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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철학, 심리

폭력의 위상학 / 한병철 __ 21세기는 왜 폭력적인가

by 릴라~ 2024. 2. 18.

100페이지 남짓한 저자의 다른 책에 비하면 꽤 두꺼운 책이다. 그래도 200페이지를 넘지 않으니 일반적인 철학서에 비해서는 얇지만. 이 책이 조금 더 두꺼워진 이유는 역사적으로 행해진 폭력의 양상을 시대별로 개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물리적 폭력에 대해 비판적이다. 죄인을 광장에서 참수하고 전시했던 절대권력 시대도 아니고 감옥, 병동, 수용소 등으로 개인에게 규율을 강제했던 산업사회 초반도 아니다. 후기산업사회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수반하는 외적 강제나 규율이 거의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폭력이 줄어든 평화로운 시대인가? 저자의 대답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어느 시대보다도 폭력이 증가한 시대다. 물리적 폭력보다 더 강하고 전방위적이며 음험한 폭력이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다. 우리를 억압하는 부정성의 폭력이 아니라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신을 착취하고 성과를 위해 달려가게 만드는 긍정성의 폭력이다.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삶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미시적인 폭력이다. 

 

이 폭력을 생산하는 근간에는 자본주의 경제가 놓여 있다. 세계의 전면적인 시장화는 모든 것이 가격으로 표시될 수 있고, 모든 것이 수익을 낳아야 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저자는 이런 사회를 외설적인 사회, 포르노적 사회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가격으로 투명하게 설명될 수 있는 사회, 존재하는 것들이 그저 존재함으로써 갖는 고유한 가치가 실종된 사회다. 이상적 가치가 사라진 사회에서 남은 것은 전시 가치와 건강 가치다. 자아는 홍보해야 하는 상품적 대상이고, 자기 몸조차 최적화된 상태에 맞추어야 하므로 성형과 피트니스가 범람한다. 자신이 전시되는 사회에서 타자는 우정의 대상이 아니라 구경꾼이거나 소비자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과잉, 성과에 대한 압력은 현대인들의 자기 착취를 더욱 부추기고 그 결과는 소진과 우울증이다. 성과주체의 양산은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자기를 변신시키며 새로운 상품을 소비하게 하므로 자본주의 경제는 이 방향으로 사람들을 몰고 간다. 자기를 계속 뛰어넘어야 한다는 압박이 사회 전방위적으로 주어진다. 하지만 이는 외적 강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추구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자신들이 결코 달성될 수 없는 목표를 갖고 소진될 때까지 달려간다는 것을 모른 채. 그 결과 공허해진 삶을 디지털로 이루어진 과잉 커뮤니케이션으로 채우면서. 

 

