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와는 아주 많이 다른, 디지털 사회와 자본주의가 결합했을 때 나타나는 새로운 삶의 양태를 적절하게 보여주는 개념에는 무엇이 있을까. 철학자 한병철만큼 이 방면에 깊은 이해를 지닌 저자는 잘 없는 것 같다.
자기 착취, 성과 좀비, 투명사회, 긍정사회, 데이터 전체주의, 전시 가치, 포르노, 나르시시즘, 우울과 자해.... 등의 개념들을 경유하면서 우리는 우리 삶이 총체적으로 상업화되었음을 직시하게 된다. 요즘 칭송 받는 공유 경제(에어비앤비 등)는 우리를 자본으로부터 해방하기는커녕 손님에 대한 환대까지 경제화하고, 이렇게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상품으로 판매할 때 자본주의는 더이상 그것에 맞설 적수가 없이 완성되었다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조를 저자는 중세 봉건체제와 비슷하다고 이야기한다. 페이스북 같은 영주들은 농노인 우리에게 영지를 주면서 밭을 일궈라(소통하라), 라고 하지만, 우리가 소통을 많이 하면 할수록 영주들이 생산물을 다 가져가는 구조이기 때문에. 영주들은 우리의 소통으로 엄청난 돈을 벌고, 또 효과적으로 감시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수밖에 없다.
이 체제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 시스템에서 벗어날 길은 실은 없다. 그래서 세계는 저자에게 부조리하며, 저자는 그 부조리 속에서 자신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저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본연의 소임을 계속할 뿐. 그 정직성 때문에 저자의 책은 언제나 좋다. 불행에 대한 직시가 어설픈 환상보다 오히려 살아가는 데 더 큰 힘을 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저자로부터 배우는 것은 세계에 대한 저자의 해석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그 같은 정직한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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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로운 사회에서는 소유보다 공유가 더 가치가 크다고 리프킨은 주장하지만 오히려 정반대가 옳다. 공유 경제는 결국 삶의 총체적 상업화로 이어질 것이다.
제러미 리프킨이 찬양하는, 소유에서 "접속(이용)"으로의 이행은 우리를 자본주의로부터 해방하지 못한다. 돈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공유에 접속하지도 못한다. 접속의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 "반옵티쿰(추방을 뜻하는 독일으 Bannen과 제러미 벤담이 거론한 원형 감옥 판옵티콘을 합성한 신조어) 안에서 산다. (...) 모든 주택을 호텔로 변신시키는 공동체 장터 "에어비앤비"는 심지어 손님에 대한 환대를 경제화한다. 공동체 혹은 협력하는 평민의 이데올로기는 공동체의 총체적 자본화를 가져온다. 목적 없는 친절은 더는 가능하지 않다. 상호 평가 사회에서는 친절도 상업화된다. 사람들은 더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 친절해진다. 협력 경제의 한복판에서도 엄격한 자본주의 논리가 작동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아름다운 "공유"의 질서 안에서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본주의가 공산주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완성에 이른다. 상품으로서의 공산주의야말로 혁명의 종말이다. p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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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성장은 실은 암 덩어리들의 목표 없는 번성이다. 지금 우리는 죽음 도취를 방불케 하는 생산 및 성장 도취를 체험하고 있다. 그 도취는 생기인 척하면서 다가오는 치명적 파국을 은폐한다.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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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자본은 성장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더 많은 자본은 더 적은 죽음을 뜻한다.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자본이 축적된다. 자본은 흘러간 시간으로도 해석된다. 무한한 자본은 무한한 시간의 환상을 산출한다. 시간은 돈이다. 한정된 수명 앞에서 사람들은 자본 시간을 축적한다.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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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이 신에 씌듯이, 자본주의는 죽음에 씌어 있다.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이 자본주의를 추진한다. 자본주의의 축적 및 성장 강박은 임박한 죽음 앞에서 깨어난다. 그 강박은 생태적 재앙뿐 아니라 여러 정신적 재앙도 불러온다. 파괴적 성취 강박은 자기주장과 자기파괴를 하나로 합친다. 사람들은 자신을 죽도록 최적화한다. 무자비한 자기 착취는 정신적 붕괴를 불러온다.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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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삶을 죽인다. 치명적인 것은 죽음 없는 삶을 향한 자본주의의 노력이다. 성과 좀비나 피트니스 좀비, 보톡스 좀비는 설죽은 삶의 모습들이다. 설죽은 자는 어떤 생기도 없다. 오로지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 있다. 건강 히스테리는 자본 자체의 생명정치적 모습이다.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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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긍정하는 것은 또한 죽음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부정하는 삶은 삶 자신을 부정한다. 오로지 삶에게 죽음을 되돌려주는 삶꼴만이 우리를 설죽은 삶의 역설로부터 해방한다. 우리는 죽기에는 너무 생기가 넘치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다.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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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반드시 필요한 것은 데이터 전체주의를 피하기 위한 새롭고 근본적인 사유의 실마리다. 일정한 범위의 개인 관련 데이터에 만기를 부여하여 시간이 지나면 그 데이터가 자동으로 소멸하는 것도 구체적인 기술적 가능성과 더불어 숙고되어야 한다. 이 조치는 막대한 데이터 감축을 유발할 텐데, 그런 감축은 오늘날의 데이터 광기를 고려할 때 반드시 필요하다.
