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의 책을 읽노라면 100페이지의 얇은 책에 늘 간지를 잔뜩 끼워넣게 된다. 그만큼 다시 곱씹고 싶은 함축적인 문장들로 가득하다. 예전 책은 얇고 가벼워 백에 넣고 다니거나 지하철 등에서 보기 참 좋았는데, 요새는 다 하드커버로 나와서 안 사고 빌려본다. 하드커버로 안 나왔으면 하는 바람.
저자는 21세기 인류를 가축에 빗댈 때가 많다. 왜 노예가 아니고 가축인가. 노예는 주인에게 저항하지만 가축은 저항하려는 생각 자체가 없을 만큼 완전히 체제에 길들여졌기 때문. 저자가 보기에 지금 인류는 데이터 가축, 정보 가축, 소비 가축이 되어 있다. 정보가 과잉 생산되는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자기를 공연하는 데 혈안되어 있고 그 공연의 방식은 소비이다. 인플루언서들은 소비가 자기실현이자 행복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문제는 물질적 소비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보 체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지각을 파편화시키고 사회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정보들은 찰나적인 소비물이고 그런 정보를 소비하면 할수록 진실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된다. 진실은 파편적인 정보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시간의 지속 속에서 공들여 탐구하고 쌓아올린 것이다. 진실은 내면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진정한 소통에서 내 주장이 도전 받고, 검증되고 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즉 진실은 정보가 아니라 담론 속에서 생산된다. 담론은 경청을 필수로 전제하며, 민주주의는 담론을 통해 성장한다. 디지털 소통은 공동체 없는 소통이다.
정보의 과잉과 범람, 홍수 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가짜뉴스들은 내 삶의 내용을 공허하게 만들고, 사회를 불신하게 만든다. 그러한 삶의 공허를 쉽게 채워주는 것이 디지털 종족주의다. 각종 음모론은 혐오와 배제를 내포하고 있기에 텅 비어 있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채워주기에 적합하고, 그래서 디지털 종족주의가 탄생한다. 그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사실에 반하여, 자신들의 신념을 신성시한다. 특히 극우파에서 그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은 정체성의 자원을 시간적 건축물(타자와 함께 쌓아올린)로서의 삶의 경험이 아니라 디지털 종족주의에게서 빌려온다.
배움 또한 파편화되고 있다. 나의 합리성이 진정한 합리성이 되려면 타자와의 소통, 경청, 담론적 경쟁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디지털 질서는 그러한 시간적 과정을 낭비라고 여기고 알고리즘에 의한 최적화를 추구한다. 인공지능은 정당화하지 않고 계산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알고리즘이 가장 훌륭한 선택을 찾아주리라 간주한다. 정보는 방향 설정 능력이 없으며, 아무렇게나 성형하고 조작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배움 대신에 기계학습이, 논증 대신에 알고리즘이, 완고하고 끈질긴 추구 대신에 단시간에 성과를 내는 지능이 각광받는 시대다.
그 결과 우리는 완벽하게 플라톤이 말한 동굴, '디지털 동굴' 속에 갇혀버렸다. 디지털 화면에 사슬처럼 매어 있으면서도 자유롭다고 착각하니, 완벽하게 갇혔다고 볼수 있으리라. 동굴 밖 외부는 아예 차단되어 있고 그 세계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이미 실현되었다.
그럼 어떡하라고? 이 책은 어설픈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갇혀 있는 디지털 동굴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것, 그것이 철학자의 임무라 볼 수 있으리라. 정보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을 파편화시키고 우리를 진실에서 멀어지게 한다. 범람하는 디지털 소통은 담론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약화시킨다.
