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야, 너 방 안의 코끼리란 말 알지?
우리가 자는 어둡고 좁은 방에 들어와 있는 코끼리,
너무 크고 너무 어두워서 그 실체를 잘 알 수 없는 것.
그게 4.3이야. 우리를 깔아뭉개버릴 것 같은
압도적인 무게와 거대한 부피. 정말 무섭다!" (3권 p357)
팔순을 넘긴 현기영 선생이 쓴 역작 '제주도우다' 3권을 이제 다 읽었다.
선생의 필력이 없었더라면 끝까지 읽지 못했을 소설.
시작하는데 오래 걸렸을 뿐, 책장을 접어들자 이야기의 끝이 궁금해
중단할 수가 없었다. 대작가는 다르구나 했다.
이토록 많은 등장인물과 이토록 끔찍한 사건들...
작가는 '안창세'라는 소년과 조천리 마을 사람들을 중심 기둥으로 잡아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 이야기 속에는
제주 사람들이 조선 이래 대대로 겪어왔던 거칠고 투박한 삶,
태평양전쟁 시기의 말할 수 없는 고생과 해방공간의 섬뜩한 비극까지
제주의 자연과 역사가 생명력을 얻고 아로새겨져 있다.
그 깊은 고난의 세월 속에도 청춘 남녀는 사랑을 하고
아기들이 태어나고 여인들은 생명의 물질을 한다.
이 소설의 훌륭한 지점은 시대와 사회가 아무리 어두워도
삶을 단단하게 엮으며 희망을 놓지 않는
제주 사람들의 삶의 표정을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 가슴 설레던 그들의 꿈과 소망은
엄청난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데 4.3.이다.
그들의 소망이 깊지 않았더라면
그들을 뒤덮은 어둠도 그렇게 깊지 않았을 것이다.
1권 일제강점기의 수난과 2권 해방공간의 혼란을 거쳐
3만 명 이상이 희생된 3권 4.3항쟁에 이르면,
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저 가슴을 칠 뿐이었다.
작가는 빠르고 역동적인 문장으로 당시를 스케치하고 있는데
그런 호흡이 빠른 문장이었기에 오히려
소설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점은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정반대다.
아직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일제강점기도 태평양전쟁도 해방공간도 625 이후도...
잘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진실을 추적한다.
이 이야기에는 현기영 작가가 추적해간
제주의 역사와 인간이 담겨 있다.
소설을 읽고나서 든 가장 또렷한 생각은
요즘 되도 않은 이념? 갈등, 역사? 갈등이 난무하는 시대에
우리 모두 잘 모른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진실을 추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추적의 최선봉에 선 사람들이 작가고 예술가다.
예술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고.
가자 지구의 학살이 4만 명을 넘었다는 소식을 듣는 지금
제주 4.3이 또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은, 이 소설은 손녀가 할아버지의 진술을 듣는
액자 구성을 취하는데, 이 연결이 조금 성글어서
내겐 그 점이 몰입을 조금 방해했다.
액자소설이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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