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이 영화를 세 번 보게 되었다. 처음 보았을 땐 굉장히 강렬했으나 스토리 조각들이 완전히 맞춰지지 않았다. 한 번 더 보았을 때는 강렬함은 덜했지만 굉장히 재미있게 보았다. 전체 흐름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보았을 땐, 편안했으며 영화의 아주 작은 장치들도 눈에 들어왔고, 그리고 영상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마음 밑마닥에서 올라오는 어떤 느낌들이 있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영화다. (스포일러 있음)
김형경의 '사람 풍경'을 보면 ‘무의식을 산다’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 밑바닥의 무의식적 욕망이 우리를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세 살까지의 경험, 유년 시절의 경험을 어른이 되어서도 저도 모르게 계속 반복/재생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를 움직이는 많은 것들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에 그 틀이 형성되었고 그것을 평생 반복해서 산다는 거다. 그 틀이 곧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고 우리 자신으로 여겨져서 우리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할 뿐.
나 역시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는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여겼는데, 이제 돌아보니 나를 움직인 힘 중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훨씬 많았음을 인정하게 된다. 십여 년의 세월이 쌓이니 반복되는 패턴, 무의식적 방향이 보이는 거다. 그제서야 나라는 사람을, 예전보단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불가에서는 억지로 자기를 고치려 하지 말고 그 업식을 받아들이라고 하더라.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이 사춘기가 아닌 지금 이 나이에도 유효할 줄은 몰랐다. 삶의 매 단계마다 그 질문은 다른 차원에서 항상 우리를 따라다니는 게 아닐까 싶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 타인의 무의식에 생각의 씨앗을 뿌리고 그것이 자라도록 하여 그 사람의 본질까지 바꿔버리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코브, 아리아드네, 임스, 아서, 유서프 팀은 거대 기업의 상속자인 피셔의 꿈 속에 들어가 그의 무의식을 바꿔 놓으려 한다. 꿈, 꿈 속의 꿈, 그 끔 속의 꿈, 이렇게 3단계로 작업을 하여 그 사람의 생각을 뿌리채 바꿔놓으려는 시도다. 영화 속에서 코브 팀은 그 3단계에서 한 단계 더 밑으로 들어가 밑바닥에서부터 그의 생각과 욕망을 다른 식으로 건설하고자 한다. 그것이 ‘인셉션’이다. 꿈의 그 마지막 단계에는 인류의 가장 원초적이고 공통된 무의식 상태인 ‘림보’가 있다. 융의 ‘집단무의식’이 연상되었다.
인셉션 과정에서 주인공 코브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다이나믹하게 전개된다. 그의 무의식의 밑바닥에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결코 떠나지 않던, 그 자신 결코 놓을 수 없었던 아내의 모습이 현실의 아내의 그림자에 불과함을 깨닫고, 그 무의식 속 아내를 죽임으로써 비로소 현실에 돌아오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코브의 아내 멜을 통해서는 무의식 속에 심어진 생각의 씨앗이 한 사람을 파괴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의 생각이 나무처럼 자라고 자라서 그 사람의 일부가 되고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코브의 무의식은 지하 엘리베이터로 시각화되었는데 꽤 인상적이었다. 각 층마다 그의 비밀이 자리하고 있었고, 마지막 층에 가장 깊은 비밀이 있었다. 물론 이 영화는 무의식적인 모든 것을 아주 훌륭하게 영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음 속 마지막 비밀은 금고나 요새로 표현되었고, 그밖에 꿈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가능한 모든 것들을 잘 담아내었다. 건축, 설계와 관련된 상징이 특히 많이 등장하는데, 감독이 우리의 무의식이 일종의 구조물처럼 건설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사회 구조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가끔 그림을 볼 때 어떤 그림들은 우리가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무의식의 한 부분을 건드려주는 것 같은, 그래서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가는 통로가 열리는 것 같은, 그런 무한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을 한참 바라보노라면 뭔가 마음이 안정되고 자신의 내면이 통합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 영화은 그런 이미지들을 제공했다. 무의식에 닿는 것을 인적 없는 해변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한 부분이나, 아무도 없는 거대한 폐허로 묘사한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 마음속에 자리한 몇몇 원초적 이미지들도 떠올랐다. 워더링 하이츠에 나오는 바람 부는 언덕이라든지, 모래 바람만이 오가는 거대한 사막, 동굴 수도승들, 히말라야의 만년설, 아프리카 평원의 붉은 노을, 유목민들.....이 세상의 끝..... 가만 들여다보니 그 이미지들 속에 사람은 별로 없다. 요즘은 완전 사회화되어 그런 이미지가 떠오를 때도 잘 없는데, 이십대에 특히 많이 느꼈던 이미지다. 지금 내 사는 모습을 보면, 어쩌면 그 이미지들이 나를 끌어 온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의문도 가져보았다.