"진실은 이제 지난 날의 에피소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이런 비관적인 전망으로 끝이 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범람하는 정보와 디지털 화면을 차단하고, 자신 및 타자와 깊이 있는 관계를 맺으며, 시간의 건축물로서의 삶의 자리를 다시 확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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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체제는 정보자본주의와 맞물려 있으며, 정보자본주의는 감시자본주의로 발전하고, 사람들은 데이터 가축이자 소비 가축으로 격하된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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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율체제에서 사람들은 노동 가축으로 훈련된다. (...) 정보체제의 예속된 주체는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순종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 주체는 자기가 자유롭고 진정성 있고 창조적이라고 망상한다. 그 주체는 자기를 생산하고 자기를 공연한다.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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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는 교회와 같다. 좋아요는 아멘이다. 공유는 성찬식이다. 소비는 구원이다. 인플루언서의 드라마 작법인 반복은 전체에 예배의 성격을 부여한다. 동시에 인플루언서들은 소비상품을 자기실현의 도구로 느껴지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도록 실현하면서 죽도록 소비한다. 소비와 정체성이 하나로 합쳐진다. 정체성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된다.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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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감시당하는 대신에 재미있어 한다. 그들은 억압당하는 대신에 중독된다. 사상경찰과 진실부는 쓸모없어진다. 고통과 고문이 아니라 재미와 즐거움이 지배 수단으로 동원된다. (...) 요컨대 오웰은 우리가 몹시 싫어하는 것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몹시 좋아하는 것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다. (...)
멋진 신세계는 진통사회다. 거기에서 고통은 기피된다. 강렬한 감정들도 억압된다. 모든 바람, 모든 욕구는 곧바로 충족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재미, 소비, 즐거움에 휩싸여 몽롱해진다. 행복을 향한 강박이 삶을 지배한다. 국가는 주민들의 행복감을 높이기 위해 '소마'라는 약을 나눠준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는 텔레스크린 대신에 '감각영화관'이 있다. 그 영화관은 '향기 오르간' 등을 써서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마비시킨다. 감각 영화관은 소마와 더불어 지배 수단으로 등장한다. p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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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는 시간적 안정성이 없다. 왜냐하면 정보는 '놀라운 일이 주는 흥분'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적 불안정성 때문에 정보는 지각을 파편화한다. 정보는 실재를 '영원한 현재성의 현기증' 속으로 처넣는다. 정보 곁에 하염없이 머무르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보는 인지 시스템을 동요시킨다. 정보에 내재하는 가속 강박은 앎, 경험, 깨달음 같은 시간 집약적 인지 실행들을 몰아낸다.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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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뿐 아니라 지각도 안정화하는 밑바탕의 시간건축물들은 현저히 침식되고 있다. 정보사회의 일반적 단기성은 민주주의에 이롭지 않다. 담론에는 가속되고 파편화된 소통과 조화될 수 없는 시간성이 깃들어 있다. 담론은 시간 집약적 실행이다.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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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된 소통을 향한 강박이 우리에게서 합리성을 앗아간다. 시간 압박 아래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지능을 선택한다. 지능은 전혀 다른 시간성을 지녔다. 지능적 행위는 단기적 해결과 성과를 지향한다.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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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전쟁에는 오늘날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기술적 심리적 수단이 동원된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유권자들은 로봇의 전화를 받고 가짜뉴스의 홍수에 잠긴다. 트롤 군단이 의도적으로 가짜뉴스와 음모론을 퍼뜨려 선거전에 개입한다. 소셜 봇, 곧 소셜미디어상의 자동화된 가짜 계정은 진짜 인간인 척하면서 게시물을 올리고 트윗하고 공유하고 '좋아요'를 누른다. 소셜 봇들은 가짜뉴스, 비방, 혐오 댓글을 퍼뜨린다. 요컨대 시민이 로봇으로 대체된다. 로봇들은 한계비용 없이 대량으로 목소리들을 날조하여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렇게 로봇들은 정치적 논쟁을 심하게 왜곡한다. (...) 유권자들은 무의식중에 봇들의 영향에 노출된다.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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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들은 공적 공간을 거치지 않고 퍼져나간다. 정보들은 사적 공간에서 생산되어 사적 공간들로 전송된다. 따라서 인터넷은 공론장을 이루지 못한다. 소셜미디어는 이 같은 공동체 없는 소통을 강화한다. 인플루언서들과 팔로워들은 정치적 공론장을 형성하지 못한다. 디지털 커뮤니티는 상품 형태다. 실제로 디지털 커뮤니티는 상품이다. 디지털 커뮤니티는 정치적 행위를 할 능력이 없다.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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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원자화와 나르시시스화가 심해짐에 따라 우리는 타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또한 공감을 상실한다. 오늘날 모든 각자는 자아를 숭배한다. 누구나 자기를 공연하고 생산한다. 알고리즘을 통한 망의 개인화가 아니라 타인의 사라짐이, 경청 능력의 부재가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의 원인이다.