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의사인 저자가 각종 치료로 생의 마지막 시간을 의미 있게 쓰지 못하는 사례들을 경험하면서, 노년의 삶을 전반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책의 중반까지는 자기 집에서 생활하던 노인들이 왜 요양원에 갈 수밖에 없는지 그 과정을 조명했고, 후반부는 척수 종양이 생긴 자기 아버지를 중심으로 노년에 암과 같은 질병이 닥쳤을 때 현대의학에 어느 정도로 의지하면 좋은가에 대한 질문을 담았다. 다양한 사람들의 실례를 들고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잘 읽혔고, 노년에 우리 앞에 어떤 과제가 닥치는지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
자기 집에서 활달하게 일상을 영위하던 사람들에게도 노쇠는 다가온다. 자주 넘어지고 넘어져서 다치는 일이 생기면 가족들은 24시간 돌봐주는 사람이 있는 요양원을 고려한다. 하지만 요양원은 '안전'하기는 하지만 개인의 삶이 거세된 공간이다. 모르는 사람과 커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침대가 있으며 각종 규칙으로 통제되는 그곳은 삶이 아니라 그저 노인들을 죽을 때까지 보관하는 장소에 불과하다. 개인의 자율성이 완전히 사라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90년대부터 이러한 요양원을 개선하기 위한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어시스티드 리빙'처럼 가정집처럼 설계된 작은 집들을 모아놓는다든가, 병실에 앵무새를 키우고 각종 동물과 식물을 가꾼다든가 하는 식으로... 노인에게 환경과의 의미 있는 연결을 만들어주려는 시도이다. 몇몇 시도는 성공하고 어떤 시도들은 실패했지만, 그런 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꼈다. 산다는 것을 의미있고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익숙한 생활공간은 물론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이든 타자와의 의미 있는 접촉이 필수적이었다.
우리들 대다수는 자기 집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게 너무 당연해서 이 생활이 주는 기쁨을 매순간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노쇠는 찾아온다. 노년에는 자기 집에서 살고, 두 발로 거동하며, 햇살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없어서 결국 타인에게 의지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우리가 마지막 생애를 맡기는 요양원과 같은 공간이 지금과는 달라야 한다. 좀 더 개인의 자율성이 발휘되고 살아가는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 후반부의 논의도 의미 있었다. 과거에는 병을 앓던 노인들이 임종 직전에 힘을 내어 유언을 하는 일이 많았다. 다시 말해 임종이 임종답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대에는 죽기 직전, 너무 많은 치료로 생명력이 소진되어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에서 죽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각종 의학적 처치를 해서 생명 연장에만 관심 있는 119 대신 호스피스 케어를 선택하는 게 나을 수 있다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둬야 한다고.
그리고 그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잘 설명한다. 저자의 부모는 모두 의사이고 저자도 의사인데, 아버지의 척수 종양을 놓고 세 명의 의사가 고민해도 선택이 어렵더라는 것이다. 당장 수술할 것인가, 고통을 조절하면서 일상을 이삼 년 더 누리고 마비 같은 심각한 증상이 생기면 그때 수술할 것인가. 저자의 가족은 후자를 선택했고, 이는 좋은 선택으로 저자의 부친은 일상을 몇 년 더 누린다. 하지만 수술 이후에 문제가 생긴다. 조직검사 결과 치료 가능한 암이어서 방사선, 항암 치료를 했는데 효과는 없고 체력만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부친은 스스로 치료 중단을 결정하고 호스피스 케어를 선택한다. 통증을 조절하면서 생의 마지막 몇 달을 의미 있게 보내기로 한 것이다.
노년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어떤 것들을 결정해야 하는지, 우리 앞에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종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양한 사례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어서 타인이 겪은 시간을 나도 몸소 겪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내게도 언젠가 노쇠가 닥쳐올 것이다. 가능하면 끝까지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싶지만 그건 하늘에 달린 일,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있다. 지금 내 집에서 살면서, 자율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는 이 순간이 너무 큰 축복이라는 것. 엄청난 행운이자 기쁨이라는 것. 그 시간을 우선 충분히 꽉꽉 채워 살아야겠다. 그리고 언젠가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찾아오겠지. 육체적 한계 속에서도 약간의 자율성과 고유성을 지킬 수 있는 길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을 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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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모두 단순한 기쁨이 주는 안락함을 찾게 된다. 동료애와 우정, 규칙적인 일상, 맛있는 음식, 얼굴에 와 닿는 햇살의 온기 같은 것 말이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성취하고 축적하는 것보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에서 얻는 행복감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야망이 점점 줄어드는 걸 느끼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남기고 갈 것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산다는 것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느끼도록 해주는 목적을 우리 밖에서 찾고자 하는 깊은 욕구를 가지게 된다.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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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노화의 공포는 단지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니다. 그것은 고립과 소외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돈을 더 바라지도, 권력을 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가능한 한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대해 직접 선택을 하고,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쇠약해지고 의존적이 되면 그러한 자율성을 갖는 것이 불가능해진다고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내가 루 할어버지, 루스 할머니, 앤 할머니, 리타 할머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은 그것이 분명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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