저자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무자비한 폭력이라고 책 전반에 걸쳐 설파한다. 자신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치닫는 오늘날의 성과사회는 기후 재앙, 환경 위기 등 세계 자체를 파괴하는 과정과 궤적이 일치한다고. 21세기가 지닌 폭력성의 본질을 이만큼 깊이 있게 꿰뚫어본 철학자는 없는 것 같다. 노동, 이윤, 자본, 성과, 효율성이 아닌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이 시대는 결국 어떤 종착점에 이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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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산출한다는 환상을 먹고 자란다.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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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가치가 사라진 자리에는 주목받기를 갈망하는 자아의 전시 가치와 건강 가치밖에 남아 있지 않다. 벌거벗은 삶은 무엇 때문에 건강해야 하는지를 답해줄 모든 목적론, 모든 '위하여'를 파괴해버린다. 건강은 자족적인 가치가 되며 모든 내용을 상실한 채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공허에 빠진다.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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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환자는 무정형적 존재, 성격 없는 인간이다. 히스테리 환자의 영혼은 타자의 강제에 예속되어 있을망정, 그 덕에 정돈된 형태를 획득한다. 우울증 환자의 심리 장치는 억압의 부정성에서 자유롭기는 하지만, 불명료하고 무질서하며 무정형적이다.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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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등, 오늘날 유행하는 정신 질환에는 억압이나 부정의 과정이 개입하지 않는다. 이들은 오히려 긍정성 과잉의 징후를 드러낸다. 문제는 부정보다는 아니라고 하지 못하는 무능력, 금지보다는 만능이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은 이들 질병에 접근하지 못한다. 우울증은 초자아와 같은 지배 기관에서 비롯하는 억압의 결과가 아니다. 우울증 환자의 경우 억압된 심리적 내용에 대한 간접적 단서를 제공할 '전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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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우울을 나르시시즘적 동일화를 통해 자아의 일부로 내면화된 타자와의 파괴적 관계로 파악한다. 타자가 내면화됨에 따라 본래 타자와의 갈등도 내면화되어 갈등에 찬 자기관계로 변형되고, 이는 결국 자아의 빈곤과 자기공격으로 이어진다. 반면 오늘날 성과주체가 앓는 우울증에는 어떤 상실된 타자와의 갈등적 관계가 선행하지 않는다. 우울증에는 타자의 차원이 연루되어 있지 않다. 빈번히 소진증후군의 결과로 나타나는 우울증의 또 다른 언인으로는 오히려 과다하게 긴장되고 과다하게 고조된, 상궤를 넘어서 파괴적 양상을 나타내는 자기관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그는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는 자기 밖으로 걸어 나오지 못하고, 바깥에 있지 못한다. 그는 자기를 떠나 타자를 향해, 세계를 향해 나아갈 줄 모른 채, 온통 자기 자신에게만 열중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자아의 공동화를 초래할 뿐이다.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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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울증에 선행하여 나타나는 소진증후군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힘이 빠진 독립적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자발적인 자기 착취의 병리적 결과다. 나를 확장하고, 변모시키고, 재창조하라는 명령은(이 명령의 이면이 우울증이거니와) 정체성과 연결된 제품의 공급을 전제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체성을 자주 바꿀수록 생산은 더욱 활발해진다. 규율적인 산업사회가 변하지 않는 정체성을 기반으로 했다면, 성과 중심의 후기산업사회는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유연한 인간을 필요로 한다. p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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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개인 간의 경쟁 자체가 아니라 그 경쟁이 가지는 자기관계적 성격이다. 이로 인해 경쟁은 절대적 경쟁으로 첨예화된다. 즉,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에 빠진다.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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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주체가 초자아에게 자신을 예속시키는 데 반해 성과주체는 이상자아를 향해 자신을 기획한다. 예속과 기획은 삶의 두 가지 상이한 양태다. 초자아에게서는 부정적 강제가 온다. 반면 이상자아는 자아에게 긍정적 강제력을 행사한다. 초자아의 부정성은 자아의 자유를 제한한다. 반면 이상자아를 향한 자기 기획은 자유의 행위로 해석된다. 그러나 도달 불가능한 이상자아 앞에서 자아는 자기 자신을 결함이 많은 존재로, 낙오자로 인식하며 스스로에게 자책을 퍼붓는다. 현실의 자아와 이상자아 사이의 간극에서 자기공격성이 발생한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투쟁의 대상으로 삼고,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인다. 스스로 모든 타자의 강제에서 해방된 것으로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괴적인 자기강제 속에 엮여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p6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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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주체는 유연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경직된 정체성은 오늘날 생산관계의 가속화 경향에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 지속성, 항상성, 연속성은 성장을 가로막는다. 성과주체는 늘 떠다니는 중이기 때문에 자아의 최종적인 '정위'도 명료한 윤곽의 확정도 불가능하다. 복종주체, 규율주체가 견고한 성격을 갖추어야 한다면, 이상적인 성과주체는 모든 일에 동원 가능한, 성격이 없는, 성격에서 자유로운 인간일 것이다. 성과주체는 부유 상태 속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자유의 감정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상태가 계속되면 심리적 소진에 이르게 된다.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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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적이고 객관성 있는 정체성과 방향성의 표본이 파괴되면, 심리적 불안정성과 성격 장애가 나타난다. 자아의 미완결성과 완결 불가능성은 자유롭게 할 뿐만 아니라 병도 안겨준다. 우울증에 걸린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성격이 없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점점 더 부정성의 짐에서 벗어난다. 성과주체는 적과도, 주권자와도 맞서지 않는다. 