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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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종족은 강력한 정체성 경험과 소속 경험을 가능케 한다. 디지털 종족에게 정보는 지식을 위한 자원이 아니라 정체성을 위한 자원이다. 음모론은 인터넷상에 종족주의적 서식 구역이 형성되는 데 기여하기에 특히 적합하다. 왜냐하면 음모론은 경계 설정과 배제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인데, 경계 설정과 배제는 종족주의에, 그리고 종족주의의 정체성 정치에 본질적이다.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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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종족은 자신의 정보 거품방울 안에서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사실들을 얼마든지 접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들은 그냥 무시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정체성을 채워주는 이야기에 들어맞지 않고, 신념의 포기는 정체성 상실과 다름없으며, 정체성 상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족주의적 정체성 집단은 어떤 담론도, 어떤 대화도 거부한다. 소통과 이해는 불가능해진다. 종족주의적 정체성 집단들이 발설한 견해는 담론적이지 않고 신성하다. 왜냐하면 그 견해는 그들의 정체성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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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소통은 타자의 차원이 점점 더 없어진다는 점에서 담론성이 점점 더 줄어든다. 사회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타자성 없는 정체성들로 파열한다. 담론 대신에 정체성 전쟁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사회는 공통의 것, 특히 공통감각을 상실한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더는 경청하지 않는다. (...)
경청은 하나의 우리를 확립한다. 민주주의는 경청자 공동체다. 공동체 없는 소통으로서의 디지털 소통은 경청의 정치를 파괴한다. 그러면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말만 듣게 된다.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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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없이, 담론 없이 존속하는 형태의 합리성을 디지털 합리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디지털 합리성은 담론을 이끄는 소통적 합리성과 대립한다. 정당화 능력과 더불어 기꺼이 배우려는 태도도 소통적 합리성에 본질적이다. (...) 정당화의 개념은 배움의 개념과 엮여 있다. 논증은 배움 과정을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인지적-도구적 영역에서 정당화된 견해를 발설하고 효과적으로 행위하는 사람을 합리적이라고 칭하지만, 이 합리성이 실패로부터, 가설의 반박으로부터, 개입의 좌절로부터 배우는 능력과 짝을 이루지 않으면, 이 합리성은 우연적 합리성으로 머문다.
인공지능은 정당화하지 않고 계산한다. 논증의 자리에 알고리즘이 들어선다. 논증은 담론 과정에서 개선된다. 반면에 알고리즘은 기계적 과정에서 계속 최적화된다. 이를 통해 알고리즘은 스스로 자신의 오류들을 수정할 수 있다. 디지털 합리성은 배움을 기계학습으로 대체한다. 그렇게 알고리즘이 논증을 흉내낸다.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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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담론은 느리고 비효율적인 형태의 정보 처리일 따름이다. 담론 참여자들이 제기하는 타당성 주장들의 바탕에 놓여 있는 것도 불충분한 정보 처리다. 데이터주의자라면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소통 행위는 정보 집합이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규모일 때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유한한 인간 지성은 큰 정보 집합을 처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디지털화는 담론의 울타리를 깨부수는, 정보의 급증을 유발한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덕분에 우리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적인 시야를 얻어서 모든 사회적 과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만민의 안녕을 위해 최적화할 것이라고 데이터주의자들은 믿는다. (...) 데이터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디지털 합리성은 소통적 합리성을 월등히 능가한다. p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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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정당 민주주의는 가까운 미래에 소멸할 것이다. 그러면 정치인은 전문가들과 정보학자로 대체될 것이며 이들은 이데올로기적 견해의 저편에서 권력에 대한 관심에 휘둘리지 않고 사회를 관리할 것이다. 정치는 데이터 주도의 시스템 관리로 대체된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결정들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통해 내려진다. 정치적 담론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담론은 부차적인 것이다. 담론과 소통의 증가가 아니라 데이터와 지능적인 알고리즘의 증가가 사회적 시스템의 최적화를, 요컨대 만민의 행복을 약속한다.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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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이나 '모든 가치의 전도'라는 문구로 표현한 가치허무주의는 이미 지나갔다. 새로운 허무주의는 21세기의 현상이다. 이 허무주의는 정보 사회의 병적인 뒤틀림의 일부이며, 우리가 진실 자체에 대한 믿음을 상실할 때 발생한다. 가짜뉴스, 정보 조작, 음모론의 시대에 우리는 진실을 보유한 실재를 상실해간다. 지금 정보는 실재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채 과도실재적 공간에서 유통된다. 사실성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간다. 요컨대 우리는 탈사실화된 우주 안에서 산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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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진실은 상처 입기 쉽지만 '완고하다'고, 진실은 '특이한 끈질김'을 지녔으며 그 끈질김은 '모든 인간 행위의 결과(인간이 제작한 생산물과 달리)가 그렇듯이, 진실은 되돌릴 수 없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고 여전히 확신했다. 사실들의 완고함과 끈질김은 이제 과거의 일이다.
