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선하게 산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일 경우도 많다. 시간이 흐르면 마음에 억울함이 쌓인다. 이 난제를 철학과 종교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칸트는 신을 요청한다. 신이 미래에 보상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도덕의 근거를 확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에 반해 불교가 요청하는 것은 윤회다. 현생보다 더 광대무변한 시간을 요청한다. 나의 행위의 결과는 지금 당장이 아니라 더 멀고 긴 시간 속에서 돌아온다는 것이다.
내가 어릴 때는 전생과 후생을 미신적인 개념으로 잘못 이해했기에 불교의 이 시간관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불교 시간관의 본질은 우리 행위의 인과관계가 우리의 앎을 넘어서서 드넓은 맥락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삶의 인과관계에 대한 단선적인 이해를 넘어 삶을 포괄적인 인식의 지평에서 바라보게 한다.
다이아몬드 수트라. 금강경의 영문 번역이다. 누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이 짧은 경전에 이토록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을까.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진리의 말씀이자 모든 번뇌의 사슬을 예리하게 끊어내는 다이아몬드의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는 이 금강경 한 문장 한 문장을 비교종교학과 동서 철학을 배경으로 폭넓게 해설하는 것이 장점이다. 칸트와 예수는 물론, 공자, 노자도 수시로 등장한다. 텍스트를 그렇게 다층적으로 읽어가면서 우리는 인류가 처한 비극적 삶의 조건과 문명사적 고민을 함께 읽어가게 된다. 이천 년 전도 지금도 삶의 번뇌는 변함이 없다. 이 책의 출판연도도 1999년인데 세상은 그때보다 더 혼탁해졌지 밝아지지는 않은 듯하다.
성서가 자신을 부정하는 사상을 그 안에 갖고 있지 못하기에 이후 역사가 이단과의 대결로 전개되었다면, 불교 경전을 자신을 부정하는 사상을 내부에 갖고 있기에 언어의 한계로 인한 논리의 충돌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래서 번뇌가 곧 깨달음이다. 불교는 고통을 알지 못하는, 또는 고통과 번뇌가 없는 진공 상태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한가운데서 고통과 번뇌가 생생하게 몰려올 때 내 마음이 그것에 집착하고 있음을 깨닫고 단번에 벗어나라는 가르침이다. 그것이 윤회의 사슬로부터의 해방이다.
한 번 정독했지만 그저 금강경을 한 번 구경한 정도라는 느낌을 받았다. 기회 될 때 다시 읽어봐야겠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어머니의 일화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도올 선생이 20대 때 도무지 불교가 이해되지 않아 아예 출가를 하자 싶어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갔단다. 선생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에다 특히 어머니는 개화기 신여성으로 이화학당을 나온 분인데, 기독교가 우리 민족을 구할 수 있다는 그런 신념을 가진 분이었다. 절에서 수련하던 도올 선생은 어느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몇 달만에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깎은 채로 그냥 서울에 올라갔다 한다. 마당에서 정원을 가꾸던 어머니는 빡빡머리의 도올을 보자마자, 그저 아무 말 없이 반가움에 빙긋 미소만 지으셨다 한다.
대단한 분이구나 했다. 자녀를 자신의 관념이 아니라 그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것. 그런 어머니가 있기에 도올 선생이 그렇게 대범하게 사셨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모든 지은 법이여,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네.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아라. 그대들이여 이같이 볼지니..." (금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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