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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철학, 심리

사물의 소멸 & 리추얼의 종말 / 한병철

by 릴라~ 2023. 10. 18.

에리히 프롬이 우리 시대를 봤다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소유' 대신에 '존재'를 설파했던 철학자가 지금을 봤다면 '소유' 대신 '이상한 존재'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았으리라. 사물 대신에 정보가 우리를 지배하는 시대. 사물은 삶을 안정시키지만 정보는 우리를 정처없이 배회하게 한다. 정보는 사물과 타자에 깃든 시간,  촉감, 불가해성이 없다. 정보가 넘쳐나고 모든 게 명료하지만  세계는 점점 멀어지는 역설의 시대가 펼쳐진다. 사람들은 세계를 바라보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말을 건다.  

 

리추얼은 또 어떤가. 공동체의 의례 혹은 시간적인 형식으로 번역할 수 있는 리추얼은  흘러가는 시간에 마디를 맺어줌으로써 시간을 우리가 거주할 수 있는 집으로 만들어준다. 리추얼이 사라진 시대에는 개인의 자기 표현과 가식 없는 진정성이 중요한 가치로 등장하지만, 실제로 우리 앞에 도래한 건 진정성의 사회가 아니라 공적 태도의 상실과 야만성이다. 

 

읽을수록 이분의 분석에 감탄했다. 21세기 우리 삶이 놓인 사회경제적 토대를 철학적 개념을 통해서는 이보다 훌륭하게 분석할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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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은 인간의 삶에 연속성을 제공하는 한에서 삶을 안정화한다. (...) 사물들은 삶의 안식처들이다. 정보 곁에 하염없이 머물기는 불가능하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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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와 기억의 핵심 특징은 긴 시간에 걸친 서사적 연속성이다. 이야기가 비로소 뜻과 맥락을 만들어낸다. 디지털 질서, 곧 숫자의 질서는 이야기와 기억이 없다. 그리하여 디지털 질서는 삶을 파편화한다. p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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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이 조정하는 세계 안에서 인간은 행위 능력, 자율성을 점점 잃는다.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세계를 마주한다. 그는 알고리즘의 결정들을 따르지만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알고리즘은 블랙박스가 된다. 세계는 인공 신경망들의 심층에서 사라지고, 인간은 그것들에 접근하지 못한다. 

 

정보는 독자적으로 세계를 환히 밝히지 못한다. 도리어 정보는 세계를 어둡게 만들 수 있다. 어느 시점부터 정보는 '형상을 제공하지' 않고 '형상을 일그러뜨린다'. 우리는 그 임계점을 오래전에 넘었다.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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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한 정보에 이어 다른 정보가 밀려드는 곳에서 우리는 진실을 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우리의 탈사실적 자극 문화에서 소통을 지배하는 것은 흥분과 감정이다. 시간을 기준으로 보면, 합리성과 달리 흥분과 감정은 매우 불안정하다. 따라서 이것들은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신뢰하기, 맹세하기, 책임지기도 시간집약적 실행이다. 이 행위들은 현재를 넘어 미래로 뻗어나간다. 인간의 삶을 안정화하는 모든 것은 시간집약적이다. 충실, 결속, 의무도 마찬가지로 시간집약적 관행이다. 안정화하는 시간 건축물들의 붕괴는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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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체험하고 누리고 놀이하려 하는 포노 사피엔스는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자유와 작별한다. 그 자유는 행위와 결합되어 있다. 행위하는 자는 기존의 것과 결별하고 새로운 것, 전혀 다른 것을 세계 안에 들여앉힌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저항을 극복해야 한다. 반면에 놀이는 실재에 개입하지 않는다. 행위하기는 역사를 위한 동사이다. 놀이하는, 손 없는 미래 인간은 역사의 종말의 화신이다.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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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은 얼굴도 없고 역사도 없다. 사람들은 손을 제쳐놓고 전자책을 읽는다. 책장 넘기기에는 촉감이 깃들어 있다. 촉감은 모든 관계의 본질적 요소다. 신체적 접촉이 없으면 결속이 발생하지 않는다.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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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원천은 공동체다. 문화는 공동체를 창출하는 상징적 가치들을 매개한다. 문화가 더 많이 상품으로 될수록, 문화는 자신의 원천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문화의 전면적 상업화와 상품화에 따른 귀결은 공동체의 파괴다.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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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봄도 공동체를 굳건히 다진다. 디지털화는 바라봄으로서의 타인을 소멸시킨다. 바라봄의 부재는 디지털 시대에 공감의 상실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다. 심지어 어린아이도 바라봄을 허용받지 못한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어머니의 바라봄에서 어린아이는 멈춤을, 자기입증과 공동체를 발견한다. 바라봄이 근원적 신뢰를 건설한다. 바라봄의 결핍은 자기 및 타인과 맺는 관계의 장애를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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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생각하기의 시작이다. 인공지능은 무감하다. 열정이 없고, 격정이 없다. 인공지능은 계산한다.

