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아니, 도스토옙스키가 이렇게 수다쟁이였나. 말 그대로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인물들에 대한 끝없는 묘사와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의 향연... 작가의 수다는 주연, 조연 가리지 않고 끝이 없어서, 마치 그 시대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서 내가 그 동네 까페에서 이야기를 엿듣는 것 같았다. 대화는 또 왜 그렇게 긴 지... 장광설에 다소 지칠 만하면서도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건 정말 다음 장면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작가의 필력이 실감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한 권에 600페이지가 넘는 3권의 책을 끝마칠 무렵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아니고, 엉엉 울고 있다. 그렇게 드라마틱한 결말이 아님에도...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들이 그렇게 참신한 내용이 아님에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터져나온 느낌이었다. 온갖 인물과 철학적 논쟁을 경유하는 이 긴 이야기가 인간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특별한 여정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고교 때 읽었을 땐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야기다. 물욕과 육욕 밖에 모르는 타락한 인물 표도르 카라마조프에겐 세 아들이 있다. 선량함을 갖추고 있지만 물불 안 가리는 다혈질의 성격 때문에 사고뭉치가 된 드미트리, 현명하고 박학다식하지만 삶에 대해 근본적으로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둘째 이반, 그리고 순수함의 표상 막내 알료샤. 그리고 그들과 인연이 있는 다양한 여인들과 다양한 직업군의 인물들이 우리를 19세기 러시아로, 인간 본성의 깊은 심연 속으로 초대한다.
1.
소설에는 두 명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탐욕의 화신 표도르 카라마조프와 영적인 스승 조시마 장로다. 먼저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자신의 육체적 쾌락에만 관심 있는 인물이다. 죽은 두 명의 부인은 물론 자신의 아들들에게까지 무관심한 지극히 이기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본능과 욕망에 의해서만 살아가며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불행에 처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그 반대편에 있는 인물이 조시마 장로다. 19세기지만 러시아에서는 아직 종교적 권위가 힘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조시마 장로는 전통적인 권위에 의지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 자신의 삶을 통해 영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꾸준히 추구해왔고 그로부터 얻은 통찰 때문에 주위의 신망을 얻고 있다. 그는 신에 대한 깊고 뜨거운 사랑을 지니고 있고 깊은 연민을 갖고 사람들을 돕고자 하며 특히 알료샤의 정신적 스승으로 등장한다.
물질적/육체적 욕구와 정신적/영적 욕구는 인간 욕망의 근원적인 두 갈래 방향이다. 따라서 이 두 명의 아버지는 상반되는 인간 본성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카라마조프에겐 쾌락이 삶의 의미이고 존재의 이유의 전부다. 그러므로 그에겐 사랑하는 이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인내나 고통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하지만 조시마 장로는 다르다. 그의 삶을 결정 지은 사건은 어릴 때 겪은 형의 죽음이다. 조시마 장로는 형이 죽어가면서 몸소 보여준 삶에 대한 존경심을 평생 기억한다. 그는 욕망이 인간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심연에는 그리스도가 심어준 고귀하고 신성한 형상이 있기에 삶의 어떤 고통도 신에 대한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은 이 두 가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한다. 카라마조프의 아들들은 어떤 길을 택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2.
맏아들 드미트리는 아버지 카라마조프를 가장 빼닮았다. 감정에 잘 휩싸이는 인물로 무분별한 열정 때문에 사고를 치지만 아버지와 달리 도덕적인 명예심도 갖추고 있다(아버지 손에서 양육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직업이 군인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판단력과 자제력 부족으로 양심보다는 쾌락에 몸을 맏기며 결국 아버지의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소설에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인물이다.
둘째 이반은 지성을 대변한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가?“ 이반이 던진 이 질문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물음이다. 유명한 대심문관 이야기를 듣다보면 누구나 이반의 고뇌에 공감하게 된다. 그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신이 만든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범위를 한정해 특히 어린이들의 고통을 참을 수 없다고.
