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를 읽고 이제 조지 오웰을 다시 펼친다. 봄에 있을 런던 여행을 앞두고 찰스 디킨스, 조지 오웰, 셜록 홈즈, 버지니아 울프 등을 소환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도 다시 보면 좋을 듯한데 시간도 부족하고 다 아는 이야기이기도 해서 손이 갈 지는 모르겠다.
중학생 시절 내게 소설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 것이 디킨스라면, 성인이 되어 나의 최애 작가가 된 분이 조지 오웰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양 작가를 꼽으라면 베스트 5에 들어가는 작가다. 저널리즘에 가까운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유머와 위트로 무장한 비판 정신, 독창적인 스토리 전개와 미래에 대한 혜안까지. 조지 오웰은 내게 '지성'이 무엇인지 알려준 작가기도 하다. 그는 어떤 사안이든 이념적 편견이 없는 균형잡힌 시각으로 본질을 꿰뚫어 보았으며, 늘 가난한 자의 편이었다.
조지 오웰 작품 중에 그간 <카탈로니아 찬가>를 놓쳤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십 년이 훌쩍 지났다. 이 책의 장르는 르포르타주다. 1936년 스페인 내전에 본인이 참전한 경험을 기록했다. 일종의 회고록이라 봐도 좋겠다. 작가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어가던 조지 오웰은 1936년 모든 것을 던지고 스페인 내전에 뛰어든다. 그리고 언론이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 복잡한 진실을 현장에서 직접 목도한다. 그 경험은 <동물농장>과 <1984>라는 걸작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스페인 내전 전후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자. 1931년 스페인에서는 제2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왕정이 폐지되고 토지 재분배와 교회 권한 축소 등의 여러 개혁이 추진된다. 이러한 개혁은 기득권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는데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 좌파 세력은 더욱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한다.
1936년 총선에서 좌파 연합인 인민전선이 승리하자 우파 군부가 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프랑크를 중심으로 군사 쿠데타를 시도한다. 스페인은 공화파와 국민파로 나뉘어 내전에 돌입했고 전쟁은 이념적 대립의 극단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당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노동자와 농민 등이 공화파에 합류했고, 군부와 지주, 기업가, 가톨릭 교회, 보수적 중산층이 국민파를 지지했다.
스페인 내전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었다. 먼저 이 전쟁은 세계 각국의 지식인들이 참여한 이념적 전쟁이기도 했다. 전세계의 진보적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공화파를 지원했다. 조지 오웰 뿐 아니라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등이 직접 전장에 참전했으며, 버트란드 러셀 등이 공화파를 강력 지지하며 반파시즘 운동을 벌였고 파블로 네루다, 발터 벤야민 등도 지지하는 글을 썼다.
스페인 내전은 군사적인 면에서도 국제적인 개입을 불러왔다. 당시 파시즘 국가이던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국민파를 적극 지원했다. 공화파에 군사적 지원을 한 국가는 소련이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선언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파시즘의 위협에 대항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공화파의 급진적 개혁 성향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실질적 지원은 꺼렸고 이는 공화파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오웰의 이 책에 따르면, 소련이 많은 무기를 지원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공화파 내에서 점점 주도권을 차지함에 따라 극심한 내부 분열이 발생한다. 공화파는 원래 다양한 세력들의 연합이었다. 그런데 그중 한 세력이던 공산주의자들이 스페인 노동자들을 주요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 계열을 숙청하고 권력의 독점을 시도한 것이다. 그 결과 1939년 국민파가 내전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고 프랑코가 스페인의 독재자로 등극한다. 프랑코는 이후 36년간 스페인을 지배하고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긴 파시스트 독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2.
<카탈로니아 찬가>는 스페인내전을 직접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히면서도 곳곳에 저널리즘적 통찰이 엿보인다. 오웰은 기자처럼 날카롭게 사건의 배후에 놓인 정치적 의도들을 파헤치는 동시에 개인적인 소회를 문학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여 재미와 감동을 주었다. 다만, 읽기를 어렵게 만드는 게 하나 있다. 등장하는 여러 정당들의 이름이 다 비슷하여 이 편인지 저 편인지 계속 헛갈렸다. 통일노동자당과 통일사회당이 사이가 안 좋은데, 이름만 봐선 다 비슷해 보이니...
