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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철학, 심리

선불교의 철학 / 한병철 __ 허무주의가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최고의 긍정

by 릴라~ 2024. 2. 25.

불교의 무나 공 같은 개념을 이처럼 개념적으로 엄밀하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니. 비어 있음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무한한 개방성이자 세계에 대한 최고의 긍정이다. 서양철학과 종교는 존재의 유한성을 영원성과 무한성을 지닌 신에게 귀의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지만, 여기엔 유한성에 대한 부정의 정신이 깃들 수밖에 없다.

 

반면 선불교는 유한성 그 자체를 개인의 욕망과 의지가 얽히지 않은 맑은 눈으로 거울처럼 바라보고, 덧없는 사물들 곁에 머무르며 자기 자신도 덧없이 지나가게 한다. 그 덧없음과 함께 하고 덧없음 속에 머무르며 그 속에서 깊은 슬픔을 경험한 이가 지닌 것은 모든 존재자와 세계에 대한 친절이다. 저자는 그것을 사교적 친절과 대비하여 태고의 친절이라 부른다. 두 번 읽었는데, 책 사서 한 번 더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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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의 철학은 선불교에 들어 있는 철학적 힘을 개념을 가지고 전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획이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은 아닙니다. 선불교의 수행이 추구하는 존재 경험 혹은 의식 경험은 개념의 말로 완전하게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불교의 철학'은 이런 말의 궁핍을 특정한 의미와 말을 전략적으로 사용해 극복하고자 합니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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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이렇게 불교를 해석할 때의 문제점은 불교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론적이면서 신학적인 개념들, 즉 실체, 존재자, 신, 권력, 지배와 창조 개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무는 '실체'와는 전혀 다릅니다. 무는 '자기 속에(그 자체로) 존재하지도' 않고, '자기 속에 머물면서 지속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무는 마치 자기 속이 비어 있는 것 같습니다. (...) 불교의 무는 '세계를 통치히고 모든 것을 합리적 연관에 따라 생겨나고 생성하게 하는' '실체적 권력'으로 규정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무가 뜻하는 것은 아무것도 주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는 주인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무에서는 '주권'과 '권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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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무에 '배타적 주체성' 혹은 '의식적 의지'가 없다는 사실은 채워져야 할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불교의 고유한 강점을 나타냅니다. '의지' 혹은 '주체성'의 부재야말로 평화로운 불교의 토대입니다. (...) 무는 "영향을 미치는 권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무는 아무것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 불교의 근본은 비어 있는 중심일 것입니다. 그런 중심은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고, 권력자에 의해서 점령되지 않았습니다. '배타적 주체성'이 없이 이렇게 비어 있는 상태야말로 불교를 친절하게 만듭니다. '근본주의'는 불교의 본질과 모순될 것입니다. p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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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의 세계는 '이유' 없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신의 '음악'이 전혀 없어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더 주의 깊게 듣는다면, 하이쿠도 '음악적이지' 않습니다. 욕구(욕심)가 없는 하이쿠는 기도 혹은 그리움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리하여 하이쿠는 담백하게 들립니다. 이렇게 강력한 담백함이 하이쿠의 깊이를 이룹니다.