히 통제된다. '애정국'에서는 노동자들을 위해 일부러 값싼 포르노를 만들어 에로스가 강렬한 열정으로 진화하는 것을 막는다. 체제에 저항하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인간의 정욕과 정열을 통제하는 것이다. 억눌린 성욕은 다른 데서 분출한다. 당의 선전 선동에 대한 히스테리컬한 지지와 적에 대한 혐오이다. 사람들이 당의 선전선동에 물드는 이유는 성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전체주의 체제가 완성된다.
2.
이러한 완벽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윈스턴과 줄리아는 체제를 의심했다. 윈스턴에게 그 실마리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윈스턴이 열 살 무렵 어머니와 여동생이 증발되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윈스턴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과 표정, 몇 가지 일화들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이 진짜인지 윈스턴 자신도 의심스럽다. 24시간 돌아가는 텔레스크린의 말들 앞에서 그의 사고도 마비 단계를 밟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과 다른 시대가 있었지 않을까, 과거에 대한 의문가 호기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 거리에 가서 불법이지만 몰래 골동품을 구경하기도 하고, 한 권의 오래된 노트를 사기도 한다.
글을 쓰는 것이 금지돼 있지만, 언젠가 노트를 들키면 죽음이지만, 윈스턴은 참을 수 없는 내적 갈등에 용기를 내어 공책에 글을 써본다. '빅브라더를 타도하라' 그는 글을 쓰면서 그의 머릿속에서 조각난 사실들을 정리하고 싶어한다. 그래야 진실이 분명해질 것이기에. 하지만 일터에서는 그의 내면적 갈등을 표정으로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색에 빠져든 멍한 표정 조차도 숙청 명단에 오르는 길이 될 수 있다.
그런 그의 내면을 알아본 이가 줄리아다. 마흔 다 되어가는 윈스턴보다 한참 어린 이십대의 줄리아는 젊음이 주는 생생한 활력과 뛰어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다. 줄리아는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다. 윈스턴처럼 무엇이 진실인가를 추적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적 욕망을 억압하는 당에 대한 본능적인 반발심을 갖고 있다. 그녀는 육체적 교감을 포함하여 사물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는 인물이다. 줄리아는 본능적으로 윈스턴이 다른 정신세계를 갖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매혹된다.
줄리아의 재치와 기지로 둘은 당국의 눈을 피해 밀회를 이어간다. 이 두 사람이 비밀리에 만나 대화를 주고 받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장면은 무채색의 세상 속에 등장한 총 천연색의 빛깔 같았다. 로봇이나 좀비와 다름 없이 변해간 사람들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진심어린 교감과 에로스적인 몸짓은 절망 속의 마지막 구원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두 사람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들키면 죽음이지만 만남의 기쁨이 미래의 공포를 이겼다. 윈스턴의 마음속에는 마땅한 수단만 있다면 이 체제를 전복해야겠다는 점차 마음이 커져가고 오브라이언을 통해 형제단에 가입한다. 그가 체제의 하수인인지도 모른 채.
3.
당의 감시망에 결국 포착된 윈스턴과 줄리아는 오브라이언 일당에게 고문을 당한다. 소설의 후반부는 고문에 의해 윈스턴의 정신이 붕괴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어서 읽기가 조금 벅찼다. 크게 폭력적인 묘사는 없지만, 그의 정신을 길들이는 과정 자체가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다.
고문은 어떻게 정상적인 판단력을 마비시키는가. 고통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윈스턴은 정신적 혼란에 빠진다. 극심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고문하는 자, 오브라이언의 입맛에 맞는 대답을 해야 한다. 윈스턴은 자기 대답과 오브라이언이 좋아할 만한 대답 사이에서 헤매다가 마치 빙의되는 것처럼 오브라이언의 사고에 점점 동조한다. 가해자가 원하는 것에 모든 정신이 집중되는 것, 정말 끔찍한 가스라이팅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윈스턴은 알고 있다. 자신이 오브라이언에게 패배했어도 자기 가슴 속에 줄리아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걸. 윈스턴의 내면은 줄리아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를 기다리는 건 수감자들이 죽었으면 죽었지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101호실이다. 101호실에서는 윈스턴이 가장 끔찍해하는, 그가 결코 대적할 수 없는 존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윈스턴은 줄리아를 배신한다. 나 대신 그녀를 여기에 처넣으라고.
