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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소설, 시

[두 도시 이야기 / 찰스 디킨스] 다시 읽기

by 릴라~ 2025. 1. 9.

 

'올리버 트위스트'에 이어 '두 도시 이야기'를 다시 읽다. 이 작품도 중학생 때 너무 재미있어 두세 번은 읽었던 책이다. 흥미진진한 캐릭터, 드라마틱한 서사, 결말의 웅장함을 보면 그때 왜 그렇게 빠져들었는지 이해가 간다. 학창 시절 읽었던 책들을 다시 순례하며 새롭게 느껴지는 점도 많았다. 학생 때는 시대적 배경이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나와는 상관없는 흥미로운 먼 나라 이야기 정도로 여겼던 탓이다. 
 
놀랍게도 '두 도시 이야기'가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하다는 사실은 내 기억에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세부 내용도 대부분 잊어버렸는데, 몇 장면은 기억 저편에서 살아돌아왔다. 바스티유 감옥에서 풀려난 뒤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때때로 기억을 잃고 구두를 수선하던 마네트 박사의 고독한 몸짓, 사랑하는 여인과 그의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칼턴의 영웅적인 희생, 그리고 그가 형장으로 가는 마차 속에서 잠시 대화를 나눈 가련한 또다른 여인까지. 이 장면들은 마치 오래된 꿈처럼 무의식 저편에서 조용히 되살아났다.  
 
1. 
'두 도시 이야기'는 마치 추리소설처럼 긴장감 넘치는 도입부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를 18년만에 찾아가는 아리따운 루시와 아버지의 옛친구이자 텔슨 은행 직원 로리 씨의 여행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그 여정은 쉽지 않다. 런던에서 프랑스로, 현재에서 과거로, 여러 개의 시간과 공간이 겹쳐지면서 아버지 마네트 박사의 비밀에 조금씩 다가간다. 
 
이들이 파리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프랑스 귀족 출신 다네이는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있다. 그를 구하는 과정에서 변호사 스트라이버와 칼턴이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다네이는 귀족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런던에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런던에서 살아간다. 긴 이별 끝에 만난 루시와 아버지 마네트 박사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마네트 박사는 자신의 비극과 에브레몽드 집안이 연결돼 있음을 직감하면서도 딸의 행복을 위해 다네이를 받아들인다. 
 
한편 다네이의 부친과 숙부, 에브레몽드 집안이 소유한 영지에서는 절망과 처참한 가난이 극에 달해 있다.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폭압은 모든 방면에 걸쳐 있었다. 마차를 거칠게 몰아서 평민들이 말발굽에 치어 죽는 게 여사였고, 귀족들에게 평민은 기르는 가축보다 못한 존재로 여겨졌다. 더이상 착취를 견딜 수 없었던 농민들은 혁명파가 되어 드파르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간다. 프랑스 대혁명은 그 모든 사람들을 바스티유에 불러 모으며 이야기는 절정을 향해 간다. 
 
2. 
'두 도시 이야기'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런던 사람 디킨스가 바라본 파리 이야기로 읽혔다. 그리고 그 점이 소설 읽기에 흥미를 더한다. 당시 계급 문제는 영국이나 프랑스 모두에게 공통된 사회적 병폐였지만, 디킨스의 시선에서는 프랑스가 훨씬 야만적으로 비춰진다.
 
디킨스는 봉건 귀족과 혁명파의 행태를 모두 비판적으로 다룬다. 그는 두 세력 모두를 객관적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프랑스 귀족들의 악행을 세세하게 묘사하여 농민들의 분노에 공감하게 만들고 프랑스 혁명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혁명의 과정과 결과를 낭만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농민들의 복수 역시 지나친 광기로 묘사된다. 혁명 세력이 권력을 잡은 후 기요틴이 쉴새 없이 작동하고 전후 사정을 가리지 않는 피의 복수가 자행된다. 
 
