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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소설, 시

[위대한 유산 / 찰스 디킨스] 다시 읽기

by 릴라~ 2025. 1. 12.

'올리버 트위스트'와 '두 도시 이야기'에서 끝내려 했는데 뭔가 살짝 드는 아쉬움에 내친 김에 '위대한 유산'까지 읽었다. 이 작품 역시 중학교 때 너무 재밌게 읽은 책이다. 세 작품을 차례로 읽으니 한 작가의 내면을 탐험하는 느낌이 들어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위대한 유산'은 디킨스가 중년의 원숙기에 쓴 작품이라 그런지 훨씬 깊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일인칭 화자가 자전적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어서 앞의 소설들과 느낌이 사뭇 다르다. 주인공의 내적 독백이 인상적이며 캐릭터들도 훨씬 생명력이 있고 메시지도 풍부하다. 
 
1.
이 소설의 주인공은 누나네 집에 얹혀 사는 고아 소년 핍이다. 핍의 부모님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소설은 핍이 돌아가신 부모님과 그의 다섯 자녀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 묘지에 서 있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 매혹적인 서두는 독자를 한순간에 이야기에 몰입시킨다.  곧이어 핍은 감옥선에서 탈출한 죄수와 우연히 마주치고 그 운명적인 만남은 핍의 삶을 완전히 뒤바꾼다. 
 
소설에서 핍이 만나는 세계는 세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째, 누나와 매형 조가 있는 세계다. 핍의 누나, 조 가저리 부인은 히스테리가 심하고 매정했지만, 천성이 선하고 자애로운 매형 조가 있어 핍은 늘 든든하다. 대장장이로 일하는 조는 글자를 깨치지 못했다. 그래서 핍은 조를 마음 깊이 따르면서도 상류사회에 대한 동경으로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 이런 핍의 내적 갈등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점점 심화된다. 그밖의 주변 인물로 조와 상반되는 음험한 올릭이 등장하고, 펌블추크 같은 위선적인 인물도 실감나게 묘사돼 있다. 
 
두 번째 세계는 미스 해비샴의 저택이다. 미스 해비샴은 세상으로부터 상처 입고 히키코모리처럼 은둔하는 인물이다. 돈만 챙기고 결혼식 때 달아난 연인 때문에 마음을 차갑게 닫았다. 그 이후로 그녀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저택은 폐허처럼 버려져 있다. 그녀는 양녀 에스텔라를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데 희열을 느끼는 차가운 심장의 소유자로 키우지만, 소년 핍에겐 그 본질을 알아챌 눈이 없다. 에스텔라는 핍에게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자 상류사회를 향한 욕망을 구체화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핍이 만나는 세 번째 세계는 청년기에 만난 런던의 상류사회다. 그가 오랫동안 동경해왔던 그 세계는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차 있었다. 상류사회 사람들 다수가 탐욕적이고 돈과 지위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던 것이다. 에스텔라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핍은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노력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는 매형 조에 대한 감사를 잊고 허영심에 빠진다. 조를 보며 노동자의 투박한 차림새를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내적 혼란을 겪는 핍이 런던에서 경험한 유일하게 따뜻한 관계는 친구 허버트와 변호사 웨믹과의 우정이다. 이 두 사람은 소박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핍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고 위기의 순간에 중요한 조력자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정신적 나태와 향락으로 흐를 수도 있었던 핍의 런던 생활에 대균열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진다. 
 
2. 
핍은 오랫동안 자신의 후견인을 미스 해비샴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미스 해비샴이 에스텔라와 자신을 맺어주려고 유산을 주었을 거라는 환상이 산산조각 나면서 그의 정체성에도 큰 위기가 찾아온다. 그가 누렸던 모든 것은 상류사회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그가 가장 꺼려하는 세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여태 죄수의 돈으로 호의호식했다는 사실에 핍은 경악한다.
 
빈민층에서 태어나 정신없이 입에 풀칠을 하다보니 어느덧 범죄에 깊이 물들어버린 매그위치. 그는 자신에게 음식을 가져다준 한 아이의 순수함에 감동했고 그것이 구원의 시작이었다. 그는 사랑하고 싶었고 그 사랑의 대상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자신이 살고 싶은 진짜 삶을 매그위치는 그 아이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그것은 신사의 삶이었다. 핍을 신사로 만들겠노라 하는 꿈, 그것이 그의 구원이었고, 외국에서 외롭게 장사를 할 때 그를 지탱해준 힘이 되었다. 
 
핍이 그를 매몰차게 거부했더라면 구원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핍은 처음엔 그의 정체를 알고 충격과 강한 거부감을 느끼지만 그의 지난한 삶이 지닌 무게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매그위치가 자신을 신사로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도. 그리고 힘써 매그위치를 돕고,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도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킨다. 자기밖에 모르는 상류사회 사람들과 달리 매그위치는 핍에게 범죄에 물들 일 없는 신사로 사는 삶을 선물하기 위해 돈을 모았다. 그는 편안하게 눈을 감는다.
 