이 소설의 탁월한 점은 고문의 물리적 폭력성만을 다루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인간의 심신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파괴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줄리아 역시 101호실에서 윈스턴을 배신했다. 오브라이언의 인간 개조는 성공하고 이 두 사람은 얼마 후 거리에서 우연히 재회한다. 이 둘의 가슴 속엔 서로에 대한 어떤 사랑도 우정도 회한도 남아있지 않다. 고통은 그들의 정신을 파괴했고, 그들이 101호실에서 선택한 배신은 서로에 대한 연민마저 연기처럼 사라지게 만들었다. 둘은 서로를 조금도 그리워하지 않은 채 무심하게 헤어진다. 읽으면서 먹먹한 슬픔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감옥에서 나온 윈스턴은 난생 처음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체제에 의문을 품었을 때 늘 잡힐까 하는 두려움에 떨었고, 줄리아를 만나면서는 그 공포감이 구체적으로 다가왔고, 고문으로 극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윈스턴. 윈스턴이 행복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러한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체제를 온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되면서 윈스턴을 평생 괴롭힌 의문, 두려움, 공포는 사라진다. 소설 <1984>는 이렇게 조금의 희망도 암시하지 않은 채 비극적으로 끝맺는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문득 북한이 떠올랐다. 북한 주민들은 왜 김일성 체제를 거부하지 못하는가. 권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은 그 체제를 받아들임으로써만 행복해질 수 있기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조지 오웰은 이런 비극적 결말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파시즘(전체주의)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그 체제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인간성은 이렇게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라고. 파시즘 체제는 선동과 선전으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감정까지 길들일 수 있다고. 한 번 길들여지면 벗어나기 어렵다고. 그래서 파시스트를 양산하는 파시즘 체제는 세상에서 가장 사악하고 위험한 것이라고.
오웰은 당대에 독일 등에서 발호한 파시즘을 목격했고, 정치적 선동이 난무했던 스페인내전에 직접 참전했으며, 스탈린 체제의 폭압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인간의 심리를 이처럼 예리하게 들여다본 작품을 쓸 수 있었으리라. 작가가 비판하는 건 단지 스탈린 체제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파시즘이라고 보면 되겠다.
2024년 현재, 파시즘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는가. 그렇지 않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1984'가 현실에서 도래하지 않았음에 감사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빅브라더는 존재하지 않지만, 모두가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 스몰브라더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빅브라더는 공포와 혐오로 사람들을 지배하지만, 스몰브라더는 도파민과 쾌락이라는 더 강력한 무기를 탑재하고 사람들을 길들인다. 우리가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것 같지만 실은 알고리즘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다. 그리고 어쩌면 자본 그 자체가 빅브라더의 목소리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자취를 감춘 줄 알았던 인간형이 부활했다. 정상적인 사고가 마비되고, 이 세상 모든 문제의 원인이 중국과 북한에 있으며, 그들에 대한 혐오로 똘똘 뭉쳐있는 사람들. 가짜뉴스에 선동되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판단할 능력을 상실하고 반대편은 다 때려죽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북한에 살았다면 그 체제를 가장 열렬히 찬양했을 사람들). 헌법 질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은 불법적으로라도 제거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계엄 선포 이후, 그리고 어제오늘 뉴스에서 또렷하게 목격하는 얼굴들이다. 도래한 파시즘의 얼굴.
그간 한국사회에선 극렬한 정치적 갈등이 계속 진행되었지만 나는 태극기부대로 대표되는 한 집단을 파시즘이라고까지 규정하진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확실히 알겠다. 그들은 파시스트다. 그들은 굉장히 권력지향적이다. 권력을 잘 행사해서 세상을 경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만이 목적이다. 권위주의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을 숭상하고 그것에 복종하기를 원한다. 오직 권력의 쟁취가 목적이기에 그것을 방해할 법한 세력에게 부정선거, 공산주의, 종북주의 등 말도 안 되는 딱지를 덧붙여 씌운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렇게 혐오의 딱지를 붙여야 그들 입맛대로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대표적인 파시스트다.
<1984>는 세 번째 펼쳐보지만, 올해처럼 가슴 아프게, 의미심장하게, 구체적인 나의 현실로 읽은 적은 없었다. 파시즘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20세기의 화두가 21세기에 다시 부활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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