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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이야기/남아공12

케이프타운 12. 볼더스비치에서 살아남은 펭귄들 아즈마 히로키라는 작가는 '여행'을 새로운 검색어를 찾는 과정이라 표현한다. 일주일 동안 케이프타운 구석구석을 살피며 검색을 많이 했다. '넬슨 만델라' 라는 이름을 제외하고는 남아공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었기에 어떤 여행보다 검색을 많이 한 여행이었다. 케이프타운이 아프리카 식민화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 도시였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지배에서 영국식민지, 남아공연방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대략 알게 되었다. 방문한 곳 중 가장 인상 깊은 곳을 들라면 역시 희망봉이다.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바뀌는 길목에 있는 희망봉. 자연도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대항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세계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희망봉 가는 길에 우리 시대에 더 의미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장소를 만났다. 희망봉 인근 펄스 만에 .. 2019. 8. 3.
케이프타운 11. 남아공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 그루트 콘스탄샤 시티투어 버스로 근교를 한 바퀴 돌아보던 중, 막 버스에 탄 여행자가 우리 보고 왜 안 내리냐고 얼른 내리라 한다. 여기 와인 맛이 괜찮았으니 꼭 들러서 먹고 가라고. 얼결에 내려서 계획에 없던 와인투어를 했다. 그루트 콘스탄샤. 1685년 문을 열어 벌써 삼백 년이 넘은, 남아공에서 제일 오래된 와이너리다. 케이프타운 일대는 아프리카 유일의 지중해성 기후라 정착 초기부터 포도 재배가 시도되었다. 문제는 네덜란드계 보어인이 와인 제조 기술이 없다는 것. 프랑스 위그노 교도들이 정착민에 합류하며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남아공 와인의 시작이다. 생산된 와인은 동인도회사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시음한 5종의 와인은 와인에 별 관심 없는 내겐 평범했는데 나폴레옹이 매일 마셨다는 디저트와인 ‘그랑 콩스탕스’는 특색.. 2019. 7. 25.
케이프타운 10. 삶은 사랑하고 즐기는 것, 하트 오브 케이프타운 뮤지엄 만델라가 수감되었던 로벤섬 대신에 얼결에 간 곳이 하트 오브 케이프타운 뮤지엄. 갈 만한 곳을 찾다 구글 평점이 높아 방문했다. 1967년 세계 최초로 심장이식수술에 성공한 그루트 슈어 병원 한 켠에 있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니 세 명의 사진이 보인다. 중년의 환자 워쉬칸스키, 병원 앞 베이커리에 빵을 사러 갔다 교통사고로 죽은 이십대 기증자 드니스 다발, 의사 크리스천 버나드. 첫 이식 수술을 받은 워쉬칸스키는 18일밖에 살지 못했지만 이후 버나드의 환자 중엔 23년까지 생존한 이도 있었다. 박물관엔 당시 수술실을 그 자리에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벽시계는 6시에 맞춰져 있다. 5시간의 수술 끝에 워쉬칸스키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시간이다. 의사 크리스천 버나드의 생애에 관한 다큐도 보았다. 영어.. 2019. 7. 19.
케이프타운 9. 넬슨 만델라와 로벤섬 남아공 흑인 지식인층의 저항운동의 중심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가 있었다. 요하네스버그에 흑인 최초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던 만델라도 ANC의 리더다. ANC는 남아공에 체류할 때 인도인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애쓴 간디의 투쟁방식을 본받아 처음엔 비폭력투쟁을 했다. 그러나 다수인 흑인들의 비폭력투쟁은 씨도 먹히지 않았고 만델라는 무장투쟁으로 전환한다. 1962년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내란죄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케이프타운에서 배로 30분 정도 걸리는 로벤섬. 시내 언덕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이곳엔 남아공의 정치범을 가두는 감옥이 있다. 넬슨 만델라가 27년 감옥생활 중 18년을 복역한 곳이다. 연안이지만 주변에 파도가 심해 탈출이 어려워서 이 섬에 감옥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유네스.. 2019. 7. 19.