조지 오웰이 스페인 전쟁에서 목격한 건 인간의 고귀함과 추악함 둘 다였다. 그는 아직 혁명의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시기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한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세력이 강했던 통일노동자당의 의용군으로 자원해서 곧 아라곤 전선으로 떠난다. 어쩌다보니 서유럽에서 가장 혁명적인 성향의 집단에 속하게 된 거라는 걸 그는 나중에 알아차린다.
스페인 의용군의 분위기는 그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군사훈련이 제대로 안 돼 전반적으로 오합지졸인 데다가 무기도 형편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들의 인격은 그렇지 않았다. 장교, 사병 할 것 없이 정말로 그들은 모두가 평등한 자격으로 만났다. 오웰은 모든 면에서 물자가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어떤 특권도 아첨도 없는 공동체를 처음 경험했다고 말한다. 평등의 공기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곳에서 알게 되었다고. 그 자신 '사회주의의 서막'이라고 부른 그 분위기는 그를 매혹시켰고 그의 열정을 더욱 불타오르게 만든다.
오웰은 사명감을 갖고 전선에서 참호를 지키는데 그가 그토록 원했던 전투는 지지부진하게 전개된다. 그는 나중에야 원인을 알게 된다. 무기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지나치게 많은 무기와 화력을 가질 경우, 전쟁 이후에 그들이 세력을 얻을 것을 두려워한 정부의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도 있었던 아라곤 대공습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결국 파시스트 프랑코가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다.
더 최악인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산주의자이란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군사적 지원을 받는 스탈린주의자들을 말한다. 사실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는 재산의 사적 소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외하고는 사상적 결이 완전히 다르다. 어쩌면 정반대 성향의 사람들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무정부주의는 계급적 권위를 배격하고 국가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소련식 공산주의는 당의 명령에 복종하는 권위주의적인 체제로서 당 간부와 일반인 사이의 계급적 질서 또한 강고하기 때문이다.
오웰은 마드리드에서 파시스트를 막다가 죽어간 수천 명의 용감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아무런 유감도 없다면서 비판의 대상을 명확히 한다. 그가 비판하는 건 공산당 지도부라는 것이다. 공산당 지도부는 혁명보다는 전쟁에 승리하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이 일정 부분 설득력을 얻는다.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오직 권력의 쟁취 뿐이었음이 점차 드러난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다른 모든 진보 세력은 '트로츠키파'로 매도당하고 마녀사냥을 거쳐 죽임을 당한다.
오웰 자신은 치명적인 부상으로 야전병원을 거쳐 바르셀로나로 후송되는데 그 때문에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섬뜩한 정치를 목격하게 된다. 바르셀로나에는 이미 반동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전선에서는 통일노동자군 병사들이 적과 싸우고 있는데, 후방에서는 적이 아닌 정부가 통일노동자당 관련 인물들을 모두 잡아가고 있었다. 전선을 지킬 병력이 필요했기에 전선에는 아무 것도 알리지 않은 채. 오웰은 말한다. 후방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줄도 모르고 죽어간 병사도 많을 거라고.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이 트로츠키주의자로 매도당하는 것을 보면서 오웰은 분노한다. 그가 특별히 기억하는 인물이 스마일리다. 20대 초반의 강건한 그 젊은이는 글래스고 대학 교수 자리도 박차고 정의감에 스페인에 달려왔다. 전선의 추위와 악취 나는 진흙투성이 참호 속에서 끝까지 버텨냈으며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다. 그런데 그가 짐승처럼 버려져 죽어간 곳은 전선이 아니라 감옥이었다. 조지 오웰은 영국대사관의 도움으로 스페인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많은 친구들은 지하감옥 속에서 잊혀지고 사라졌다.
조지 오웰은 이런 전쟁은 승리할 수 없음을 예감한다. 그리고 스페인에 파시즘이 도래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기에 한 가지만 조용히 희망한다. 무자비한 통제와 효율성과는 거리가 먼 스페인 사람들의 기질상, 파시즘이 독일과 달리 견딜 만한 것이면 좋겠다고. 자기 집을 수색하러 온 경찰도 독일 게슈타포와 달리 허술한 구석이 있었으니, 스페인은 아마 조금 다르지 않겠냐고.