그가 예로 드는 당대의 풍경은 참혹했다. 하나만 소개하면, 한 농노의 아이가 있었다. 실수로 던진 돌이 주인 귀족의 사냥개의 다리에 맞게 되고 사냥개는 약간 절룩거린다. 사태를 알게 된 귀족은 아이를 발가벗겨 광에 가두고, 다음날 그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발가벗은 아이를 달리게 하고 자신의 사냥개를 풀어놓는다. 아이는 겁에 질려 도망가지만 결국 사냥개가 아이를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당시에도 형법이 있어 귀족은 곧 체포되지만 몇 달만에 풀려난다.
하지만 그의 예리한 지성은 그 자신을 고뇌에서 꺼내지 못했고, 다른 이들을 구해내지도 못한다. 소설에서 이반은 자신의 사상이 초래한 끔찍한 결과와 비극을 막지 못한 자신의 무책임함을 자책하면서 생사를 오가는 정신적 위기에 처하게 된다. 즉, 그의 질문과 고뇌는 숭고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그를 삶에 대한 냉소로 이끌었고, 그 냉소는 그를 행동하는 사람보다는 방관자의 위치에 머물게 했다. 그의 부친 카라마조프가 어떤 인물인지 알기에 그 냉소가 십분 이해되지만...
셋째 알료샤는 신앙과 영성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카라마조프였지만 그의 정신적 아버지는 조시마 장로였고 알료샤는 그를 온마음으로 흠모했다. 조시마 장로가 어떤 인물인가보다는 그 흠모와 사랑이 특별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알료샤의 마음은 그에 대한 맑고 깨끗한 사랑으로 가득했기에 그의 지성은 이반과는 다른 길로 꽃피기 시작한다.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로부터 진리에 대한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세속적인 모든 것, 아버지 카라마조프에 대해서도, 세상에 대해서도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다. 거울처럼 바라보면서 도움을 주려 하거나 그저 자기의 소임을 다할 뿐이다.
알료샤는 드미트리와 이반에 비해서는 다소 평면적인 캐릭터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알료샤의 존재가 어질어질할 만큼 탐욕과 위선과 고통으로 중첩된 당대의 삶을, 이 소설 자체를 정화시켜주는 존재였다. 알료샤가 등장하면 뭔가 공기가 달라지는 것처럼 장면의 분위기가 바뀌고, 읽는 내 마음도 평온해졌다.
소설에는 드미트리의 약혼녀 카타리나, 드미트리와 그의 부친이 동시에 반한 그루셴카, 집사 그레고리, 하인 스메르쟈코프, 호흘라코바 부인, 라키친 등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이야기 속에 차지하는 비중과 상관없이 모두 생동감이 넘친다. 그런 다양한 인물들이 교차하며 그려내는 욕망의 최정점에 카라마조프가 있었다. 카타리나와 그루셴카는 탐욕스러운 인물은 아니지만 각자 다른 어떤 정신적 욕망의 회로를 갖고 있었고 작가는 섬세하게 그 욕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여준다. 이 욕망의 파고 속에서 어려서부터 줄곧 생을 증오해온 스메르쟈코프는 그 증오를 실행에 옮긴다.
주요 등장인물과 함께 작가가 묘사한 19세기 러시아 민중들의 삶도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당시 러시아에 히스테리 비슷한 정신 질환에 시달리는 여인이 많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사람들은 정신줄을 놓은 부인들이 악마에 시달린다고 생각하고 수도원 암자에 데려가곤 하지만 작가는 정확하게 서술한다. 고된 출산과 연이은 가혹한 노동이 그 원인이라고. 카라마조프가 영위한 물질적 향락의 세계 한켠으로는 그렇게 마음이 병든 여인들이 도처에 있던 시대였다.
3.
소설 속에는 인물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네 개의 죽음이 차례로 등장한다. 조시마 장로의 죽음, 아버지 카라마조프의 죽음, 스메르쟈코프의 죽음, 그리고 어린 소년 일류샤의 죽음이다. 이 네 개의 죽음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작가가 던지는 거대한 철학적 화두이다.
조시마 장로의 죽음은 인간적이면서도 평화로운 죽음이다. 기적을 희구하는 사람들은 그의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하자 그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다. 하지만 그의 삶과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알료샤는 그가 죽어가는 과정으로부터 삶에 대한 변함 없는 믿음과 사랑을 배운다. 스승은 떠났지만 알료샤는 깊은 사랑과 존경을 가슴에 담고 수도원을 떠난다.
