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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기록/러시아

연해주에서 명멸한 이들을 기억하며 / 하바롭스크 (2)

by 릴라~ 2019. 1. 20.

이번 러시아 여행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인물이 있어요. 뜻밖에도 우리 여정 중에서 계속 마주친 인물, 누구일까요?

 

블라디보스톡에 새벽에 도착했기에 첫날은 공항에서 가까운 숙소를 잡았죠. 공항과 시내 사이에 있는 빌라 아르테 호텔입니다. 다음 날 시내로 가기 위해 호텔을 나서면서 호텔 바로 옆에 있는, 지금은 폐업한 식당 문 앞에 뜻밖에 한국말 표지판이 눈에 띄었습니다. 김정일 동지가 여기서 식사했다는 교시문이었어요.

 

우수리스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9시간을 달려 도착한 하바롭스크. 아무르강 우초스전망대에서 일몰을 바라보다가 전망대 입구에서 또 김정일이 다녀갔다는 표지판을 발견했어요. 또 하바롭스크 북한 식당에는 하바롭스크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방문한 장소가 지도에 표시되어 있었어요. 아무튼 이 하바롭스크는 김정일의 삶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김일성이 활동한 부대, 88국제여단의 거점이 바로 하바롭스크이기 때문이지요.

 

하바롭스크에 와서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인 88국제여단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우리 민족이 일본과 무장투쟁을 벌인 치열한 전장이 두 곳 있었습니다. 하나는 중국 타이항산 일대로 김원봉 계열의 조선의용대’(임시정부 광복군 산하)가 활약한 곳입니다. 조선의용대는 이후 김두봉 계열의 사회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화북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여 이 지역에서 일본군에 치열하게 맞섭니다. 

 

또 하나는 만주에서 싸운 동북항일연군이에요. 중국 공산당 휘하 부대로 김일성이 여기 소속이었죠. 동북항일연군은 일본의 위력으로 만주에서 더 버틸 수 없자 1940년부터 점차 소련 땅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우수리스크 인근 라즈돌노예에 남야영, 하바롭스크 인근에 북야영을 건설해 임시로 머무는데요. 소련은 장차 있을 일본군과의 전투에 대비해 이 두 야영을 통합하여 88국제여단을 창설합니다. 중국인, 소련인, 조선인이 연합한 부대였죠.

 

김정일이 태어난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라 해요. 북한은 그가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는데, 역사가들은 우수리스크 인근 라즈돌노예가 그의 출생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지만 만일 후자가 사실이라면, 우수리스크와 하바롭스크 일대는 김정일이 태어난 곳이자 어릴 때 자란 곳이니 그도 이곳을 한번쯤 와보고 싶지 않았을까 싶네요.

 

88국제여단의 전신이었던 동북항일연군의 참모장이 구미 출신 허형식 장군이에요. 허형식 장군은 왕산 허위 선생 일가로 허위 선생 사촌의 자녀입니다. 이 집안은 독립운동으로 유명하죠. 이육사의 어머니 또한 허위 선생 사촌의 자녀이고요. 이육사 시인의 '광야'에 나오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허형식 장군을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윤태옥이 쓴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동북항일연군은 1942년에 산하 4개의 영으로 조직이 개편되는데, 그때 김일성이 1영 영장이었으며 세 살 위인 허형식 장군이 3영 영장이었다 해요. 일본의 극심한 토벌 전쟁으로 부대원은 대부분 소련으로 넘어갔지만 허형식 장군은 만주의 백성들을 버려둘 수 없어 끝까지 만주에서 싸움을 이어나갑니다. 결국 남아 있었던 허형식 장군은 1942년 전사하고 소련으로 피신한 김일성 그룹은 살아남습니다. 88국제여단에서 김일성과 함께 있었던 김책, 최용건 등이 이후 북한 정권 수립의 핵심 세력이 되죠.

 

러시아에 와서 비로소 우리 독립운동사가 전체적으로 조망되었어요. 우리는 그저 독립을 맞이한 게 아니라 타국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버텼습니다. 국권 상실 초기엔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이상설, 이회영 등이 활동했고, 이후 상해 임시정부가 조직되었고, 임정의 외교노선에 반발한 이들은 다시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투쟁을 이어갔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국 타이항산과 만주 일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한국인은 독립을 쟁취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타이항산 일대를 마저 답사하면 독립운동의 조각조각이 거즌 맞춰지겠구나 생각했어요.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 독립운동이 아니라 독립투쟁 혹은 독립전쟁이라 해야 맞는 표현입니다. 

 

우리 독립투쟁가들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처럼 중국혁명에 뛰어들거나 김알렉산드라처럼 러시아혁명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도올의 중국 일기>에 따르면 연변의 조선족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자치권을 얻은 이유는 조선인들이 공산당혁명에 기여한 공이 크기 때문이라 해요. 하바롭스크에는 김유천 거리(김유경의 오기)’가 있어요. 고려인 2세 김유경은 1917년부터 러시아혁명에 적극 참여하여 소대장급 지휘관으로 활약하다가 1929년 백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습니다. 그 장소가 김유천 거리로 명명되었는데, 러시아 전역에서 조선인 이름이 붙은 거리는 이 하나뿐이라 해요. 그 장소가 어딘지 몰라 찾다가 알고 보니 숙소 바로 근처였어요. 하바롭스크에 있는 동안 날마다 그 거리를 지나간 셈이었죠.