디킨스가 이 소설에서 혁명 과정에 실제로 참여한 사람들을 지나치게 평면적인 캐릭터로 다룬 점은 아쉽다. 귀족을 포기한 다네이와 귀족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는 드파르주 부인, 그들의 내적 갈등을 좀 더 심도 있게 다루었으면 더 깊이 있는 작품이 되엇을 것이다. 대신에 시종일관 신뢰와 성실함의 대명사인 로리 씨, 성공에 도취된 스트로베리, 충직한 크런처와 용감한 미스 프로스 등의 캐릭터가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3.
디킨스는 귀족과 혁명파 모두를 비판했다. 따라서 그의 주제의식은 제 3의 인물을 통해 구현된다. 칼턴은 과거의 잘못된 삶의 쳇바퀴를 극복하려는 욕망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생을 건 결단을 내린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다. 디킨스는 인간을 구원하는 건 계급도 혁명도 아닌, 궁극적으로는 인간성 자체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랑할 수 있는 용기, 사랑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용기다. 
 
디킨스가 보기에 역사란 지혜와 어리석음이 반복되고, 어둠과 빛이 혼재하며, 희망과 절망이 한데 섞여 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시대나 이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두 도시 이야기'는 단지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성을 향한 디킨스의 깊은 신념과 희망을 담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작가는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구원할 용기를 발휘하는가 라고. 시대를 넘어서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덧붙임) 이 소설은 디킨스가 원숙기에 쓴 작품이라 '올리버 트위스트'와 달리 명문장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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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시간이면서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지만 어리석음의 시대이기도 했다. 믿음의 신기원이 도래함과 동시에 불신의 신기원이 열렸다. 빛의 계절이면서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지만 절망의 겨울이기도 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다가도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았다. 다 함께 천국으로 향하다가도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도 물론 그런 식이지만, 언론과 정계의 목소리 큰 거물들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 시대가 극단적으로만 보여지길 원했다.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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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그랬지만, 가난은 특히 그랬다. 젊음을 되찾아 주는 마법의 방앗간이 아닌, 인생이라는 현실의 방앗간에서 갈리고 또 갈려진 사람들이 모서리마다 떨고 있었다. 그들은 마을의 모든 건물 입구를 들락거렸고, 바람에 펄럭이는 그들의 낡고 해진 옷자락이 건물의 창문 너머로도 보였다. 이들을 혹사시킨 방앗간은 젊음을 갈아 노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곳이었던지, 동네 아이들도 얼굴이 몹시 나이들어 보이고 목소리가 거칠었다. 아이들과 어른들 얼굴 위로 세월이 쟁기질한 고랑과 앞으로 생길 고랑 하나하나에 한숨과 굶주림이 메워졌다. 굶주림은 정말 어디에나 있었다. 높은 집, 기둥과 빨랫줄에 널린 낡은 옷가지들도 굶주림이었고, 그 낡은 넝마에 지푸라기, 헝겊, 나무, 종이 따위로 얼기설기 꿰매진 것도 굶주림이었다. 한 남자가 톱질하던 장작용 나무에서도 굶주림의 조각들이 튀었다. 연기가 나오지 않는 굴뚝 위에서 굶주림이 내려다보고 있었고, 온갖 쓰리게에서 동물 내장 하나 없이 먹을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더러운 거리 위에서 굶주림이 시작되었다. 상한 빵 쪼가리 몇 개가 놓인 빵집 선반에 그리고 죽은 개로 소시지를 만드는 정육점의 선반에 새겨진 글귀도 굶주림이었다. 굶주림은 돌아가는 원통 안에서 구워지는 밤 몇 알 사이에서 메마른 뼈 소리를 내며 달그락거렸고, 기름 몇 방울에 요리된 감자튀김이 담긴 보잘것없는 한 끼 그릇 안에서 잘게 부서졌다. p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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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으로 갈수록 원을 그리며 여행하는 것 같아서, 다시 시작으로 점점 더 다가가고 있지요. 우리가 결국 가야 할 길을 매끄럽게 준비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인 듯합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이 생각나고 젊고 아름다웠던 어머니(내가 이렇게 늙었다니!)도 생각나 마음이 따뜻해졌죠. 세상이 내게 그렇게 잔인하지 않았을 때 그리고 내가 내 실수들에 신경 쓰지 않았을 때의 기억들과 함께 말입니다. p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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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일은 내가 이제까지 한 모든 일보다 훨씬, 훨씬 더 좋은 일이다. 그리고 내가 취할 휴식은 내가 이제까지 알아온 모든 것보다 훨씬, 훨씬 더 좋은 휴식이다. p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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