 

인공지능은 지평에 다가가지 못한다. 지평은 윤곽이 뚜렷하다기보다 어렴풋이 짐작된다. 이 "짐작"은 "앎의 계단에서 초보 단계가" 아니다. 오히려 이 짐작에서 "모든 알 수 있는 것을 숨기는, 즉 은폐하는 홀이 열린다." 하이데거는 짐작을 충심에 위치시킨다. 인공지능은 충심이 없다.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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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는 바라봄과 목소리가 몹시 부족하다. 세계는 우리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을 걸지도 않는다. 세계는 다름을 상실한다. 우리의 세계 경험을 규정하는 디지털 화면은 우리를 실재로부터 격리한다. 세계는 탈실재화되고 탈사물화되고 탈신체화된다. 강해지는 자아는 이제 더는 타자에 의해 건드려지지 않는다. 자아는 사물의 등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본다. 

 

타자가 사라지는 것은 실은 극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워낙 은밀하게 일어나서, 우리는 이 사건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다. 비밀로서의 타자, 바라봄으로서의 타자, 목소리로서의 타자가 사라진다. 다름을 빼앗긴 타자는 처분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객체로 전락한다.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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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물을 읽을 수 없다. 사물로서의 시는 스릴러물이나 술술 넘어가는 소설을 읽을 때처럼 의미와 감정을 소비하는 읽기에 저항한다. 이런 읽기는 까발리기를 추구한다. 이런 읽기는 포르노적이다. 반면에 시는 "소설 같은 충족"을, 소비를 일절 거부한다. 포르노적인 읽기는, 신체로서의 텍스트, 사물로서의 텍스트의 곁에 하염없이 머무르는 에로틱한 읽기의 반대다. 시는 우리의 포르노적 소비주의 시대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오늘날 우리는 시를 거의 읽지 않는다.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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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은 고요를 만들기가 화가의 과제라고 본다. 그가 보기에 생트빅투아르산은 우뚝 솟은 고요 덩어리 같다. 그는 그 침묵 덩어리에 복종해야 한다고 느낀다. 수직적인 것, 우뚝 솟은 것은 고요를 명령한다. 세잔은 완전히 물러나서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됨으로써 고요를 만든다. 그는 귀 기울이는 자가 된다. (...) 귀 기울이기는 더없이 종교적인 태도다.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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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은 오늘날 디지털 강제노동수용소이거나 아니면 디지털 고해소이거나 둘 중 하나예요. 모든 지배 장치, 지배 기술은 고유한 성물들을 만들어내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데 동원하죠. 그런 성물들은 지배를 안정화합니다. 스마트폰은 디지털 지배 체제의 성물이예요. (...)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이죠. 우리는 계속 고해해요. 자발적으로 발가벗지요. 그러면서 애원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주목이고요.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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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억압적 체제만 저항을 유발합니다. 반면에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착취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저항에 직면하지 않아요. 이 체제는 억압하지 않고 유혹해요. 지배가 자유로 자처하는 순간, 지배는 완성됩니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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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보 고요가 필요합니다. 정보 고요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뇌가 완전히 타버릴 거예요. 오늘날 우리는 정보를 중심으로 세계를 지각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여기 있음 경험'이 사라지죠. 우리는 세계로부터 점점 분리됩니다. 우리가 세계를 상실하는 거예요. 세계는 정보 그 이상입니다. 화면은 세계 결핍이 심각해요.