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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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고''춤추고''노래하고' 혹은 '경외감에 사로잡혀 무릎을 꿇을'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신과의 대면을 선불교는 모릅니다. 오히려 '일상의 정신'의 자유는 무릎을 꿇지 않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산처럼 굳건하게 앉는 것이 선불교의 정신 태도일 것입니다. p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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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에 따르면 신에게 다가가려는 의지와 욕망은 모두 신성을 빗맞힙니다. 영혼의 근본 특징이 의지라고 한다면, 그 영혼은 바닥(근거)으로 가야만 할 것입니다. 오로지 영혼이 자기를 죽이는 "영혼의 바닥에" 신이 있습니다. "태연하게 떠남"은 이렇게 영혼이 바닥으로 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이 뜻하는 것은 알거나 가지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 "가난한" 삶입니다. (...) 인간이 바닥(근거)을 향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의지로 드러나는 근거 속으로 인간이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선불교의 무는 바로 의지의 차원마저 떠납니다. p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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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는 모든 자기도취적 자기 관련성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내가 '결합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나의 자아가 되비칠 건너편의 신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신'도 자아를 복구하거나 복원하지 않습니다. 비워진 마음에는 자아의 경계가 없습니다. 특히 선불교의 비어 있음은 자기를 향해 자기도취적으로 되돌아가는 모든 형식을 거부합니다. 비어 있음은 자아를 비추지(조명하지) 않습니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영혼은 바닥으로 가긴 합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선불교에서처럼 완전하게 자기를 죽이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할 자신의 '무아경', 즉 기이한(비범한) '망아'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깨달음은 평범한(일상적인) 것으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깨어난 사람들은 특별한 저기가 아니라, 오히려 아주 오래된 여기(이곳)에, 즉 깊은 내재성에 도달합니다. "일상의 정신"이 거주하는 공간은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신의 "황야"도 아니고, '초재성'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양한 세계입니다. 선불교에는 여기(이곳)에 대한 근원적 신뢰, 즉 세계에 대한 근원적 신뢰가 깃들어 있습니다. (...) 선불교는 세계로부터 도망치는 법도 세계를 부정하는 법도 모릅니다. "성스러운 것은 없습니다"라는 선불교의 가르침은 특별하면서 초현세적인 장소를 모두 부정합니다. 그 가르침은 일상의 여기에로 다시 뛰어드는 거을 표현합니다. p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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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움을 가장 잘 표현하는 "커다란 웃음"은 해방된 정신을 가리킵니다. (...) 월산은 욕구, 욕망, 집착, 경직, 고집 모두를 웃음으로 날려버리면서 자기를 해방하고 무한히 개방합니다. 월산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한되거나 방해받지 않습니다. 월산은 그의 마음을 웃음으로 비웁니다. 커다란 웃음이 흘러나오는 정신은 경계를 가지지 않고, 비어 있고, 내면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 월산은 자라투스트라에게 영웅적 웃음도 웃음으로 날려버려야 한다고, 웃음으로 일상의 평범한 것으로 되돌아와야 한다고 조언할 것입니다. p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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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의 일상 시간은 걱정 없는 시간입니다. 그런 시간은 "최고"의 시간이면서 "결단의 시선"인 "순간"을 모릅니다. 굳센 영웅적 자아의 일상 시간의 "속박"을 끓는 순간을 말이죠. (...) 선불교의 일상 시간은 "순간" 없는 시간이거나, 일상적인 것의 순간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시간은 "순간"을 강조하지 않아도(굳센 "순간" 없이도) 잘 갑니다. 선불교의 일상 시간은 사람들이 일상적인(익숙한) 것을 바라보며 그때그때마다 머무르는 곳에서 잘 갑니다. (...)