그렇다면 소련은, 그들의 사주를 받은 스페인 정부 내 공산주의자들은 왜 파시즘에 맞서 함께 연대한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을 제거와 숙청의 대상으로 삼았을까. 국제 관계의 여러 계산이 작용했겠지만(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영국과 프랑스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로서는 그들이 이미 기득권이라는 점도 한 몫 했을 듯하다. 공산주의자들은 스페인에서 진정으로 급진적인 개혁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다른 집단이 다른 방식으로 개혁을 이루어냈을 때 장차 그들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3.
조지 오웰은 이런 일련의 경험을 통해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었다. 특히 전쟁 당시 양편에서 이루어진 선전 선동은 사람들을 이념적 극단에 치우치게 하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진실이 사라지고 상대편에 대한 흑색 선전과 비방만 난무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는 이후 작품인 <동물농장>과 <1984>에도 많은 영감을 주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허무한 말잔치가 늘 전선이 아니라 후방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오웰에 따르면 총을 들고 싸우는 전선에서는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배척하는 일은 없다. 일종이 전우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같은 안전한 후방은 다르다. 마치 전쟁을 말로 한다는 듯이 기자들이 말로 된 온갖 오물을 배설한다. 오웰은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도망칠 인간들이 그런 짓을 한다고 비꼬며 말한다. 나중에 비행기가 전쟁에 동원되면 안전한 후방에도 폭탄이 떨어질 텐데, 그때 그들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다면서.
바르셀로나에서 공화파 내부 분열에 따른 상대편에 대한 끔찍한 보복과 살인을 지켜보면서 오웰은 말한다. 영국에서는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제거하거나 숙청하는 건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그 부분도 흥미로웠다. 당시 영국이 그러한 관용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요 부분은 따로 좀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전쟁에 대한 오웰의 종합 평가를 살펴보자. 그는 전쟁의 참사를 경험했지만 환멸과 냉소에 빠지지는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그 경험을 통해 인간의 품위에 대한 자신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다고. 그는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진 않지만 책의 전반적 내용을 통해 짐작이 간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는 스페인에서 인간의 가장 고귀한 모습을 목격했다. 특권과 아첨이 없고,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않으며, 오직 돈만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일도 없는 사회, 그가 사회주의의 서막이라고 부른 그것.
원제는 Homage to Catalonia. 카탈로니아에 바치는 경의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이 책을 읽고 나도 파시스트를 막고자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수많은 국적의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비록 그들의 도전은 약삭빠른 정치적 공세에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졌지만, 그들의 정신은 오웰의 회고 속에서 가만히 빛을 발한다. 그리고 나 또한 이름 모를 그들에게 경의를 보내게 된다. 그들은 그 추악한 전쟁 속에서 인간의 얼굴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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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얼굴에 풍기는 어떤 분위기가 나를 강하게 끌었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살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내던질 사람의 얼굴이었다. -- 무정부주의자에게서 기대해 볼 만한 얼굴. 물론 그는 공산주의자일 수도 있었다. (...)
이 이탈리아인 의용병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가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의 남루한 군복과 사나우면서도 애처로워 보이는 얼굴은 당시의 특별한 분위기를 상징하는 것 같다. 그는 그 전쟁과 관련된 내 모든 기억과 얽혀 있다. 바르셀로나의 적기, 초라해 보이는 병사들을 가득 태우고 전선으로 기어가던 가늘고 긴 기차, 전선 쪽으로 한참 올라가면 나오는 전쟁에 찌든 잿빛 소도시, 질퍽질퍽하면서도 얼음 속처럼 추운 산속 참호. (...)