디지털 기본권 헌장만으로는 데이터 전체주의를 막을 수 없다. 더 나아가 의식과 태도의 변화를 일으킬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단순히 낯선 세력이 조종하는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인 혹은 희생자에 불과하지 않다.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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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새삼 진지하게 자문해야 할 듯하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인격체에 대한 총체적 감시와 착취에 내맡기고 우리의 자유와 존엄을 포기하고자 하는가? 다시 함께 저항을 조직할 때다. 이번엔 성큼 다가온 디지털 전체주의에 맞선 저항이다.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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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는 긍정 사회다. 사물이 모든 부정성을 떨쳐버릴 때, 매끄러워지고 평평해질 때, 자본과 소통과 정보의 원활한 흐름에 저항 없이 편입될 때, 사물은 투명해진다. 행위가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과정에 예속될 때, 행위가 고유한 특이성을 내려놓고 오로지 가격으로 자신을 표현할 때, 행위는 투명해진다. 그림이 모든 해석적 깊이를, 한마디로 의미를 벗어던지고 포르노처럼 될 때, 그림은 투명해진다. 특유의 긍정성을 띤 투명사회는 같음의 지옥이다.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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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혁명이 일어난 후인 지금은 우리는 주권의 정의를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할 성싶다. '주권자는 연결망 안의 댓글 폭탄들에 대한 처분권을 가진 자다.' 그러나 주권의 정의를 이렇게 수정하는 것은 실은 주권의 최종적인 종말, 정치의 종말을 의미한다.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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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혼자서는 의미를 산출하지 못한다. 수집된 데이터는 다음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나는 누구일까? 휴대용 고해소인 스마트폰은 자기 인식을 제공하지 않으며 진실에 접근할 길도 열어주지 않는다.
데이터가 아무리 방대하더라고, 데이터만으로는 인식을 산출할 수 없다. 데이터는 성과와 효율을 벗어난 질문들에 답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데이터는 맹목적이다. 데이터 혼자서는 의미도 진실도 산출하지 못한다. (...) 우리는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우리는 거의 자동화된 과정들에 내맡겨진 채로, 그 목적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우리 자신을 최적화한다.
데이터-앎은 제한적이며 초보적인 형태의 앎이다. 데이터-앎은 인과관계조차도 밝혀내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은근히 절대적인 앎처럼 행세한다. 그러나 실제로 빅데이터는 절대적인 무지와 짝을 이룬다. 빅데이터 속에서 방향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
데이터주의는 필시 허무주의와 짝을 이룬다. 데이터주의는 의미와 맥락을 포기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데이터가 의미의 공허를 채워야 한다고 데이터주의자는 믿는다. p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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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해자들은 흔히 우울증과 불안장애에 시달린다. 죄책감과 부끄러움, 손상된 자존감이 자해자들을 괴롭힌다. 내면의 지속적인 공허감은 그들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몰아간다. 상처를 낼 때 비로소 그들은 아무튼 무엇이라도 느낀다. p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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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지각의 치명적인 귀결은 타인이 사라지는 것이다. 자아와 타인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자아가 확산하고 불분명해진다. 안정된 자아는 타인 앞에서 비로소 발생한다. 반면에 과도한 자기 관련, 나르시시스적 자기 관련은 공허감을 낳는다. 나는 자아에 빠져 익사한다. (...)