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의 주위를 맴돌 뿐이죠. 스마트폰은 이 세계 결핍에 결정적으로 기여합니다. 세계 상실의 주요 증상은 우울이에요. 우울할 때 우리는 세계와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를 상실하죠. 우리는 혼란스러운 자아 속으로 침몰해요. (...) 이런 상황이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우리는 다시 타자들에게로 되돌려보내져야 해요. p16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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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현한다고 믿으면서 자발적으로 또 열정적으로 우리 자신을 착취하죠. 요컨대 우리는 규율사회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성과사회에서 살아요. 이것을 푸코는 보지 못했어요. 자기가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신자유주의적 성과 주체는 실은 노예입니다. 주인 없이 자발적으로 자기를 착취한다는 점에서 그 주체는 절대적인 노예죠. (...) 이 꾸준한 자기 채찍질은 피로와 우울감을 일으켜요. 노동 그 자체는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심각한 피로를 유발하지 않습니다. 노동하고 나면 기력이 소진될 수야 있겠지만, 이 소진은 파괴적인 피로와 다릅니다. 노동은 언젠가 끝나요. 반면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과하는 성과 강제는 노동시간보다 더 오래 지속되죠. 그 성과 강제는 잠들었을 때도 우리를 괴롭히고 드물지 않게 불면증을 일으킵니다. 노동에서 회복되는 것은 가능해요. 그러나 성과 강제에서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 내적 압력, 이 성과 압력과 최적화 압력이 우리를 피로하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병적 징후는 억압이 아니라 우울이에요.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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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추얼이란 상징적인 집안에 들이기 기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리추얼은 '세계-안에-있음'을 '집 안에-있음'으로 변환한다. 리추얼은 세계를 안심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든다. 시간 안에서의 리추얼은 공간 안에서의 거처에 해당한다. 리추얼은 시간을 거주 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 리추얼은 시간을 집처럼 다닐 수 있게 만든다. 리추얼은 시간에 질서를 부여한다. 시간을 정돈한다. (...)

 

오늘날 시간은 확고한 짜임새가 없다. 집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흐름이다. 시간은 점 같은 현재의 한낱 연쇄로 와해된다. 시간은 황급히 가버린다. 아무것도 시간에게 멈춤을 주지 않는다. 황급히 가버리는 시간은 거주 가능하지 않다.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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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사물을 소비할 뿐 아니라 사물에 실린 감정도 소비한다. 사물은 무한히 소비할 수 없지만, 감정은 무한히 소비할 수 있다. 그리하여 감정은 새롭고 무한한 소비의 장을 연다. 상품의 감정화, 그리고 감정화와 연결된 미화는 생산 강제의 지배를 받는다. 감정화와 미화는 소비와 생산을 촉진해야 한다. 그렇게 미적인 것이 경제적인 것에 의해 식민지화된다.

 

감정은 사물보다 더 덧없다. 따라서 감정은 삶을 안정화하지 못한다. 게다가 감정을 소비할 때 사람들은 사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관련 맺는다. 감정적 진정성이 추구된다. 그렇게 감정의 소비는 나르시시즘적 자기관련을 강화한다. 그리하여 사물들이 매개했어야 할 세계관련은 점점 더 상실된다. 

 

오늘날에는 가치도 개별 소비의 대상으로 구실한다. 가치 자체가 상품이 된다. 공정함, 인간적임, 지속가능성 등의 가치가 경제적으로 도살되고 해체된다.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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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주의력은 다름 아니라 리추얼적, 종교적 실천을 통해 문화 기술로서 육성된다. '종교'를 뜻하는 독일어 'Religion'이 '주의를 기울이다'를 뜻하는 라틴어 '렐레게레relegere'에서 유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모든 종교적 실천은 주의력 훈련이다. 사원은 깊은 주의력이 발휘되는 장소다. 오늘날 영혼은 기도하지 않는다. 영혼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생산한다. 