1936년 12월 말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으로부터 불과 일곱 달 전이다. 그럼에도 이미 엄청난 거리 밖으로 멀어져버린 시기이다. (...) 나는 신문 기사를 쓸까 하는 생각으로 스페인에 갔다. 하지만 가자마자 의용군에 입대했다. 그 시기, 그 분위기에서는 그것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카탈로니아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혁명은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중이었다. p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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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것이 그들이 우리에 대해 하는 말이었다. 우리는 트로츠키주의자, 파시스트, 반역자, 살인자, 겁쟁이, 간첩 등등이었다. 솔직히 기분 나쁜 일이다. 특히 그런 일을 자행하는 자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내가 전선에서 알게 된 통일사회당 의용군 병사들이나, 이따금씩 만나는 국제여단의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결코 트로츠키주의자나 배신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런 일은 후방의 기자들이 담당했다. 우리에게 반대하는 팸플릿을 쓰고 신문에서 우리를 헐뜯는 사람들은 모두 안전한 집에, 혹은 기껏해야 발렌시아의 신문사 사무실에 있었다. 총알과 진창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이었다. 당 사이의 불화에서 비롯된 비방은 물론이고 모든 일반적인 전쟁 선전 활동, 즉 탁자를 치며 열변을 토하거나, 과장된 영웅담을 늘어놓거나, 적을 헐뜯는 일들 역시 보통 모두 싸우지 않는 사람들, 많은 경우 싸우느니 차라리 백 킬로미터 가량 먼저 달아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전쟁의 우울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좌익 언론도 우익 언론만큼이나 똑같이 거짓되고 부정직하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주었다는 점이다. 나는 진실로 우리편, 즉 인민전선 정부 편에서는 이 전쟁이 보통의 제국주의 전쟁들과 달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쟁 선전의 성격을 보면 과연 그러한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우익과 좌익의 신문들은 욕설의 오물 구덩이로 함께 뛰어들었다. p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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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은 한번도 싸워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그런 글을 쓰는 것이 전투를 대신하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전쟁이 똑같다. 병사들은 전투를 하고, 기자들은 소리를 지르고, 진정한 애국자라는 사람은 잠깐의 선전 여행을 제외하면 전선 참호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그래서 비행기가 전쟁의 조건을 바꾼다고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다음에 큰 전쟁이 터질 때는 사상 유례가 없는 광경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몸에 총알 구멍이 난 후방의 애국자의 모습 말이다.
기자들이 보여준 모습으로만 본다면, 이 전쟁은 다른 모든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말잔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기자들은 보통 가장 지독한 욕설은 적을 위해 아껴두기 마련인데, 이번 전쟁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공산주의자들과 통일노동자당이 서로에 대해 파시스트들보다 더 심하게 비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에 나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당간 불화는 짜증 나고 역겹기까지 했지만, 내 눈에는 사소한 집안 싸움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 때문에 뭔가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둘 사이에 정말로 양립할 수 없는 정책 차이가 있따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혁명의 진전에 강력히 저항하는 것일 뿐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그들이 혁명을 후퇴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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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월 초에 바르셀로나를 떠나 4월 말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휴가를 얻었다. 이 기간 내내, 또 사실 그 이후까지도, 무정부주의자들과 통일노동자당이 통제하는 아라곤 땅에서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혁명적 분위기는 내가 처음 알던 그대로였다. 장군과 사병, 농민과 의용군은 여전히 평등한 자격으로 만났다. 모두가 똑같은 보수를 받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서로를 '당신'이나 '동지'로 불렀다. 고용주 계급도 없었고, 하인 계급도 없었고, 거지도 없었고, 창녀도 없었고, 변호사도 없었고, 사제도 없었고, 아첨도 없었고, 모자에 손을 대는 인사도 없었다. 나는 평등의 공기를 숨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기가 스페인 전역에 퍼져 있다고 상상할 정도로 순진했다. 대체로 우연 때문에 나는 내가 스페인 노동 계급의 가장 혁명적인 일파 속에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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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제창되는 구호 가운데 '전쟁이 먼저고 혁명은 나중이다'라는 것이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통일사회당 의용군은 그 구호를 진심으로 믿었다. 정말로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 혁명을 계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구호는 눈속임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좀더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스페인 혁명을 미루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노동자들은 점점 권력을 빼앗겼다. 온갖 부류의 혁명가들이 점점 더 많이 투옥되었다. 모든 행동이 군사적 필요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졌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우월한 지위로부터 점차 물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났을 때, 자본주의의 재도입에 저항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될 터였다. 