케이프타운 8. 아파르트헤이트의 기억, 디스트릭트 식스 뮤지엄 케이프타운에서 관광객이 제일 북적이는 곳은 바닷가에 있는 워터프론트. 거기엔 나란히 서 있는 네 사람의 동상이 있다. 남아공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다. 1960년 알버트 루툴리, 1984년 데스몬드 투투 주교, 1993년 클레르크 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노벨평화상을 네 명이나 받았다는 것은 그간 이 사회가 얼마나 평화롭지 못했던가를 반증한다. 보어인이 주축이 된 남아공의 국민당은 1948년에 정권을 잡자 그간의 차별을 더 강화한 유명한 인종분리 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밀고나간다. 흑인에게 투표권이 없음은 물론, 인구의 1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백인들이 남아공의 좋은 땅을 다 차지하고 인구의 대다수인 흑인과 유색인에겐 아주 제한된 구역에서의 거주만 허락되었다. 도심에 있는 디스트릭트 식스 뮤지엄은 그 시대.. 2019. 7. 19.
케이프타운 7. 다이아몬드와 보어전쟁 케이프 식민지를 손에 넣은 영국이 이에 만족하지 않고 내륙으로 진군한 이유는 킴벌리에서 발견된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광산 때문이었다. 곧이어 금이 발견되고 사막 한가운데 있던 요하네스버그는 빠르게 산업화된 도시가 된다(골드러시 때 세계 금의 3분의 1이 여기서 나왔단다). 영국이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내륙에 이주한 보어인들이 세운 공화국과 전쟁이 벌어진다. 1899년에서 1902년까지 벌어진 2차 보어전쟁은 양쪽에 많은 사상자를 냈다. 영국군은 쉽게 보어인을 제압하리라 생각했지만 오랜 기간 원주민과의 싸움에 단련된 보어인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여러 차례 고전한 영국군은 보어인 마을을 초토화하고 여성과 아이들 십만 명을 수용소에 가둔다. 영국군은 이들 중 2만6천 명이 굶어죽도록 내버려두는데 이로.. 2019. 7. 19.
케이프타운 6. 노예무역의 역사, 슬래이브 롯지 케이프타운도 노예 거래가 활발했다.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엔 정착민 수가 확 늘지 않았고 농업엔 노동력이 필요했다. 보어인들은 마다가스카르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까지 노예를 사들였다. 노예제는 케이프타운이 영국령이 되면서 금지되었고, 보어인은 영국의 정책에 반발한다. 보어인들이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한 이유는 노예도 필요했지만, 영어를 못해 2등 국민 취급을 받는 것도 싫었고, 칼뱅주의자로 인종차별을 당연시했던 그들이 종교적 신념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과감하게도 그간 애써 일궈온 케이프타운의 터전을 버리고 내륙으로의 대이주를 결정한다. 이는 내륙에 살던 원주민과의 충돌을 의미했고 보어인은 강력하게 저항하는 줄루 족 등 원주민과의 싸움에서 이겨 결국 내륙을 차지한다. 그렇게 해.. 2019. 7. 19.
케이프타운 5. 케이프 식민지 시대의 유적, 캐슬 오브 굿 호프 케이프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은 1679년 세워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성채, 캐슬 오브 굿 호프(castle of good hope)다. 오각형 모양으로 주위에 해자까지 만든 견고한 성이다. 네덜란드가 지배한 케이프 식민지는 몇 차례의 전투 끝에 1895년 영국령으로 넘어간다. 사령관/총독의 집무실 앞에 있는 네 명의 입상은 원주민 추장으로 네덜란드 및 영국 지배에 저항하다 성 안의 감옥에 투옥된 인물들이다. 성 내부는 박물관으로 꾸며져 케이프타운의 역사를 보여준다. 책에서만 봤던, 기억의 저편에 있던 이름들을 만났다. 대표적인 게 마젤란과 엘카노. 1519년 스페인에서 서쪽으로 세계일주 항해를 시작한 마젤란은 태평양을 횡단한 뒤 필리핀에서 원주민과의 전투 중 목숨을 잃고 엘카노가 지휘봉.. 2019. 7. 19.