그런데 대체 이 이미지들의 출처는 무엇일까. 워더링 하이츠처럼 어린 시절 읽은 소설책을 통해 쌓여온 이미지일까, 아니면 옛날에 NHK에서 만든 실크로드를 넘 열심히 봤나. 내겐 남동생이 아래로 둘 있는데, 다 자라서는 생각하는 게 비슷해서 엄청 친하게 지냈지만, 터울이 많다보니 사춘기 시절엔 전혀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었다. 그 홀로성이 지속된 걸까. 어릴 때 책 좋아하는 애들이 흔히 그렇듯이 주변 친구들과 잘 놀면서도 마음 깊은 곳엔 대화가 섞이기 어려운 면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일상의 따스한 교감 대신에 저 먼 곳을 꿈꾸게 했을까. 아니면 그냥 단순한 호기심과 모험심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우연이든 필연이든 나의 현재의 삶의 모습 속엔 내 무의식적 소망이 투영되어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이 가능한 꿈의 밑바닥, '림보'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도 잘 느껴졌다. 영화에서 림보는 그냥 무의식이 아니라 현실과의 접점을 상실한 원초적이고 무한한 꿈의 바다로서 감독이 만든 개념이다. 프로이트식으로 보자면 우리 모두는 우리가 전능하다는 유아기의 환상을 지니고 있는데 림보는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그 환상 속에는 타인이 없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있을 뿐. 왕자병, 공주병처럼. 왕자병, 공주병 역시 유아기적 환상을 버리지 못한 성인의 생활 방식일 것이다.
현실과 연결된 몇 겹의 꿈을 통해서 이 영화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함을 잘 그려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를 통해 꿈이 아닌, 리얼하고 생생한 현실의 아름다움을 짙게 느꼈다. 주인공들이 비행기에서 눈을 뜨는 장면부터 공항을 빠져나와 집에 도착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물론 지난 과거가 우리에게 꿈처럼 다가오듯이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을,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도 상당히 불확실한 토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팽이가 계속 도느냐 멈추느냐 하는 부분은 논란이 되었는데, 내겐 큰 의미는 없었다. 감독이 여운을 주기 위해 만든 장치 정도로 다가왔다. 우리가 꿈속에 있는지 현실에 있는지, 혹은 진짜 현실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는지, 그런 다양한 화두를 던지는 장치 정도로 여겨졌다.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영화를 끝맺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선 정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내 무의식의 세계엔 어떤 욕망들이 자리하고 있을까.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기억과 상상에 의존해서 꿈의 세계를 설계한다. 기억과 상상. 사실, 기억이란 쌓이고 쌓여 우리의 무의식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므로 기억은 정확한 것이 될 수 없고, 그래서 지나간 모든 것은 어떨 땐 환영처럼, 꿈처럼 여겨지게 된다. 내 마음속에 자리한 누군가에 대한 기억 역시 코브가 그랬던 것처럼 실제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그림자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이 특정한 방식으로 만들어낸 그 사람에 대한 환상이란 의미이다. 실제가 아닌 그림자. 진짜 현실, 리얼한 현실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며, 지나간 모든 것도, 앞으로 올 모든 것도 어쩌면 환영일지도. 그림자를 버릴 것이 아니라 그림자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우리가 자신의 그림자들을 바라보고 이해할 때, 그 그림자들로부터 좀더 자유로울 수 있는 길도 열릴 것 같다.
무의식과 의식이 싸울 때는 무의식의 힘을 이기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의식 아래에 무의식을 위치시킨다. 프로이트 이래의 틀이다. 들뢰즈의 상반된 관점도 떠올랐다. 들뢰즈는 의식과 무의식의 틀을 허물고 무의식을 미세-지각으로 대체시킨다. 무의식이 새로운 신의 지위를 차지하고 해석의 근원이 되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그는 또한 보다 원초적인 무의식이 있음에도 반대했다(프로이트에게 그것은 성이 되겠다). 들뢰즈가 보기에 무의식은 서로 수평적인 다양한 욕망들의 관계로 정의되며, 어느 한 욕망이 초월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다양한 욕망들의 관계가 힘으로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무의식을 인식하는 통로로서 정신분석학에서는 꿈을 분석한다. 두 달 정도 내가 꾸는 꿈을 기록해본 적이 있다. 신기하게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잠을 청하면 꼭 꿈이 기억이 난다. 아는 분이 몇 번 분석해주셨는데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과 맥락을 연결해서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셨다. 귀찮아서 그 후론 기록을 말았는데, 다시 한번 기록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의식은 의식보다 조금 앞서 가므로 우리 삶의 에너지가 가는 방향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 잠에서 깨어 비행기에서 내린 코브가 공항을 빠져나오는 장면은 음악도 음악이지만 디카프리오의 눈빛이 정말 강렬했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자의 눈빛.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함이 절실하게 표현된 장면이었다. 나 자신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현실에서도 실제처럼 느끼는 편이라서, 자신의 무의식/과거/꿈을 극복하고 현실로 돌아온 그 장면에 마음이 간 것 같기도 하다. 혹자는 장자의 호접지몽을 떠올렸다지만, 나는 리얼한 세계로 돌아온 주인공을 축하했다. 물론 영화 역시 하나의 꿈이며 그런 의미에서 코브의 현실 역시 감독에겐, 우리에겐 하나의 꿈이므로, 호접지몽으로 생각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싶다.
지난 수천년 간 수많은 철학자들이 던졌던 질문. '무엇이 과연 실재인가?(What is real?')를 이 영화는 꿈/무의식의 대비를 통해서 다시 묻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내게 인셉션된 생각들은 무엇일까 그런 의문도 들었다. 아무튼 그런 생각의 씨앗들이 자라서 나를 규정하고 나의 본질을 형성했겠지. 놀란 감독의 상상력과 철학에 박수를 보낸다.
* 한스 짐머가 작곡한 엔딩 음악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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