 

깨달음은 일상적인 것으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특별한 저기를 찾아나서는 모든 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합니다. 일어나야 할 일은 익숙한 여기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p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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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정신이 깨어있는 곳에서는 "나날이 좋은 날입니다." 잘 간 날은 자기 속에서 머무르는(쉬는) 깊은 일상이자 온전한 날입니다. 익숙한(평범한) 것과 아주 오래된 것을 반복하면서 낯선(비범한) 것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토리(깨달음)는 독특한 반복에 이릅니다. 그런 반복의 시간은 걱정 없는 시간이고 "좋은 시간"을 약속합니다. p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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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비어 있음은 개별적인 것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의 관점에서는 개개의 존재자가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빛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주인 행세를 하지 않습니다. 달은 물에 친절합니다. 모든 존재자는 스스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다른 것을 방해하지도 않으면서 서로의 속에 거주합니다.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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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선불교의 비어 있음(공) 혹은 무는 존재자를 단순히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허무주의 혹은 회의주의를 나타내는 표현도 아닙니다. 오히려 공과 무는 존재를 최고로 긍정합니다. 실체의 경계를 만드는 것만을 부정하고, 대립의 긴장은 조성합니다. 공의 개방성, 즉 친절은 개별 존재자가 세계 '속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세계를 있는(세계를 있게 하는) 것도 뜻합니다. 게다가 친절은 개별 존재자가 자기의 깊은 차원에서 모든 다른 사물을 내쉬는(내뿜는) 것 혹은 그것들에게 머물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도 뜻합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사물에 세계 전체가 거주합니다.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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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이데거에게도 비어 있음은 그저 무엇인가가 부재하는 상태와는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비어 있음은 역동적 생기를 표현합니다. 그런 생기는 자기 자신을 '어떤 것'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거기 임해 있는 모든 것을 지탱하면서 영향을 줍니다. 생기는 모든 것의 분위기를 규정하고, 그 주위에 펼쳐지고,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통일된 소리로 울리게 합니다.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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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음 자체는 '보이지 않긴' 하지만, 모든 보이는 것을 두루 빛나게 하고, 현존하는 것으로 하여금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비로소 나타나 빛나게 합니다. 모으면서 분위기를 속속들이 규정하는 비어 있음은 장소에게 내면성, 즉 목소리를 마련해줍니다. 비어 있음은 장소에 영혼을 불어넣습니다. 이렇게 모으는 힘으로부터 하이데거는 장소를 파악합니다.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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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의 공은 하이데거의 비어 있음보다 더 비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에는 영혼도 목소리도 없다고 말입니다. 공은 '집중'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흩어져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공에는 하나의 특이한 집중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내면성 없는 집중이고, 목소리 없는 분위기입니다. p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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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는 무가 존재보다 "더 간단하고 더 쉽다고" 여깁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 의지, 혹은 무에 저항하거나 무를 견디려는 충동이 필요합니다. 이런 존재 능력의 핵심은 자기를 좋아하는 것, 즉 "자기를 성취하려는" 의욕입니다. 그리하여 존재는 원함의 구조를 가집니다. 그런 원함은 자기를 원하기에 자기와 관계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육체와 영혼을 벗어던지기를 요구하는 도겐이 가리키는 존재는 의지 혹은 욕구를 근본 특징으로 가지지 않습니다. 선불교의 수행은 마음에 완전히 다른 존재가 도달할 때까지 마치 마음을 굶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 다른 존재는 아페티투스가 없이 있습니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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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자기 자신의 무상함을 인식한 사람만이 그 무상함 속에서도 영원한 보석을 봅니다." 거울은 자기 속이 비어 있습니다. 거울은 굶으면서 아무것도 잡지 않습니다. 거울은 내면성, 즉 욕구 없이 비춥니다. 영혼이 욕구의 기관이라면, 거울은 영혼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거울은 아무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도 아니기 때문에 거울은 자기를 방문하는 존재자 모두에게 다정하게 대합니다. 그리고 마치 객정과 같이 됩니다. 비어 있음에 근거한 거울은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습니다. p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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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진 정신은 내면을 가지지 않는 각성과 집중 상태에 이르러야 합니다. 아마도 사토리는 꽃이 피는 것과 같은 정신의 상태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정신은 마치 자기를 넘어서 피어나는 것과 같고, 빛과 화려한 색으로 완전히 이행하는 것 같습니다. 깨달은 정신은 꽃 피는 나무로 있습니다. 사토리는 "자아"나 '내면성'과 다른 것이지만, '외면성' 혹은 '자기소외'를 뜻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토리는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넘어섭니다. 내면성이 제거된 정신은 차이를 두지(차별하지) 않습니다. 정신이 친절해지는 것입니다. p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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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걱정입니다. 내가 존재할 때 중심이 되는 것은 나의 존재입니다. 걱정은 이렇게 나(자기)와 관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행동할 때 나는 세계를 나의 존재 가능성과 관련해서 바라봅니다. 세계를 향한 시선은 비어있지 않습니다. 그 시선은 나의 존재 가능성으로, 다시 말해서 자아로 채워져 있습니다. (...) 그리하여 내가 나 자신을 위해 기획하는 존재 가능성들은 세계를 엮습니다(구성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세계에 비로소 하나의 의미, 즉 하나의 방향을 마련해줍니다. 존재 가능성의 기획은 욕망을 전제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원해서) 존재 가능성을 기획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근원적 의지(욕망)가 없으면 세계는 나를 위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욕망, 즉 아페티투스는 나의 세계가 비로소 있게 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욕망하는 것을 뜻합니다.걱정이 궁극적으로 뜻하는 것은 이렇게 욕망하는 존재와 다르지 않습니다. 걱정은 자기를 향해 실존하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

 