 

오늘날 외루기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반복은 창의성, 혁신 등을 억누른다는 이유로 저지된다. (...) 반복은 주의력을 안정화하고 심화한다. p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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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매력, 흥분, 체험을 사냥하듯 추구하면서 반복의 능력을 상실해간다. 진정성, 혁신, 창의성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구호들에는 새로움에 대한 항구적인 강제가 깃들어있다. 그러나 결국 그 구호들은 같은 것의 변형들만 산출한다. p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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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추얼은 체화과정이며 몸-연출이다. 공동체에서 통하는 질서와 가치가 몸으로 경험되고 공고화된다. 그 질서와 가치가 몸에 기입된다. 바꿔 말해, 몸으로 내면화된다. 그렇게 리추얼은 체화된 앎과 기억, 체화된 정체성, 신체적 결합을 만들어낸다. 리추얼 공동체는 몸 공동체다. 공동체 자체에 신체적 차원이 깃들어 있다. 디지털화가 탈신체적 작용의 원천인 한에서, 디지털화는 공동체의 연대를 약화한다. 디지털 소통은 탈신체화된 소통이다.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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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리추얼 행위는 느낌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 느낌의 주체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예컨대 장례에서 슬픔은 객관적 느낌, 공동 느낌이다. 그 슬픔은 개인적이지 않다. 공동 느낌은 개인의 심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장례에서 슬픔의 진짜 주체는 공동체다. 상실의 경험 앞에서 공동체가 스스로 자신에게 슬픔을 부과한다. 이 공동 느낌이 공동체를 굳건하게 만든다. 갈수록 심해지는 사회의 원자화는 사회의 느낌 경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공동체 느낌의 형성은 점점 더 드물어진다. 대신에 덧없는 흥분과 감정이 독자적으로 고립된 개인의 상태로서 주도권을 쥔다. 감정이나 흥분과 달리 느낌은 공유 가능하다. 디지털 소통은 주로 흥분에 의해 조종된다.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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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 사회는 실행 사회다. 누구나 실행한다. 누구나 자기를 생산한다. 누구나 자아 숭배에, 자아 예배에 충성한다. 자아 예배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성직자다. "자기 자신에 충실하다 함은 다름 아니라 고유한 독창성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유한 독창성은 오직 나 자신만 명확히 드러내고 찾아낼 수 있다. 고유한 독창성을 명확히 드러냄으로써 나는 또한 나 자신을 정의한다. 이로써 나는 전적으로 고유하게 나 자신에게 귀속하는 가능성을 실현한다. 이것이 근대적인 진정성 이상과 '자기충족' 혹은 '자기실현'이라는 목표의 배경에 놓인 견해다.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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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 숭배는 사회적인 것의 몰락을 보여주는, 간과할 수 없는 징후다. (...) 진정성 강제는 나르시시즘적 자기성찰을, 자신의 심리에 대한 항구적인 몰두를 유발한다. 또한 소통도 심리적으로 조직된다. 진정성의 사회는 친밀함과 노출의 사회다. 영혼-나체주의가 그 사회에 포르노적 특징을 부여한다. 사회관계에서 프라이버시와 친밀한 영역이 더 많이 드러날수록, 그 사회관계는 더 참되고 진정하다.  p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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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 숭배는 공적 공간이 침식되게 한다. 공적 공간이 파열하여 사적 공간들이 된다. 모든 각자가 어디에서나 자신의 사적 공간을 가지고 다닌다. 공적 공간에서 역할을 수행하려면 사적인 차원을 도외시해야 한다. 공적 공간은 연극적 표현의 장소, 곧 극장이다. 연기와 연극은 본질적으로 공적 공간을 위한 것이다. (...) 오늘날 세계는 역할들이 연기되고 리추얼적 몸짓이 오가는 극장이 아니라 시장이다. 그 시장에서 사람들은 자기를 발가벗기고 전시한다. 연극적 표현은 사적인 것의 포르노적 노출에 밀려난다. 