아버지 카라마조프의 죽음은 탐욕의 허망한 결과를 보여준다.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늙어서도 욕정에 지배되며 그루셴카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그를 찾아온 건 그루셴카가 아니라 그를 증오하는 살인자였다. 카라마조프의 죽음은 그 누구에게도 슬픔을 불러오지 않는다. 다만 드미트리와 이반의 삶을 송두리째 위협할 뿐이다.
스메르쟈코프의 죽음은 자기 파괴의 결과를 보여준다. 그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게 허용된다는 이반의 사상에 동화된다. 어쩌면 카라마조프를 죽이고 싶은 욕망에 대한 합리적 근거가 필요했을 수도 있겠다. 카라마조프와 유로지브이(미친 여인을 러시아 사람들은 순례자처럼 대우함) 사이의 사생아로 암시되는 스메르쟈코프는 깊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이반으로부터 동지로 인정 받고 싶은 욕망에 그의 사상을 실천에 옮기지만 이반은 자신의 생각이 불러온 결과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결국 스메르쟈코프는 자살하고 그의 죽음은 생에 대한 증오와 절망을 표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린 소년 일류사의 죽음이 있다. 그 죽음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으로 다가오는 죽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처참한 상황에 놓여 있던 스메기료프 대위와 그의 아들 일류샤의 이야기는 너무 애처로워서 가슴을 콕콕 찌른다. 형편없는 아버지에 대한 아이의 용감하고 무모하고 순수한 사랑이 주는 감동 때문이다. 일류샤와 콜랴를 비롯한 십대 아이들의 에피소드도 이 소설에서는 굉장히 생동감 넘치게 그려지고 있는데, 소설을 쓸 무렵 도스토옙스키에겐 매우 늦은 나이에 얻은 열 살 무렵의 아이들이 있었다 한다.
일류샤의 장례식에서 알료샤는 말한다. 우리가 일류샤를 영원히 기억하는 한, 우리는 구원된 거라고. 그의 용감함과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일류샤를 향한 우리의 안타까움, 슬픔, 사랑과 일류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모여 하나가 된 것을 절대로 잊지 말자고. 작가는 아마도 그 고귀하고 순수한 감정이 생의 본질이자 희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일류샤의 처지를 알고 괴롭히던 친구들이 알료샤의 개입 덕분에 일류샤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도 작가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알료샤가 아이들과 나눈 순수한 우정은 카라마조프 일가의 온갖 욕망과 다툼의 서사와 대조되면서 강렬한 힘을 발휘했다. (엉엉 울었음 흑흑) 1권부터 3권까지 끝까지 읽어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장편소설이 주는 묵직한 감동의 원천이다.
4.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왜 도스토옙스키를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든 작가‘라고 불리는지 이해가 갔다. 신과 인간, 도덕과 죄, 자유와 책임, 사랑과 구원… 이 무거운 철학적 주제에 대해 작가는 섣불리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인물들의 다양한 욕망의 경로를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인생의 본질에 대해 작가가 내어놓은 답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위대한 소설의 마지막 장면, 일류샤의 장례식을 통해서다.
알료샤가 그가 본 모든 세상의 그 질척거리는 풍경 속에서 건져올린 구원은 일류샤와 아이들과 나눈 추억이었다. 어린 시절의 고귀한 추억이야말로 인간을 이후 겪게 될 모든 타락으로부터 지켜주고 선한 본성을 지켜주는 방패라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과거 조시마 장로가 그에게 그랬듯이. 인간이 거칠고 무정한 사회로부터 상처 받기 전, 어린 시절 부모님 슬하에서 겪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자 어쩌면 전부라고. 인간은 그 힘으로 평생을 살아간다고.
작가가 알료샤와 아이들로부터 묘사해내고자 한 것은 드미트리의 정열, 이반의 지성과 구별되는 다른 힘이었다. 서로의 진심을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이었고 타인의 고통을 애처로워하는 마음이었다. 그러한 인간 본성의 선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비극과 고통으로 점철된 와중에서도 인류의 항해가 아직은 계속되는 것일 테다.