"자기를 향함"과 "자기를 향해"는 장래(미래)의 근본 특징입니다. 미래는 자기를 원하면서 기획하는 것으로부터 솟아납니다. 미래의 "우위"는 자기의 우위를 가리킵니다. 자기에 대한 걱정은 시간을 자기의 시간으로 표현합니다. 그런 걱정은 특히 미래와 관계합니다. 미래는 마치 시간의 우두머리 같습니다. 그와 반대로 걱정 없는 시간은 현재에 그때그때마다 머무를 것입니다. p9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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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이 없는 사람은 내가 있음(나의 존재)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는 계속 동일하게 있으려 하지 않고 만물의 운행에 맞춰 변합니다. 그의 아무것도 아니면서 자기(자아)가 없는 자아는 만물의 비침과 비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는 만물의 빛 속에서 빛납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두 가지 영혼 때문에 고뇌하는 파우스트에게 바쇼는 어쩌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의 영혼을 잘라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매화가 피게 하십시오!" p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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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 혹은 선불교의 시들도 '영혼'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아무도 아닌 사람의 의견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견에는 어떤 내면성도 없습니다. 어떤 '서정적 자아'도 자기를 표현하지 않습니다. 하이쿠에 등장하는 사물은 아무것에도 강요되지 않습니다. 사물로 흘러넘쳐서 그것을 비유 혹은 상징으로 만드는 '서정적' 자아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이쿠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 빛나게 합니다. 아무것에도 강요되지 않는 상태가 하이쿠의 근본 분위기를 형성하고, 시인의 굶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아무도 아닌 그런 마음에 세계가 비칩니다.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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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는 내부로 향해 있지 않습니다. 하이쿠에는 '깊은 의미'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깊은 의미'가 없는 것이야말로 하이쿠의 깊이를 이룹니다. 깊은 의미의 부재는 영혼과 같은 내면의 부재에 상응합니다. 하이쿠의 밝은 개방성과 광대함은 내면성이 제거되어 비워진 마음으로부터, 즉 내면성 없는 무아의 집중으로부터 솟아납니다.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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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바쇼의 슬픔에는 '멜랑콜리(우울)'의 짓누르는 무거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슬픔은 명랑성으로 맑(밝)아집니다. 이렇게 밝고 명랑한 슬픔은 그의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고 이별하는 마음의 근본 분위기입니다. 그런 슬픔은 폐쇄된 슬픔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폐쇄된 슬픔이란 애도의 형식으로 이별과 덧없음을 애써 제거하고 그 시간을 밀어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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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거주하지 않는 방랑은 모든 형태의 집착을 떠납니다. 그런 방랑은 세계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는 것은 동시에 자기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변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놓는(떠나는) 것, 자기를 버리는 것, 덧없는 것의 한가운데에서 자기도 덧없이 가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놓는 태연함(이렇게 태연하게 떠나는 것)이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는 마음의 구조입니다. 방랑은 방랑하면서 자기를 떠나는 것도 뜻합니다.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는 인간은 자기 집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자신의 집에 손님으로 있습니다. 모든 형태의 소유와 자기 소유가 포기됩니다. 몸도 정신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p11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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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재는 세계를 자기와 그의 존재 가능성과 관련해서만 알아봅니다. "세계 속 존재"는 결국 자기 집에 존재하는 것을 뜻합니다. "걱정"은 자기에 대한 걱정이고, "실존에 대한 범주"로 이해된 집의 구조(본질)일 것입니다. 걱정은 세계 속에 존재함에 깃들어 있습니다. 현존재는 방랑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는 마음은 주체와 대조됩니다. 주체는 끊임없이 자기로 되돌아오는 것을 근본 특징으로 합니다. 주체는 항상 자기 집에 있습니다. 주체가 세계로 향하는 것은 다시 자기를 향하는 것입니다. 세계로 향할 때 주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한 걸음도 멀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앎에서 주체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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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쇼는 방랑하면서 자기와 재산을 버립니다. 바쇼는 경제적 실존을 완전히 폐기합니다. 바쇼의 방랑은 약속된 미래를 향하지 않습니다. 방랑의 시간성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바쇼는 그때그때마다 방랑하고, 그때그때마다의 한계에 머무릅니다. 그의 방랑에는 목적론적이거나 신학적인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바쇼는 항상 이미 도착해 있습니다. 