더 많은 성과를 올리도록 강요하는 타자의 심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과주체는 오히려 스스로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고 자기 자신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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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폴리스)는 단순히 권력과 지배의 구조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이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치가 지배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폴리스의 목표는 '자립(아우타르케이아)'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혼자서는 결핍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정치적 공동체의 발생 원인은 결핍의 감정이지 권력과 지배 의지가 아니다. 사람들은 결핍의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타임과 함께 살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정치는 삶, 생존 때문에 생겨났지만, 정치를 진정한 의미의 정치로 만드는 것은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이후다. p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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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의 정치는 애초에 재판소의 법적 개입이 필요한 위기 상황이 발생할 소지를 만들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국가를 위한 '최상의 선'으로 고양시킨다. 우정은 어떤 면에서 정치적인 것의 징표이다. 공동체 자체가 '뭔가 우애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매우 근본적인, 실존적인 차원의 문제로 이해한다. 우정은 '함께 살겠다는 자유로운 결정'으로서, 그런 점에서 국가의 기반, 국가가 성립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다. 강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은 지배 권력을 행사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함께 살겠다는 결단이다. 인간의 삶은 목숨을 좌우하는 무조건적 권력에 내맡겨짐으로써 정치화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살겠다는 결정이 인간 존재를 정치화한다.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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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공허는 미디어가 연출하는 스펙터클로 채워진다. 정치인 역시 탈정치화된 스펙터클의 공간 속에 자리를 잡는다. 그들의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그들의 인간됨이 미디어를 통한 연출이 대상이 된다.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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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와 영광은 이미 오래전에 정치의 장을 떠나 자본주의의 내부 공간으로 옮겨졌다. 광고는 예배와 찬송가의 자본주의 버전이다. 새로운 제품을 찬양하는 스타는 오늘의 천사다. 자본주의적 찬송가는 영광을 생산한다. 그것은 오직 자본에만 바쳐지는 지배의 미적 가상이다. 자본의 지배가 거두어가는 갈채의 이름은 소비다.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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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점증하는 긍정화 과정은 물리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가리지 않고 모든 형식의 폭력에 과거보다 더 큰 도덕적 비난이 돌아가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폭력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타자의 부정성뿐만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 역시 폭력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적인 것이 아니라 포화적이다. 실행이 아니라 소모, 배제가 아니라 충일이 그러한 폭력의 바탕에 있다. 그것은 억압이 아니라 우울로 나타난다.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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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물리적 폭력은 주체의 내면에 침입하여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주체를 탈내면화한다. 외부가 내부를 파괴한다. 반면 미시물리적 폭력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주체를 산만하게 만듦으로써 역시 주체의 탈내면화를 초래한다. ADD나 ADHD와 같은 심리질환은 이러한 해체적 산만성의 결과일 것이다. 파괴와 산만함은 다른 것이다. 산만함에는 타자의 부정성이 빠져 있다. 산만함은 같은 것의 과다에서 비롯된다. 산만하게 하는 것은 지각 기관에 밀려오는 현세적, 내재적 사건들이다. 분리적이고 배제적인 거시물리적 폭력과는 반대로 미시물리적 폭력은 더하고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거시물리적 폭력은 또한 모든 행위와 활동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이러한 폭력의 희생자는 극단적인 수동적 상태 속에 던져진다. 반면 미시물리적 폭력의 해체적 작용은 과잉행동장애 같은 증상으로 나타나는 활동의 과다와 관련이 있다. p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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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최적화해야 한다는 강압은 차별 없이 모두에게 덮쳐온다. 최적화의 강압은 보톡스, 실리콘, 에스테틱의 좀비뿐만 아니라 근육질, 근육강장제, 피트니스의 좀비도 양산한다. 성과사회는 도핑사회이기도 하다. 계급과 성별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강자도 약자도 성과의 명령, 최적화의 명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소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성과의 좀비, 건강의 좀비가 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시스템적 폭력의 희생자는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호모 사케르가 아니라 시스템 속에 갇힌 성과주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기에 그 점에서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만 이와 동시에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이기도 하다. 시스템적 폭력은 배제의 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두를 가두어놓는다. 모두가 시스템의 포로가 되어 시스템의 강요에 따라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p12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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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병원, 교도소,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오늘의 사회를 반영하지 않는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유리로 번쩍이는 오피스타워와 쇼핑몰, 피트니스센터, 요가스튜디오, 성형외과가 범람하는 사회로 대체되었다. 21세기 사회는 규율사회가 아니라 성과사회다. 규율사회의 높은 담장은 어느새 까마득한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그것은 명령과 금지를 특징으로 하는 부정성의 사회에 속한다. (...)