디지털 질서는 제작가능성을 전체화함으로써 일반적으로 사실적인 것의 굳건함을, 바꿔 말해 존재의 굳건함을 제거한다. 총체적 제작가능성 안에서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없다. 디지털화된, 곧 정보화된 세계는 전혀 완고하고 끈질기지 않다. 오히려 그 세계는 아무렇게나 성형하고 조작할 수 있다. 디지털성은 사실성과 정반대이다. 디지털화는 사실들에 대한 의식을, 결국 실재 의식을 약화한다. 총체적 제작가능성은 디지털 사진의 본질이기도 하다. 아날로그 사진은 보는 사람에게 존재하는 것의 존재를 증명한다. (...) 디지털 사진은 진실로서의 사실성을 파괴한다. 디지털 사진은 지시 대상으로서의 실재를 제거함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실재를 제작한다. p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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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는 독자적으로 세계를 환히 밝히지 못한다. 임계점을 넘어서면 정보는 오히려 세계를 어둡게 만든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의심을 품고 정보를 마주한다. 근본적인 불신이 정보에 따라붙는다. (...) 정보사회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신뢰를 상실한다. 정보사회는 불신사회다.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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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는 가산적이고 누적적이다. 반면에 진실은 서사적이고 독점적이다. 정보 더미나 정보 쓰레기는 존재한다. 반면에 진실은 더미를 이루지 않는다. 진실은 흔하지 않다. 여러모로 진실은 정보와 대립한다. 진실은 우연과 양면성을 제거한다. 이야기로 상승한 진실은 뜻과 방향 설정을 창출한다. 반면에 정보사회는 뜻이 텅 비어 있다. 오직 공허만이 투명하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를 잘 갖췄지만 방향 설정이 없다. 정보는 방향 설정력이 없다.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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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은 특히 위기 상황에서 번창한다. 오늘날 우리는 경제적 위기나 감염병 대유행 위기뿐 아니라 서사의 위기에도 처해 있다. 이야기는 뜻과 정체성을 창출한다. 따라서 서사의 위기는 뜻의 공허, 정체성 위기, 방향 상실로 이어진다. 이때 음모론이 미세서사로서 보상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정체성과 뜻의 자원으로 음모론을 움켜쥔다. 이런 연유로 음모론은 우파진영에서 확산된다. 우파 진영은 정체성 욕구가 특히 강하기 때문이다.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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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날 디지털 동굴 안에 갇혔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디지털 화면에 사슬로 매여 있다. (...) 강렬한 정보 도취가 존재의 윤곽을 흐릿하게 만든다.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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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정보와 전혀 다른 시간성을 지녔다. 정보는 현재성을 띠는 기간이 아주 짧은 반면, 진실의 핵심 특징은 지속이다. 그리하여 진실은 삶을 안정화한다. (...) 디지털 질서에서 존재의 굳건함은 정보의 덧없음에 밀려난다. 우리는 오늘날 아마도 정보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정보체제가 진실체제를 몰아낸다.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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