나는 일반 공산주의자들에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마드리드 주위에서 영웅적으로 죽어간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무슨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 정책의 방향을 잡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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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가 아라곤 전선에서 어떻게 무장을 했는지, 혹은 무장을 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무기들은 고의로 보급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무정부주의자들이 너무 많은 무기를 갖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나중에 혁명적 목적을 위해 이용될 것을 걱정한 것이다. 그 결과 아라곤에서의 대공세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프랑크는 빌바오에서, 또 어쩌면 마드리드에서도 물러났을지 모를 일이다.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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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깜깜할 때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젖은 채로, 소총과 탄약통까지 들고는 절대 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오십 명에서 백 명 가량 되는 무장군인들이 쫓아온다고 생각하니 언제라도 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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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의용군들은 노동조합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각각의 의용군은 비슷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가장 혁명적인 정서를 한곳으로 모으는 효과를 가져왔다. 나는 우연히 정치적 의식과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정상으로 취급되는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법 규모를 갖춘 것으로는 서유럽에서 유일했다. 이곳 아라곤에 모여든 사람들의 수는 만 명 정도였다. 전부는 아니지만 주로 노동 계급 출신이었다. 모두들 똑같은 수준에서 생활하였으며,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어울렸다. 이론적으로는 완전한 평등이었다. 실제적인 면에서도 완전한 평등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서 그곳을 지배하는 정신적 분위기가 사회주의적이었다는 뜻이다. 문명화된 생활의 여러 가지 일반적인 동기들, 예컨대 속물 근성이라든가, 돈을 악착같이 벌어 모으려는 태도, 상관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자본주의 사회에 일반적은 계급 분리는 돈에 물든 영국의 분위기에서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곳에는 농민과 우리만 있었다. 누구도 주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그것은 지구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게임 속에서의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한 국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줄 만큼은 지속되었다. 당시에는 그것을 아무리 욕했을지라도, 나중에는 뭔가 신기하고 귀중한 어떤 것과 접해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냉담과 냉소보다는 희망이 더 정상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공동체, '동지'라는 말이 대부분의 나라에서처럼 허위가 아니라 진정한 동지적 관계를 의미하는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우리는 평등의 공기 속에서 숨을 쉬었다.
지금은 사회주의가 평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유행임을 나도 잘 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상당한 수의 어용 문사와 말주변 좋은 교수들이 사회주의란 약탈적 동기를 그대로 놓아둔 계획적인 국가 자본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와는 아주 다른 사회주의에 대힌 비전도 존재한다. 보통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사회주의에 목숨을 거는 이유, 즉 사회주의의 '비결'은 평등 사상에 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란 계급 없는 사회일 뿐이다. 그것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용군에서 보낸 몇 달이 내게 귀중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스페인 의용군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일종의 계급 없는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아무도 자기 이익에 급급해하지 않는 공동체,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특권이나 아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사회주의의 서막을 막연하게나마 감지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그것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대신 깊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주의의 수립을 갈구하는 내 욕망은 전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 되었다. p139-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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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빈부간의 이 같은 노골적인 격차는 노동 계급이 지배하던 몇 달 전만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정치적 권력의 이동 때문이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바르셀로나가 안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이따금씩 벌어지는 공습 외에는 전쟁의 위협이 거의 없었다. 마드리드에 있던 사람들 누구나 바르셀로나의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마드리드에서는 공통의 위험 때문에 거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일종의 동지애를 느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쪽에서는 뚱뚱한 사람이 메추라기를 먹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빵을 구걸하는 모습은 역겨운 광경이다. 그러나 총소리가 들리는 곳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들다.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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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뭔가를 예감한 듯 입을 모아 말했다. '머지 않아 일이 터질 거야.' 그 위험은 아주 다순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혁명이 진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혁명이 더 진전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 사이의 반목이었다. 결국 무정부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반목이었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카탈로니아에는 이제 통일사회당과 그들의 자유주의적 동맹자들을 제외하고 어떠한 권력도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권력에 대항하는 전국노동자연맹이라는 불확실한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상대측에 비해 무장도 미비했고 목표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주요 산업에서 다수를 차지하면서 지배권을 확립했기 때문에 그 힘은 막강했다. 이러한 세력 판도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