서양 고전 장편소설 중에 여태 읽은 최고 작품은 '레미제라블'이었는데, 이 책으로 바꿔야 하나 싶다. 일단 두 작품을 다 한 번씩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
여러분이 명심해야 할 것은, 앞으로의 인생을 위하여 뭔가 훌륭한 추억, 특히 어린 시절 부모님 슬하에 있을 때 갖게 된 추억보다 더 숭고하고 강렬하고 건강하고 유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많이들 하지만, 바로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아름답고 성스러운 추억이야말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겁니다. 인생에서 그런 추억을 많이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셈입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속에 단 하나의 훌륭한 추억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덕분에 언젠가는 구원을 향해 한발짝 더 다가가게 될 겁니다. 어쩌면 우리는 훗날 악한 사람이 될지도, 심지어 고약한 행동 앞에서 버텨 낼 힘을 잃을지도, 인간의 눈물을 조롱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 하지만, 물론 그럴 리도 없겠지만, 여하튼 우리가 아무리 사악해질지라도, 우리가 일류샤를 어떻게 땅에 묻었는지, 우리가 최근에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바로 지금 이 바윗돌 옆에서 다 함께 얼마나 사이좋게 얘기를 나누었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 중 가장 잔인하고 가장 냉소적인 사람조차도, 설령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지금 이순간 선량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점만은 마음속으로 감히 비웃지 못할 겁니다! 그뿐입니까, 어쩌면 바로 이 추억 하나만 있어도 그는 스스로를 거대한 악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 것이며, 생각을 고쳐먹고 '그래, 그 시절엔 나도 선량하고 용감하고 성실한 인간이었지.'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p581-582 (3권)
##
" 하지만, 왜 우리가 고약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첫째, 그 무엇보다도 선량하게 살고, 둘째 성실하게 살아갑시다. 그 다음으론 절대로 서로서로를 잊지 맙시다." p583 (3권)
##
"정말로, 진짜로 종교에서 말하듯, 우리 모두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생명을 얻고, 서로서로를, 모든 사람을, 일류셰치카를 다시 보게 될까요?"
"꼭 되살아나서 꼭 다시 보게 될 것이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즐겁고 기쁘게 서로서로 얘기하게 될 겁니다." 반쯤은 웃고 반쯤은 환희에 젖어 알료샤가 대답했다. p585 (3권)
##
"어떤 욕구가 있다면 그것을 실컷 충족시켜랴, 왜냐면 누구나 아주 명망 있고 아주 부유한 사람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으니까.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두려움을 갖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증대시켜라."라고 말하고 있으니, 자 바로 이것이 지금 세상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자유를 보는 것이지요. 이러한 욕구 증대의 권리에서 도대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부유한 자들에게는 고립과 정신적인 자살, 가난한 자들에게는 질투와 살인이 있을 뿐이니 -- 이는 권리를 주었으되 욕구를 만족시킬 수단은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은 날이 가면 갈수록 거리를 축소시키고 공중으로 사상들을 전달함으로써 더욱더 합일에 다다르고 형제와 같은 관계를 갖게 될 것이라고들 단언합니다. 오호, 사람들의 이런 합일을 믿지 마십시오. 자유를 욕구의 증대와 시급한 해소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왜곡하는 것이니, 왜냐면 그들의 내부에서는 무수한 어리석은 욕망들, 습관들, 터무니없는 발상들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p81 (2권, 조시마 장로)
##
이 지상에서 우리는 참으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니, 만약 그리스도의 귀중한 형상이 우리 앞에 없었더라면, 우리는 대홍수 직전의 인류처럼 파멸하여 완전히 길을 잃었을 것이다. (...) 만약 그대의 내부에서 이 감각이 약해지거나 없어진다면, 그대의 내부에서 자라난 것도 죽을 것이다. 그때는 삶에 무관심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p97 (2권, 조시마 장로)
##
고 조시마 장로가 설교 중에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의인의 몰락과 그의 치욕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p115 (2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