 

사교성과 공손함도 연극과 관련이 깊다. 사교성과 공손함은 아름다운 외관을 지닌 연기다. 바꿔 말해 사교성과 공손함은 연극적 거리를 전제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진정성 혹은 진짜를 내세우면서 아름다운 외관을, 리추얼한 몸짓을 외적인 것이라며 떨쳐버린다. 그러나 그 진짜는 날것이요 야만일 따름이다. 나르시시즘적 진정성 숭배는 사회가 갈수록 더 야만화되도록 만드는 원인들 중 하나다. 오늘날 우리는 흥분의 문화 속에서 산다. 리추얼적 몸짓과 사교 형식이 부서지면, 흥분과 감정이 주도권을 쥔다. 공공성에 필수적인 연극적 거리는 소셜미디어에서도 허물어진다. 그 결과는 거리 없는 흥분의 소통이다.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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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적화와 성과를 이뤄내라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은 끝맺음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명령은 모든 것을 잠정적이고 미완성이게 만든다. 아무것도 궁극적이거나 최종적이지 않다. 소프트웨어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이 최적화 강제 아래 놓인다. 교육마저도 그러하다. 평생학습은 졸업을 허용하지 않는다. 평생학습은 평생 생산에 다름 아니다.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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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장소적 존재'다. 장소가 비로소 거주를, 머무름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장소적 존재가 꼭 장소근본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장소적 존재는 손님에 대한 우호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파괴적인 것은 전 지구화를 통한 세계의 완전한 탈장소화다. 그 탈장소화는 모든 차이를 평준화하고 같음의 변형들만 허용한다.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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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추얼의 폐지는 무엇보다도 '고유시간'을 없앤다. 고유시간이란 생애의 특정 시기를 말한다. (...) 리추얼은 삶에서 본질적인 이행에 형식을 부여한다. 리추얼들은 맺음형식들이다. 리추얼들이 없으면 우리는 쭉 미끄러져 간다. 예컨대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도 늙지 않는다. 혹은 영영 성숙하지 않는 유아적 소비자로 머무른다. (...)

 

이행 의례, 곧 통과의례는 삶을 계절들처럼 구조화한다. 문턱을 넘는 사람은 삶의 한 단계를 끝맺고 새 단계에 진입한다. 문턱들은 이행 지점들로서 공간과 시간을 율동적으로 만들고 또렷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공간과 시간을 이야기로 만든다. 문턱들은 심층적인 질서 경험을 가능케 한다. 문턱들은 시간집약적 이행 지점들이다. 문턱들은 오늘날 더 빠르고 중단 없는 소통과 생산을 위해 철거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공간과 시간의 측면에서 더 빈곤해진다. 우리는 더 많은 공간과 시간을 생산하려 노력하면서 공간과 시간을 상실한다. 공간과 시간은 언어를 잃고 침묵한다. p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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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본은 죽음을 막는 보증처럼 기능한다. 자본은 축적된 시간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돈으로 타인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무한한 자본은 무한한 시간의 환상을 낳는다. 자본은 절대적 상실인 죽음에 반발한다. 자본은 한정된 삶의 시간을 말소해야 한다. 바타유는 축적 강박의 배후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짐작한다. (...)

 

삶에서 죽음을 추방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을 위해 필수적이며 본질적이다. p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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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본주의가 종료라는 주장에 반대합니다. 쇼핑몰은 사원과 전혀 달라요. 쇼핑몰에서는, 나아가 자본주의 전반에서는, 특수한 주의집중 하나가 지배합니다. 모든 것이 에고를 중심으로 돌아가요. 말브랑슈에 따르면, 그 주의집중은 영혼의 자연적인 기도입니다. 반면에 사원에서 나는 전혀 다른 형태의 주의집중을 경험해요 무슨 말이냐면, 나는 내 에고 안에 집어넣을 수 없는 것들에 주의를 집중하게 돼요. 리추얼은 나를 에고로부터 떼어냅니다. 반면에 소비는 나의 에고에의 고착을 강화하죠. p14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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