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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소설, 시

[장미의 이름 / 움베르토 에코] 다시 읽기

by 릴라~ 2024. 12. 19.

 
900페이지의 긴 책도 단 한 줄로 마음에 깊이 남을 수 있습니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그런 책입니다. 대학생 때 감명 깊게 읽고는 10여 년 전에 다시 읽어야지 하며 책을 사놓았다가, 이제야 펼쳐든 책입니다. 20여년의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난 '장미의 이름'은 서문의 인용구에서부터 저를 감동시켰어요.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 아 켐피스(1380-1471)
 
움베르트 에코가 인용한 이 구절은 중세 작가 토마스 아 켐피스가 남긴 말입니다. 책이 어떤 사물보다도 인간의 정신적 탐구의 중심에 있음을 암시하는 말인데요. 장미의 이름은 바로 이 '책'을 중심으로 중세 이탈리아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미스테리 살인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얼핏 보면 추리소설 같지만 그 안에 지식과 권력, 이성과 신앙, 웃음과 권위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담고 있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질문과 영감을 주는 책이에요. 등장인물들의 맹신을 따라가노라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죠. 그럼 이 소설의 매력적인 부분들을 하나하나 살펴볼게요.  
 
1. 
이 소설에서 가장 매혹적인 인물은 프란치스코회 수사 윌리엄이에요. 그는 중세말의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르네상스적 사유의 선구자로 그려집니다. 만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과학적 사고를 토대로 진실에 접근하는데요. 교리나 권위에 얽매이기보다는 인간의 지성에 의지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성만을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인간의 무지와 나약함에 대해서도 커다란 연민을 품고 있는데요. 삶의 진실은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지요. 그가 보기엔 교리에 사로잡혀 이단을 처벌하는 이들이나 화형대에서 희생된 급진파나 모두 동일한 열정의 함정에 빠져 있지요. 그래서 종교재판에서 기소된 자들의 무죄를 입증해내고, 제자 아드소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따뜻하게 품어줍니다. 그는 광신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이성이라는 등불을 켜고 걸어가는 인물입니다.    
 
윌리엄의 제자 아드소는 순수하고 신심 깊은 청년으로 스승의 추리를 따라가며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가 사건을 보는 인간적인 시선은 가설을 검증하는 윌리엄의 논리적 추론과 대비되며 독자들에게 재미와 함께 성찰의 여지를 줍니다. 

윌리엄과 아드소의 관계는 셜록 홈즈와 왓슨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아드소이며 왓슨이 홈즈의 이야기를 하듯이 스승 위리엄의 이야기와 그들이 겪은 사건을 전해주거든요. 배스커빌 사람 윌리엄이란 그의 이름도 홈즈가 나오는 ‘배스커빌의 개’에서 따왔다는 말이 있죠. 아드소가 스승의 영향으로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도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2.  
이 작품의 또 하나의 매력은 다양한 캐릭터 속에 중세말의 종교적, 철학적 갈등을 잘 녹여넣었다는 점이에요. 등장인물들은 각각 상반되는 시대적 가치를 대변하는데요. 윌리엄 수사가 이성과 지성을 상징한다면 그 정반대편에 있는 인물이 호르헤 수사와 베르나르 기입니다. 이들은 각각 종교적 광신과 제도적 권위를 상징하면서 윌리엄의 합리적 세계관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호르헤 수사는 진리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을 지닌 인물입니다. 그는 하느님이 이미 모든 것을 정해놓았다고 주장하며 성서에 기록된 내용에 그 무엇도 추가해선 안 된다고 엄숙하게 선포합니다. 그에게 진리란 고정불변의 것이므로 새로운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호르헤는 호기심, 자유로운 탐구정신, 웃음과 같은 인간적인 모든 감정을 악마의 농간으로 간주하지요. 하지만 윌리엄은 자신의 왜곡된 신념에 집착하는 호르헤를 보며 악마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윌리엄 수사와 대립되는 또 하나의 인물이 베르나르 기입니다. 호르헤와는 성격이 조금 다른데요. 베르나르 기는 진리에 대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저 교황청의 권위에 맹종하는 제도적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는 종교재판 심문관으로 오래 일하며 이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것을 신이 준 사명으로 생각합니다. 그에겐 사람이 아니라 교회가 진리이며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 것이 반역입니다. 청빈을 실천하고자 하는 프란치스코파도 그에겐 의심스러운 존재이며, 더 급진적인 돌치노 무리는 가차없이 화형대에서 죽어야 하는 이단입니다. 
 