곳곳에서 무장한 경찰대가 무정부주의자들의 요새를 공격했다. 프랑스와의 국경지대인 프이그세르다에서는 단총부대가 무정부주의자들이 통제하던 세관을 접수하려 갔다. 그 과정에서 유명한 무정부주의자인 안토니오 마르틴이 살해되었다. 피게레스에서도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났고, 타라고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노동 계급이 거주하는 교외 지역에서 대체로 비공식적이라 할 수 있는 분쟁이 잇달아 발생했다. 얼마 전부터 전국노동자연맹과 노동자총연합의 조합원들은 서로 살인을 일삼고 있었다. 그런 살인 때문에 대규모의 자극적인 장례식이 여러 번 거행되기도 했다. 고의적으로 정치적 증오심을 선동하려는 의도가 매우 분명해 보였다. (...) 이런 일이 몇 번만 더 발생하면 유혈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았다. p155-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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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노동자당에 대한 비난 문제를 내가 필요 이상으로 길게 논의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내란이라는 엄청난 불행에 비추어보면 이런 종류의 정당간 내분은, 설사 불의와 거짓 비난이 불가피하다 해도, 사소한 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이런 종류의 비방과 언론을 통한 공세, 그리고 그것이 보여주는 정신적 습관은 반파시스트 대의에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잠깐이라도 살펴본 사람은 날조된 비방으로 정적들을 제거하는 공산주의 전술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오늘날 핵심어는 '트로츠키-파시스트'지만 전에는 '사회주의-파시스트'였다. (...) 어디에서나 하급 공산주의자들은 지도자들의 말에 이끌려 '트로츠키주의자'에 대한 몰상식한 마녀 사냥을 벌인다. 통일노동자당과 같은 유형의 정당들은 단지 반공산주의 정당이라는 이유로 몹시 불리한 처지에 몰린다. 세계 노동 계급 운동에는 이미 위험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평생 사회주의에 헌신해 온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조금이라도 더 쌓이게 되면, 그 분열은 치유 불가능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유일한 희망은 정치적 논쟁을 철저한 논의가 가능할 정도로 유지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과 그들보다 더 좌익인(또는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정말로 차이가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가 계급 일부와 동맹(인민전선)을 맺음으로써 파시즘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반대자들은 이런 공작이 파시즘의 새로운 은신처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여기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우리는 몇 백 년 동안 반노예 상태로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로츠키-파시스트'라는 고함 외에 아무런 주장도 나오지 않는다면, 논의는 시작도 할 수 없다. (...) 진짜 쟁점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있다. 비방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p22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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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악몽 같은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늘 바뀌는 소문으로 인한 불안감, 검열당하는 신문과 사라지지 않는 무장 병력으로 인한 불안감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그 불안감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당시 분위기에 걸맞는 상황이 현재 영국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아직 정치적 불관용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물론 영국에도 사소한 정치적 박해는 존재한다. 만일 내가 광부라면 사장에게 공산주의자로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정당인', 즉 대륙 정치에 등장하는 폭력배나 하수인 같은 인간은 드물며,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숙청'하거나 '제거'한다는 생각은 아직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스탈린주의자'들이 권좌에 올랐다. 모든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위험에 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또 다른 시가전이 발발할까 봐 두려워했다. 시가전이 일어나면 전처럼 모든 책임이 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돌아갈 터였다. p25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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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확인한 것이지만, 전선의 병사들은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이 모든 일의 동기는 분명하다. 우에스카 공격이 시작되었고,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은 여전히 별도의 부대 단위였다. 따라서 소식이 알려졌을 때 그들이 전투를 거부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며칠 동안 후방의 신문들이 자신을 파시스트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전사한 사람도 꽤 많을 것이다. 이런 일은 용서하기가 힘들다. 나도 전투하는 부대에 나쁜 소식을 알리지 않는 것이 관례임은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을 전투에 내보내 놓고는 등 뒤에서 그들의 당을 불법화하고, 지도자들을 반역자라고 비난하며, 그들의 친구와 친척들을 투옥했다는 사실을 알리지도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다르다.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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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줄곧 되뇌었다. 왜 나를 잡아간단 말이야?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나는 통일노동자당원도 아닌데. 물론 나도 5월 시가전 때 무기를 소지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때 무기를 소지한 사람은 대략 4,5천 명은 될 터였다. (...)