 

복중주체와 반대로 성과주체는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기에 자유롭다.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가 그의 심리 상태에 본질적 계기가 된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명령이나 금지가 아니라 자유와 주도권이 그의 실존을 규정한다. 성과의 요구는 자유를 강제로 전도시킨다. 타자 착취가 가고 자기 착취가 온다. 성과주체는 아주 쓰러져버릴 때까지 자신을 착취한다. 폭력과 자유는 하나로 합쳐진다. (...) 가해자는 동시에 피해자다. 소진은 이런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현상이다. p146-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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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얼굴을 한 긍정성의 폭력은 부정성의 폭력보다 더 음험하다. '우르릉대는 전투 소리'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다만 소리의 원천이 달라졋을 뿐이다. 그 소리는 단일한 전투, 어떤 지배 관계나 적대관계도 없는 전투에서 들려온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르며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한다. 전투 소리는 규율사회의 수감시설이 아니라 성과주체의 영혼에서 울린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감옥은 자유다. 그것은 수인이 동시에 감시인기도 한 노동수용소다. (...)

 

참수도 변형도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를 기술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성과주체는 자유와 강제가 분간할 수 없게 된 긍정성의 폭력에 지배당한다. 이러한 폭력에 조응하는 병리적 현상은 우울증이다.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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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명령, 금지, 제의로 긍정성의 번성을 억제한다. (...) 반면 규제 철폐, 경계 파괴, 제의의 파괴가 현재까지 광적으로 진행되면서, 부정적인 것은 엄청난 규모로 해체된다. 부정성의 해체는 과잉된 긍정성을, 보편적 난교를, 과도한 이동성, 소비, 커뮤니케이션, 정보, 생산을 초래한다.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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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전쟁은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다. 적대관계라는 부정성이 사라진 까닭에 전쟁은 자기관계적으로 된다. 파괴하는 자가 파괴된다. (...) 

 

폭발적 폭력은 외부를 향해 압력을 가한다. 반면 파열적 폭력에서는 외부가 없는 까닭에 압력은 안으로 가해진다. 파열적 폭력은 내부에서 파괴적 긴장과 강박을 만들어내고, 이는 시스템 전체의 경색으로 이어진다. 기후와 환경 재앙 역시 시스템의 과열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소진 상태에 이른 성과주체는 임박한 시스템의 파열을 알리는 병적 전조다.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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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성의 폭력은 모든 거리와 비밀에 대한 존중을 파괴한다. (...) 통약되지 않고 침투당하지도 않는 사물의 성질을 철폐함으로써 모든 것을 모든 것과 동등하고 비교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돈의 외설적인 노골성 역시 투명하다. 모든 것이 가격으로 표시될 수 있고 모든 것이 수익을 낳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는 외설적인 사회다. 투명성의 사회는 또한 모든 것이 전시되는 사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시된 사회에서 모든 주체는 자기 자신의 홍보물이 된다. 모든 것이 그 전시가치에 따라 평가된다. 전시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제의가치는 모두 사라진다. 전시된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다. 모든 것이 뒤집어져 밖으로 나와 있고, 벗겨져서 노출되어 있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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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긍정화 과정은 언어까지 휩쓸어간다. 그 속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언어 폭력이 생겨난다. 중상, 비방, 비하, 모욕, 물건 취급에 이르는 폭력의 언어는 부정성의 폭력이다. 폭력의 언어는 타자를 부정한다. 그것은 친구와 적의 면역학적 도식을 따른다. 그러나 새로운 형태의 언어폭력은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이다. 그것은 타자를 겨냥한 공격이 아니다. 새로운 언어폭력은 동일한 것의 무더기에서,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에서 태어난다. 

 

오늘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과잉 커뮤니케이션은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스팸화를 초래한다.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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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의 논의에서) 여기서 자아는 강한 의미의 윤리적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포스트데카르트적 자아는 벌거벗겨져 포르노적 나체가 드러날 때까지 스스로를 전시하는 미적 주체로 나타난다. 그렇게 벗겨지고 전시된 자아에게 타자는 구경꾼 혹은 소비자일 뿐이다.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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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는 세계의 쓰레기화를 데카르트적 주체의 점령 의지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점령욕만으로 경제적 합리성의 한계를 벗어나는 과잉 커뮤니케이션과 과잉 생산을 설명할 수는 없다. 점령하고자 하는 야수적 본능조차 일정한 경제적 합리성을 지닌다. 짐승은 배설물로 필수적인 삶의 공간을 확보한다. 반면 오늘의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은 초경제적이다. 그것은 사용가치를 초월하고 수단과 목적 사이의 경제적 관계를 파괴한다. (...) 성장은 악마적 성격을 띠며 종양의 형성, 이상 비대증으로까지 나아간다. 모든 것이 본래의 규정 이상으로 자라나며 이는 시스템의 비대화와 경색을 초래한다. (...)

 

그렇다면 과잉 커뮤니케이션이란 텔레비전 모니터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송출되는 허구의 장면이며, 존재의 결핍을 과도한 긍정성으로 만회해보려는 '강요된 시나리오'일 것이다. p17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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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에서 나오는 긍정적 폭력은 결핍과 부족의 부정적 폭력보다 더 치명적이다. 결핍은 배가 채워지는 순간 끝나지만, 과잉에는 종착점이 없다.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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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세계 시장은 같은 것이 아니다. 세계의 전면적인 시장화는 곧 세계의 폭력적 파괴를 의미한다. 시장화는 세계에서 노동, 이윤, 자본, 효율성, 성과가 아닌 모든 것을 몰아내고 파괴한다. 히스테리적인 생산과 성과, 과열된 경쟁은 다앙한 종류의 병리적 현상을 유발한다. 지구적 차원의 과잉 기동성은 평화의 복음으로 위장된 전면적 동원령이다. 제국 전체에서 진행 중인 역동적 과정을 현재의 한계 이상으로 가속화하고 첨예화하려는 시도는 재앙만을 불러올 것이다. 시스템의 전소가 그 불가피한 결과일 것이다.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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