레미지오, 살바토레 같은 조연도 흥미로운데요. 이들은 돌치노의 혁명에 가담했다가 그 혁명이 철저히 실패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본 인물들입니다. 이후 이들은 신념을 버리고 세속적인 것만 추구하는 타락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들을 통해 신념의 몰락이 인간을 어떻게 비루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도 지켜볼 수 있어요. 

이 인물들은 개별 인간의 차이를 넘어 중세와 근대, 권위와 이성, 억압과 자유라는 시대적 대립을 상징합니다. 로저 베이컨의 영향을 받은 윌리엄의 이성적 사고는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을 예고하고 호르헤와 베르나르 기는 중세적 세계관을 상징합니다. 이들의 갈등을 통해 우리는 중세를 붕괴시킨 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이 작품의 세 번째 매력은 소재의 상징성입니다. 작품의 주요 무대인 수도원 장서관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그 지식을 통제하는 권력을 상징합니다. 도서관은 특정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비밀리에 통제하고 있습니다. 호르헤는 다른 수도사들이 금서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갖가지 덫을 놓기도 합니다. 지식의 통제가 권력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게 됩니다. 
 
호르헤가 특히 증오한 책이 웃음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이라는 점은 이 사실을 잘 입증합니다. 웃음은 공포를 물리치고 권위를 해체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윌리엄은 진리를 비웃을 수 있어야 하겠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과 눈물이 영혼의 목욕 같다고 말했고요. 이 책에서 웃음은 인간 정신의 해방을 상징합니다. 진리 탐구의 필수적인 요소지요.    
 
윌리엄은 범인을 찾고 문제를 풀지만 수도원의 파멸은 막지 못했는데요. 그 시대 가장 많은 장서를 갖고 있던  장서관이 불에 타서 잿더미로 변하는 결말도 많은 것을 암시합니다. 사람들이 책에 접근하기 어렵게 하기 위해 미로로 설계된 도서관은 불을 끄는 걸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요. 이러한 결말은 지식을 통제함으로써 권력을 누리려고 했던 한 시대의 종말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집착했던 지식과 권위가 시대가 바뀌면 덧없는 것이라는 사실도 보여주고요.
 
4. 
아드소는 훗날 수도원의 폐허에서 몇 조각의 양피지를 쓸어담아 틈나는 대로 의미를 생각합니다. 도서관은 파괴되었지만 아드소가 발견한 지혜는 사라지지 않고 그의 수기를 통해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아드소가 발견한 진리는 무엇일까요.
 
저자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자입니다. 언어, 이미지, 몸짓 등의 기호가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이지요. 에코의 관점에서 책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기호이며 지식은 기호를 해독하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책을 문자 그대로 숭배하고 해석을 반역으로 간주한 시대가 있었지요. 에코는 이 점을 비판하며 지식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을 돌아보게 합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고 단순히 진리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결론을 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장미의 이름이 전하는 묵직한 메시지는 진리가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는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진리란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고 답을 내리는 특정한 언술에 담겨 있지 않습니다. 윌리엄이 보여주듯이 권위를 추종하지 않고 실수를 인정하면서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 속에 존재합니다. 그 과정에서 웃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 소설은 말하고 있습니다. 웃음을 잃고 권위에 의지하는 순간 광신과 맹신이 싹트지요.
 
소설 제목은 장미의 이름입니다. 장미의 본질은 외면한 채 이름이라는 허상만 붙들고 있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장미라는 실체는 시들고 이름만 남았기에 진리가 덧없다는 의미도 됩니다. 진리란 고정된 답이 아닙니다. 장미의 이름이 무엇이든 그 향기는 우리의 의문과 탐구 속에서만 피어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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