진정성은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생산 전략이다. 나는 나 자신의 경영자로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생산해야 한다는 강제에 예속된다. 자기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면도날을 움켜쥔다. (...)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상처 내기는 자기를 벌하는 리추얼이기도 하다. 자해의 바탕에 깔린 자존감 부족은 우리 사회의 보편적 보상위기를 상기시킨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이 필요하다. 타인의 사랑이 비로소 나를 안정화한다. 반대로 나르시시스적 자기 관련은 나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
나는 자존감을 스스로 생산할 수 없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칭찬하고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타인들의 보상에 의존하여 자존감을 얻는다. 인간의 나르시시스적 개별화, 타인의 도구화, 그리고 총체적 상호경쟁은 보상 풍토를 파괴한다. (...)
성과 주체는 영구적인 결핍감과 죄책감 속에서 산다. 그는 타인들과 경쟁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과 경쟁하므로 자신을 능가하려 애쓴다. p7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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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형태의 부상을 기피한다. 사랑도 기피된다. 사랑에 빠지는 것 자체가 너무 심각한 부상일 터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며 큰 판돈을 걸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아픔과 부상을 주는 상실이 두렵기 때문이다.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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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에는 해독해야 할 것이 전혀 없다. 제푸 쿤스는, 자신의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이 단지 "와우"라는 외마디 감탄사만 뱉어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미술 앞에서 판단, 해석, 숙고는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의 미술은 어떤 깊이도, 어떤 얕음도 없이 자신을 소비의 대상으로 내놓는다. p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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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옷은 글을 에로틱하게 만든다. 요컨대 옷은 아름다움에 본질적이다. 은폐 기술은 해석을 에로틱한 활동으로 만든다. 그 기술은 텍스트에서 얻는 쾌락을 극대화하고 읽기를 성행위로 만든다.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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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 가치를 지녔던 예전의 인간 얼굴은 오늘날 사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페이스북 시대는 인간 얼굴을 페이스로 만든다. 페이스의 알파요 오메가는 전시 가치다. 페이스는 바라봄의 아우라가 없는, 전시된 얼굴이다. 그것은 인간 얼굴의 상품 형태다. 바라봄에는 내면성, 겸양, 거리 두기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 바라봄은 전시될 수 없다. 얼굴이 상품화되어 페이스가 되려면, 바라봄은 파괴되어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서 뛰어오르는 이유를 전시 가치에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회상 예식이 기념하는 순간 혹은 사건은 사라진다. 모두가 앞으로 나와 자기를 전시한다. 나는 상표처럼 두드러져야 한다. 그리하여 사진은 세계를 상실한다. 세계는 자아의 아름다운 배경으로 전락한다.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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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은 오늘날 모든 것을 굴복시킨다. 평생 가치란 고객인 한 인간이 살아갈 인생의 모든 순간이 상업화될 때 그 인간으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가치의 총액을 말한다. 여기에서 인격체는 고객 가치 혹은 시장 가치로 환원된다. 평생 가치라는 개념의 바탕에는 인격체 전체, 인격체의 삶 전체를 순수한 상업적 가치로 번역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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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는 타자 지배를 통해 다스려지는 사회를 비판했어요.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가 착취당하죠. 그리고 이 타자 착취는 생산이 특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한계에 봉착합니다. 반면에 오늘날 우리가 자발적으로 예속되는 자기 착취는 전혀 달라요. 자기 착취는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붕괴할 때까지 자발적으로 착취해요.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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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철저히 생산을 지향하는 사회, 철저히 긍정성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삽니다. 이 사회는 생산과 소비의 순환을 가속하기 위해 타인 혹은 이방인의 부정성을 없애죠. 오로지 소비 가능한 차이들만 허용돼요. 다름을 빼앗긴 타인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소비할 수만 있죠.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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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서사적 긴장만이 느낌을 산출합니다.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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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를 따지면 이 사회는 중세 봉건 체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농노의 처지예요. 페이스북을 비롯한 디지털 영주들은 우리에게 농지를 주면서, 너희가 무료로 받은 땅을 일궈라, 라고 말해요. 그리고 우리는 미친듯이 그 땅을 일구죠. 결국엔 영주들이 와서 농작물을 가져갑니다. 이것이 소통 착취입니다. 우리는 서로 소통해요. 그러면서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죠. 하지만 영주들은 우리의 소통을 기반으로 돈을 법니다. 또 정보기관은 우리의 소통을 감시해요. 이 시스템은 극도로 효율적입니다. 저항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를 착취하는 시스템 안에서 살기 때문이에요.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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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아요. 제가 보기에 세상은 아주 부조리해요. 부조리한 세상 안에서 행복할 수는 없죠. 행복을 위해서는 많은 환상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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