미스 해비샴에게도 구원의 기회는 있었다. 연인에게 사기 당하고 큰 상처를 입었을지라도 에스텔라를 키우며 인간적인 애정에 마음을 열고 새로운 기쁨을 얻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슬픔에만 끝없이 탐닉한다. 그녀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이유에는 그녀의 많은 유산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녀는 아무도 믿지 못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마음을 달래고자 했지만 아이에 대한 순수한 애정보다 남자에 대한 복수심이 그녀의 마음에서 승리를 얻었다. 결국 미스 해비샴은 에스텔라를 수많은 구혼자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냉랭한 여인으로 키운다. 다만 소설 말미에 미스 해비샴은 핍을 통해 타인에게 조금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핍에게 자애로우면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인격자 조. 그는 핍의 누나인 아내의 거친 성정을 말없이 견뎌왔고, 그것 때문에 핍에게 화풀이하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핍을 깊은 연민으로 돌보았다. 그는 아내가 병석에 누운 뒤에도 끝까지 잘 보살폈으며,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와 딱 어울리는 여인 비디를 만난다. 총명하면서도 사람을 돌볼 줄 아는 손이 재빠른 여인. 비디는 핍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 핍은 비디의 훌륭함을 내심 알면서도 늘 에스텔라에게 빠져 있었다. 
 
에스탈라는 양어머니가 놓은 정신적인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다.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이 대가로 따라왔기 때문이다. 돈으로 한 결혼이 파탄이 나고 깊은 상처를 입은 뒤에야 그녀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알아볼 마음의 눈이 열린다. 에스텔라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알 수 없지만, 소설의 말미에서 작가는 그녀에게도 새로운 구원이 시작됨을 암시하고 있다. 

핍의 절친 허버트, 상냥함, 신의와 우정, 지적 능력, 모든 걸 갖춘 그에게 부족한 건 단 하나, 자본이었다. 핍이 몰래 손을 써서 허버트는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고 자신의 재능을 펼쳐간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겪으며 우리의 주인공, 핍은 훌륭하게 성장한다. 비록 유산은 한 푼도 없이 사라졌고(매그위치의 재산은 국고로 환수됨), 그 자신의 힘으로 모든 걸 시작해야 하지만. 
 
3.
소설을 다 읽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우리 모두 이 소설의 인물들처럼 눈 멀어 있구나 생각했다. 오직 자신의 기분만 중요했던 핍의 누나 조 가저리 부인, 눈앞의 복수심에 사로잡힌 올릭, 과거에만 끝없이 집착하는 미스 해비샴, 해비샴의 의도를 알 만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꼭두각시 역할을 버리지 못한 에스텔라, 그리고 조와 비디의 훌륭한 인격보다 상류사회의 화려함이나 지적인 면을 더 높이 평가했던 핍.
 
정신적 성장은 언제나 어릴 적 형성된 주관적 환상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동반한다. 핍이 더이상 눈 멀지 않고 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위대한 유산' 덕분이었다. 그 유산은 두 명의 아버지로부터 온다. 한 명은 용서와 사랑의 상징, 매형 조다. 조는 핍의 서툰 젊음과 편견을 용서하고 핍이 가장 힘들 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조의 마음 한 곳은 언제나 핍을 위해 열려 있었다. 핍은 조야말로 그가 만난 가장 훌륭한 인물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또 한 명은 핍을 신사로 키우려는 꿈을 가졌던 매그위치다. 핍을 만나려는 그의 위험천만한 여행은 그의 목숨과 재산을 대가로 내놓아야 했지만, 그가 핍의 마음에 영원히 남긴 것이 있다. 환멸에 찬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바꾸려는 의지와 어린 소년에 대한 순수한 보은의 마음이다. 매그위치와의 만남은 핍의 왜곡된 환상을 깨트리고, 핍에게 고향에서 런던에 이르는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통찰할 기회를 준다. 매그위치를 돕기로 결정하는 순간, 핍은 그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것, 신의와 용기를 배울 기회를 얻는다.
 
종신형이나 교수형을 받게 될 죄수를 돕는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다. 그 결정은 핍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결단이기도 하다. 핍은 상류사회의 물질적 향락이나 지적인 우월함 대신에 인간에 대한 신의와 연민을 택한다. 그것이 핍이 매그위치로부터 받은 진정한 유산이었다. 핍은 돈이나 지위에 대한 욕망을 가볍게 털어버리고, 자신의 길을 간다. 빈손이었지만 그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젊음과 우정이 있었다. 우정을 믿으며,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시작하는 용기, 디킨스가 말하는 위대한 유산은 바로 그게 아닐까. 위대한 유산은 물질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임을 역설하면서 우리들 각자에게 진정 위대한 유산은 무엇인가 하는 묵직한 물음을 메아리처럼 들려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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