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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이야기/남아공

케이프타운 2. 희망봉에 가다

by 릴라~ 2019. 7. 18.

 

 

남아공의 7월은 겨울이라 날씨가 좋지 않았다. 계속 흐리거나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엔 일주일 중 딱 하루가 맑은 날이었고 하루가 구름과 해가 왔다갔다 했다. 또 하루는 저녁에만 맑았다. 우리는 맑은 날 단 하루를 희망봉에 쓰기로 했다. 그래서 돌아오기 전 날, 희망봉으로 떠났다.

 

 

희망봉이 있는 케이프반도는 케이프타운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시티투어 버스로 한 시간쯤 걸린 것 같다. 해안도로를 따라가는 가는 길의 풍광도 좋았다. 케이프타운 여행 중 가장 시원하고 멋진 자연이 펼쳐졌다. 이쪽 길은 렌트카로 자유롭게 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렌트카를 계획했는데, 렌트비는 무지 싸지만, 보증금으로 백만 원 정도를 더 냈다가 한 달 뒤에 돌려받는 구조인데다 주차 문제도 있고 해서 우버를 이용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우버는 편안했고 편리했다. 

 

 

희망봉은 엄밀히 말해 아프리카 최남단은 아니다. 최남단으로 가려면 좀 더 가야 하는데, 긴 항해에 지쳤을 포르투갈 선원들에겐 희망봉이 있는 이 모퉁이가 최남단으로 여겨졌을 법도 하다. 날씨는 우리 편이었다. 구름 없이 환하고 그리 춥지 않은 날씨였다. 버스에서 내려 희망봉이 조망되는 곳으로 가는데 마음이 두근그렸다.

 

 

1497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유럽인으로는 처음 발견했던 희망봉엔 그때처럼 파도가 거셌다. 그는 이곳을 ‘폭풍의 곶’으로 명명했지만 포르투갈 왕실은 ‘희망봉’으로 바꿔부른다. 그로부터 십 년 뒤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간 바스코 다가마를 비롯한 유럽인에겐 새 시대의 찬란한 개막을 알리는 이정표였고 원주민에겐 긴 고난의 시작을 예고했던 곳.

 

 

바다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희망봉에서 시선을 돌려 케이프포인트를 향해 올라갔다. 희망봉이 있는 대서양 쪽에는 격렬한 파도가 쉼없이 몰아쳤는데 케이프포인트를 돌아 반대편 펄스 만 쪽으로 난 바다는 꿈결인 듯 고요한 바다다. 케이프포인트 전망대를 지나 케이프포인트 바로 앞까지 가는 오솔길은 평화와 따스함의 바다가 함께 했다. 역사적 의미는 차치하고, 지금 삶의 파고 속을 항해하는 모든 분들이 희망봉이라는 전환점을 돌아 그 너머의 잔잔한 평화를 맞이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는데 작은 사고가 있었다. 이 일대에는 바분이라 불리는 원숭이가 많다. 눈깜짝할 사이에 내 옆에 있던 바나나 한 개와 주먹밥이 든 도시락통 한 개를 훔쳐갔다. 밥을 다 먹은 빈 통이라 실망할 텐데. 아무튼 천만다행이었다. 배낭을 가져갔으면 큰일날 뻔 했다.  

 

 

희망봉이 보이는 주차장에서 희망봉 바로 아래까지는 걸어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여기는 국립공원이라 부근에 다양한 트레킹루트가 있었다. 아쉽게도 우리는 케이프포인트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어 워킹투어 시간까지 주차장에 오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옵션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버스는 워킹투어를 가지 않은 나머지 승객들을 차로 희망봉 바로 앞에 내려놓았다. 

 

 

주변은 위에서 볼 때보다 훨씬 거센 너울이 몰아쳤다. 이 모퉁이를 돌아 드디어 대서양이 끝나고 인도양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 선원들은 정말 감격했을 것 같다. 바다가 주는 거칠지만 신선한 활기와 함께 '희망봉'이라는 이름이 가슴에 불러오는 어떤 벅찬 느낌이 있었다. 

 

 

최근 몇 년간 일상에선 아무 일 없었지만 마음은 무척 힘들었다.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 나는 투병과정과 그 과정에서 내가 내린 잘못된 선택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후회, 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후회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제 만 삼 년 반이 지났다. 희망봉을 보며 어쩌면 나도 모퉁이를 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문득 들었다. 포르투갈에서 희망봉까지 대서양을 따라 내려오는 길. 그 길은 정말로 끝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끝이 있었고, 희망봉을 돌아도 항해는 계속되지만 그 전과는 다른 바다다. 마음의 희망봉을 지날 수 있으면 좋겠다. 

 

 

 

*2019년 7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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