펄럭이는 옷을 입고 이렇게 방랑하는 승려는 일반적으로 오디세우스와 아브라함과 반대되는 인물일 것입니다. 바쇼는 방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으려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반대로 오디세우스가 헤매는(방랑하는) 것은 귀향을 위해서입니다. 오디세우스는 방향을 가지고 헤맵니다. 아브라함도 방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세와 마찬가지로 약속된 집으로 가는 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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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거주하지 않음(무주)은 거주의 긍정을 함축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긍정된 거주는 어디에도 있지 않음 혹은 비어 있음에 대한 부정, 즉 죽음을 통과했습니다. 세계는 '내용적으로' 같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마치 비어 있음만큼 더 가볍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비어 있음은 거주를 방랑으로 만듭니다. 그러니까 무주는 집과 거주를 단순히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거주의 근원적 차원을 개방합니다. 무주는 자기 집에 있지 않은 채 거주하게 합니다. 그런 무주는 자기를 자기 안에 살게 하지도 않고, 자기와 자기의 재산에 집착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무주는 집을 개방하고, 집에 친절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그렇게 해서 집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게 되고, 비좁은 내부와 내면성을 버립니다. 내면성이 제거된 집은 객정입니다. p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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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는 죽음을 마음에 두어야만 합니다. 철학에 대한 걱정은 죽음에 대한 걱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철학자는 살면서 이미 죽어야만 하고, 살아서 죽음을 앞당겨야만 합니다. 악과 유한성의 장소인 몸을 멀리하고 경멸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넘어지고 전복되는 종착점이 아니라, 오히려 특수한 시작과 출발점입니다.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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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것 사이를 방랑하면서 잇사는 덧없이 지나가는 사물들과 보조를 맞춥니다. 잇사는 덧없는 내재성을 극복하는 대신, 그 속에 머무릅니다. 잇사는 마치 사물들과 친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는 함께 덧없이 지나가고, 자기도 덧없이 지나가게 합니다. 이렇게 독특한 태연함 속에서 유한성은 스스로 밝습니다. 유한성은 무한한 것의 영광과 영원성의 광휘 없이도 빛납니다. 잇사의 문장을 주의 깊게 들으면, 거기에 확실히 들어 있는 슬픔은 명랑함에 가깝습니다. 그런 슬픔은 자유롭고 명랑한 슬픔이고, 트여서 개방적인  슬픔입니다. 이런 명랑함은 깊은 슬픔을 모르는 즐거움과 다릅니다. p1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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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덧없음 자체를 보는(경험하는) 것은 자아가 없는 상태(무아지경)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덧없음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굳센 자아가 형성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크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자아(나)를 끝내는 나의 죽음에 맞서 나를 마치 자라게 하는 것 같습니다. 죽을 운명을 다르게 경험하면 "덧없음으로 깨어납니다". 그렇게 깨어난 사람들은 자기를 덧없이 지나가게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죽음을 주는 곳에서, 즉 사람들이 자기를 제거하는 곳에서 죽음은 더 이상 나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런 죽음 자체는 더 이상 극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나의 죽음에 더 이상 묶여 있지 않습니다. 태연함이, 즉 죽음을 향한 자유가 깨어납니다. (...) 여기서 죽음은 자아로 존재하는 탁월한 방식이 아니고, 오히려 자아가 없는 상태로 깨어나서 자아(나)로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가능성입니다. p14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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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에 찾아올 죽음은 '작은' 죽음일 것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큰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큰 죽음은 죽어서 자기를 떠나는 모험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큰 죽음은 자아를 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큰 죽음은 자아를 트고 개방합니다. 자아는 자기를 드넓은 세계로 채우면서 자기를 비웁니다(제거합니다). 이렇게 독특한 종류의 죽음은 드넓은 세계로 채워진 자아, 즉 자아 없는 자아가 생겨나게 합니다.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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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죽지 않는 한, 다시 말해서 '죽음'과 '살'이 대조를 이루는 한, 산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있습니다. '죽음'을 죽이고 나서야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살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삶'과 다른 것으로 응시하지 않는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삽니다. 전체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영원함' 혹은 '불멸'과 비교되지 않고, 오히려 전체적으로 죽어 있는 것과 일치합니다. 