 

조국 독립에 대한 소망으로 중국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참가한 수많은 이들은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어이 없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아리랑>의 김산은 중국에서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었고, 소설가 조명희 또한 하바롭스크에서 일제의 첩자로 몰려 처형당했다가 나중에 복권되죠. 나라 없는 설움이 이와 같았습니다. 뜻있는 많은 이들이 시대의 격랑 속에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 수밖에 없었어요. 

 

대한제국 마지막 외교관이자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인공 이위종도 거친 운명을 맞이합니다. 그의 부친은 러시아 공사였다가 을사늑약을 맞은 이범진인데요. 간도관리사였던 이범윤 장군의 사촌이기도 하죠. 이범진 공사는 을사늑약 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고군분투하지만 경술국치에 그만 절망하여 고종에게 편지를 남기고 자살하죠. 이범진의 아들, 헤이그 특사 임무엔 실패하지만 그의 열정적 목소리가 담긴 인터뷰가 서방 신문에 대서특필 되기도 했던 이위종은 경술국치 후 러시아로 귀화합니다. 그는 러시아군 장교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러시아 내전 때는 볼셰비키 편에 서서 이르쿠츠크 탈환에 공훈을 세우지만 1924년 이후 행보는 전혀 알려진 바 없습니다. 그의 형 이기종은 헤이그 특사 사건 후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앞서 세상을 떠나고 말아요. 

 

우리끼리 벌인 악몽 같은 사건도 있어요. 하바롭스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9시간 정도 더 가면 스보보드니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스보보드니는 바이칼 호수의 관문 이르쿠츠크와 하바롭스크 사이에 있는 도시로 러시아말로 '자유로운'이란 뜻을 지니고 있어서 '자유시'로도 불리죠.  1921년 이곳에서 독립운동 최악의 역사인 자유시 참변이 일어납니다. 겉으로는 우리 독립군과 소련군이 교전한 상황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끼리의 내분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사건이에요. 

 

당시 연해주 일대 한인 무장세력은 여러 경로를 거쳐 자유시에 집결합니다. 일본이 1920년 블라디보스톡과 신한촌을 습격하면서 소련 적군이 스보보드니로 후퇴할 때 함께 이동한 이만군도 있었고, 니콜라예프스크의 니항군도 자유시로 이동하죠. 한편 간도에서 활약하던 한인부대는 봉오동과 청산리대첩 후 일본의 반격이 거세지자 밀산에 집결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합니다. 소련은 아직 연해주에 있던 일본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들에게 무장해제를 하면 식량과 군복을 지급하겠다면서 자유시로의 이동을 권하죠. 김좌진, 이범석 등은 이를 거부하고 만주로 돌아가지만 홍범도 등은 자유시로 향합니다.

 

자유시로 집결한 이유는 독립군들이 힘을 모아 일본과 항전하여 소련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 받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이들 사이에 통솔권을 두고 내분이 일어납니다. 당시 연해주 한인들이 러시아혁명 성공 후 조직한 고려공산당은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상해파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하는 이르쿠츠크파로 노선이 갈라졌다 해요. 자유시에 집결한 여러 독립군 세력 중에서 상해파가 독립군 전체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이르쿠츠크파가 소련을 등에 업고 무장해제에 반발한 상해파를 공격한 사건이 자유시참변입니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독립군이 목숨을 잃고(수십 명에서 백여 명이 사살당하고 백여 명이 탈출 또는 자살로 추정) 전사자와 도망자를 뺀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어 이르쿠츠크로 이동합니다. 만주를 호령했던 봉오동 전투의 그 유명한 홍범도 장군은 이때 카자흐스탄으로 쫓겨나 극장 수위로 일하다가 해방 2년 전 그곳에서 세상을 뜨게 되죠. 청산리대첩에 참가했고 연해주에서 위상이 대단했던 대종교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 서일은 동료들이 죽은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합니다. 이 사건으로 독립운동은 동력을 상실합니다. 이후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사이가 갈라진 한 원인이 되기도 하죠. 

 

말 그대로 격변의 시기였어요. 일본 제국주의는 아시아 전역과 만주 일대까지 손을 뻗치고, 중국에서는 공산당 혁명이, 러시아에서는 러시아혁명으로 백군과 적군의 치열한 싸움이 시베리아에서 전개된 때였어요. 세계사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나라가 없다보니 독립군 세력도 이리저리 분열되었어요. 중국 국민당에 기댄 임시정부가 있었고, 중국 공산당에 기댄 세력이 있었으며, 볼셰비키 편에 선 세력도 있었습니다. 이 혼란의 와중에 비범한 길을 걸어간 인물들이 있었고, 슬프고 안타까운 죽음이 이어졌으며, 한인들간의 분열로 인해 일어나서는 안 될 참상도 벌어졌어요. 

 

그 모든 사람들의 희망과 절망, 위대함과 어리석음이 공존했던 땅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하바롭스크까지 9일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하바롭스크를 떠나는 날, 문득 우리 민족의 시원이 있다는 바이칼이 보고 싶어졌어요. 하바롭스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꼬박 이틀 반이 걸리는 곳. 그 호수의 푸른 품에 가만히 마음을 적시고 싶어졌습니다

 

 

*2018/7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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