케이프타운 4. 케이프타운의 원주민, 사우스 아프리카 뮤지엄 다큐에서 본 바에 따르면, 케이프타운의 원주민은 코이코이족, 그리고 부시맨으로 잘 알려진 산족이었다. 이들 모두 유목민으로 그 기원이 초기 인류에까지 닿아 있는 사람들이다. 이 둘을 합쳐 코이산족이라 부른다. 처음에 코이산족과 보어인은 평화롭게 공존했으나 그 공존은 곧 깨진다. 보어인이 케이프타운 일대의 땅을 그들 자신의 소유로 삼자 코이산족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하지만 보어인의 총을 당해낼 수 없었고 살아남은 코이산족은 내륙으로 쫒겨나거나 공동체가 와해되어 백인사회의 노동인구로 편입된다. 케이프타운의 역사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일의 축소판이었다. 현재 분위기도 아프리카보다는 미국의 한 도시 같은 느낌이다. 사진은 사우스 아프리카 뮤지엄에서 본 원주민의 바위예술. 첫 그림은 이천 년 전 것이지만 .. 2019. 7. 19.
케이프타운 3. 채소재배에서 시작된 식민지의 역사, 컴퍼니즈 가든 포르트갈 선원들은 희망봉 근처의 케이프타운을 아시아로 가는 긴 항해에서 잠시 거쳐가는 곳으로만 여겼다. 그들은 여기서 원주민과 필요한 물자를 물물교환하고 인도와 동남아로 떠났다. 케이프타운에 백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희망봉을 발견한 지 백 오십 년이 더 지난 뒤다.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직원을 상주시키면서 점차 정착민이 생긴다. 초기 정착민은 네덜란드계로 보어인(농부라는 뜻)이라 부른다. 동인도회사는 항해에 필요한 물자를 원주민에게 의지하지 않고 직접 공급하길 원했다. 멀고 긴 항해에서 괴혈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비타민 공급은 필수였다. 그래서 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밭을 일구어 유럽에서 먹던 채소를 기르는 것이었다. 사진은 케이프타운 중심가에 있는 컴퍼니즈 가든. 유럽인들이 채소 재배.. 2019. 7. 18.
케이프타운 2. 희망봉에 가다 남아공의 7월은 겨울이라 날씨가 좋지 않았다. 계속 흐리거나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엔 일주일 중 딱 하루가 맑은 날이었고 하루가 구름과 해가 왔다갔다 했다. 또 하루는 저녁에만 맑았다. 우리는 맑은 날 단 하루를 희망봉에 쓰기로 했다. 그래서 돌아오기 전 날, 희망봉으로 떠났다. 희망봉이 있는 케이프반도는 케이프타운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시티투어 버스로 한 시간쯤 걸린 것 같다. 해안도로를 따라가는 가는 길의 풍광도 좋았다. 케이프타운 여행 중 가장 시원하고 멋진 자연이 펼쳐졌다. 이쪽 길은 렌트카로 자유롭게 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렌트카를 계획했는데, 렌트비는 무지 싸지만, 보증금으로 백만 원 정도를 더 냈다가 한 달 뒤에 돌려받는 구조인데다 주차 문제도 있고 해서 우버를 이.. 2019. 7. 18.
케이프타운 1. 중부 아프리카에서 남부 아프리카로, 케이프타운과의 만남 르완다 키갈리에서 케이프타운까지는 7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짐바브웨의 하라레에서 한 시간 쉬어갔으니 비행 시간은 6시간이다. 요하네스버그까지는 4시간인데 케이프타운은 두 시간이 더 걸렸다. 아프리카 중부에서 남부까지 이렇게 멀다니! 북아프리카 이집트에서 케이프타운까지는 한국에서 유럽 가는 시간만큼 걸릴 것 같다. 우리나라에 있을 땐 아프리카 대륙이 이처럼 크다는 걸 실감하지 못했다. 아프리카는 유럽과 인도를 합친 것만한 크기이다. 동부 아프리카와 서부 아프리카의 거리는 한국과 동남아보다 더 멀다. 대한항공은 에볼라가 돌 때 이때다 하며 수지가 안 맞는 케냐 나이로비 직항편을 없앴지만, 사실 에볼라가 기승을 부린 지역과 케냐는 한국과 동남아 정도의 거리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남아프리카에 왔다. 아프리카 최.. 2019. 7.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