 

죽음은 더 이상 재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미 큰 죽음의 카타스트로페를 뒤로 하기 대문입니다. 아무도 죽지 않습니다(무아가 죽습니다). 선불교적으로 뒤집어진 죽음은 애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뒤집기는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뒤집기는 죽을 운명에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마치 내부로 뒤집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죽으면서 죽습니다. 이렇게 독특한 종류의 죽음은 재앙에서 벗어나는 다른 가능성일 것입니다. p15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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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음의 들(빈터)에서는 딱딱한 경계가 생기지 않습니다. 홀로 고립되어 불변하는 것도 없습니다. 만물은 서로 맞대고(비비고) 서로 비춥니다. 비어 있음은 자아를 내면화하지 않고, 레이 아미카이(친구의 것)로 만듭니다. 친구의 것은 객정처럼 개방적입니다. 인간이 함께 존재하는 것도 이런 친절로부터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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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말하는 죽음을 무릅쓰는 것은 선불교의 "큰 죽음"과 전혀 다릅니다. 크게 죽은 사람은 자아가 없는  상태로 깨어납니다. 그와 반대로 죽음을 무릅쓰는 것은 다른 사람을 완전히 배제하는 굳센 자아의식에 묶여 있습니다. 영웅적 자아는 미소 짓지 않습니다.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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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친절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자기를 알리기 위한 교제용 친절과 다릅니다. 교재에서 '친절한' 말은 다른 사람이 방해받지 않은 채 자기를 비추는(조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말입니다. 교제용 친절의 중심에는 자기가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태고의 친절은 자기가 없는 상태에 근거합니다. 태고의 친절은 사람들이 자기 내부를 지키거나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친절과도 다릅니다. 이런 보호용 친절과 정반대로 태고용 친절은 무한한 개방성으로부터 솟아납니다.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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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친절에서 솟아나는 공감(연민)은 평범한 '동정'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 공감의 대상은 함께 살아가는 인간만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 일반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공감은 심리적 동일시, 혹은 '감정이입'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친절의 공감은 심리적 동일시를 매개로 함께 슬퍼하거나 기뻐할 자아를 모릅니다. 모든 '감정'이 '주체'에 묶여 있다고 한다면, 공감은 '감정'이 아닐 것입니다. 공감은 '주관적' 감정도 아니고, '경향'도 아닙니다. 공감은 나의 감정이 아닙니다. 아무도 느끼지 않습니다(무아가 느낍니다). 공감은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 공감은 친절합니다. (...) 이는 가령 숨 쉬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숨을 쉬는 것이 그와 그의 동의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 친절한 함께함은 자기가 공감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할 자아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 친절한 함께함은 차별하지 않는 혹은 똑같이 대한다는 근원적 상태에 뿌리를 둡니다. 친절한 함께함은 증오와 사랑으로부터도 자유롭고, 호의와 혐오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p17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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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의 비어 있음은 부버가 말하는 사이와 많은 점에서 다릅니다. 비어 있음은 나도 너도 없는 무차별적 장소입니다. 그와 반대로 사이는 비어 있음만큼 비어 있지도 개방적이지도 않습니다. [나와 너의] 사이는 나와 너가 굳게 자리한 두 개의 극점에 의해 둘러싸여 있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관계 혹은 "만남"은 개별적 주체의 내면성의 바깥에서 일어나긴 합니다. 그러나 사이는 진해져서 내면성의 공간이 됩니다. 사이는 내부의 폐쇄성과 은밀성을 가집니다. 사람들은 사이가 영혼을 가진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앙산과 삼성의 대화는 은밀한 "대담"을 이루지 않습니다. 크게 "웃은" 것이야말로 사이의 모든 은밀성과 내면성을 열어젖힙니다.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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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부버의 해석에는 이론의 여지가 많습니다. 첫 번째 다른 견해는 불교가 인간의 내면성과 "속으로 굴절되어 돌아오는" "순수한 주체"의 독방을 모른다는 점입니다. 모든 것이 내면화되고, 즉 '영혼의 것으로 되어' 넣어질 독방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정신의 내면성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개방적이면서 친절한 정신은 항상 이미 바깥에 있습니다. (...) 태고의 친절은 부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태고의 친절은 차이가 없는 상태의 독특한 거대한 그것ES으로부터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그것은 부버가 말하는 그것-세계와 다릅니다. 거대한 그것은 관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내면성과 욕구를 가지지 않고 함께 존재하는 것을 말입니다.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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