아내는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범죄자 검거가 아니다. 단지 공포정치일 뿐이다. 당신이 어떤 특정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트로츠키주의'라는 죄를 지었다. 당신이 통일노동자당의용군에 복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옥에 갈 만한 죄가 된다. 법을 지키기만 하면 안전할 거라는 영국식 사고방식에 매달려봤자 소용없다. 법은 경찰이 마음먹는 대로 만들어졌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몸을 숨기고 통일노동자당과 관계되는 사실을 감추는 것이다.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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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브 스마일리의 나이는 불과 스물둘이었다. 게다가 그는 신체적으로 볼 때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강인한 편이었다. 영국 병사와 스페인 병사를 막론하고 참호에서 석 달 동안 병 한 번 안 걸린 사람은 아마 스마일리가 유일할 것이다. 그렇게 튼튼한 사람은 제대로 돌봐주기만 하면 맹장염으로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펭니 감옥(정치범들을 가두어두는 임시 감옥)을 본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병자가 제대로 간호를 받을 가능성이 얼마나 희박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감옥은 고성의 지하감옥 같은 곳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영국에서 그런 감옥과 비교할 만한 곳을 찾으려면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사람들이 조그만 방에 빽빽하게 들어차 누울 자리도 없었다. 지하실이나 어두컴컴한 장소에 갇히는 일도 흔했다. 이것은 일시적 조치가 아니었다. 네다섯 달 갇혀 있는 동안 빛을 못 보는 경우도 있었다. 식사는 더럽고 불충분했다. (...)
스마일리는 용감하고 재능 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글래스고 대학의 자리를 내팽개쳤다. 또한 내가 목격한 대로, 그는 흠 잡을 데 없는 용기와 흔쾌함으로 전선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저들이 그에게 해준 일이라고는 그를 감옥에 집어넣고 방치된 동물처럼 죽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막대한 인명이 희생되는 대전쟁의 와중에 한 개인의 죽음을 놓고 너무 법석을 떠는 것이 소용없는 일임은 나도 잘 안다. 혼잡한 거리에 비행기가 폭탄 하나만 떨구어도 정치적 박해를 여러 번 가하는 경우보다 더 큰 고통이 생긴다. 그러나 내가 이런 죽음에 화가 나는 것은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전투중에 죽는 것은(그래,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대하는 바이다. 그러나 투옥이 되고, 그것도 날조된 범죄 혐의도 없이 그저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악의로 인해 투옥이 되고, 혼자 내팽겨진 채 죽어간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이런 따위의 일(스마일리의 경우는 예외적인 것 같지도 않다)이 어떻게 전쟁의 승리를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p27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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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일을 기록하는 것은, 그것이 왠지 스페인적인 현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최악의 상황에서도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스페인 사람들의 아량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페인에 대해서 매우 나쁜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쁜 기억이 거의 없다. (...) 스페인 사람들이 관대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그들은 20세기에 속하지 않는 고귀한 종족이다. 이 점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파시즘이라 해도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견딜 만한 형태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스페인 사람들 중에 현대 전체주의 국가가 요구하는 지독스러운 효율성과 일관성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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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르셀로나에 온 뒤 처음으로 성당을 보러 갔다. 현대식 성당으로 세상에서 가장 흉측한 건물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총안이 달린 첨탑이 네 개 있었는데, 각각이 마치 라인 와인병처럼 생겼다. 그 성당은 바르셀로나의 대부분의 교회와는 달리 혁명 기간에 피해를 보지 않았다. 사람들 이야기로는 성당의 '예술적 가치' 때문에 화를 면했다 한다. 무정부주의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건물을 파괴하지 않은 사실은 그들이 지닌 심미안의 수준을 보여준다.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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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할에 무력함을 느꼈던 이 전쟁은 나에게 대체로 나쁜 기억만을 남겼다. 그러나 전쟁이 없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이런 참사(어떻게 끝이 나건 스페인 전쟁은 살육과 신체적 고통은 별도로 하고라도 기억할 만한 참사였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를 잠깐 보았다고 해서 꼭 환멸과 냉소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경험 전체를 통해 인간의 품위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졌다.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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