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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다큐

다큐 - 볼링 포 컬럼바인

by 릴라~ 2004. 7. 12.

볼링 포 콜럼바인
감독 마이클 무어 (2002 / 미국)
출연 존 니콜스, 딕 클라크, 에릭 해리스, 찰턴 헤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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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믿을 것인가, 총을 믿을 것인가

 

마이클 무어. 감독 이름이 왠지 낯이 익다 했는데, 전에 읽은 <멍청한 백인들>의 저자다. 부시 대통령의 당선을 불법 선거로 규정하는 등 미국 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담고 있어 유쾌하게 읽었던 책. 

눈치 보지 않고,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단번에 핵심을 찔러대는 그의 재치 있는 문체에 나는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느꼈었다.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비난의 화살을 퍼부어대면서도 웃음으로 그것을 전달하는 그의 '건강함'이 나를 매료시켰다. 희망 없는 세계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외치고 행동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힘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그 스타일은 <볼링 포 컬럼바인>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경쾌한 그의 문체가 영화 편집에도 그대로 살아나,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웃음으로 줄곧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그 신랄한 조소 아래에 깔려 있는, 세상을 향한 그의 뜨거운 애정이었다. 그는 녹색당 랄프 네이더의 대표적인 지지자인 수잔 서랜든 같은 배우조차 침묵을 지키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반전을 외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조국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오늘날 이라크 주둔으로 대표되는 조국의 현실에는 병이 날 정도이다.'라고 한 마이클 무어 감독은 최근 '화씨 911'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는데, 내 영화의 911은 진실이 불타는 온도다.'라고 했다. 

컬럼바인 비극의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은 숨어 있어서 쉽게 보이지 않는다. 감독은 길이 보이는 데까지는 다 가서 진실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가 다각적으로 사건의 원인을 추적해가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그가 넌픽션에만 관심을 기울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그와 잘 어울렸다. 넌픽션은 그가 현실을 고발하고 현실에 참여하는 도구였다. 그는 영화로서 이 세계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고자 했다. 그는 그냥 영화인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볼링 포 컬럼바인>은 그저 있는 사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사실의 배후에 존재하는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감독이 끊임없이 개입하여, 사건과 더불어 생각하고, 해결을 고민하고, 결국엔 우리의 참여를 호소하는, 세상에 보내는 절절한 호소문이다.

 


1. 분노 관리 프로그램?

 


1999년, 콜로라도주 컬럼바인 고교. 두 명의 학생이 총을 난사하여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이 희생된 엄청난 비극. 그 학교 근처에는 세계 최대의 무기회사 <록히드 마틴>이 있다.

<록히드 마틴>의 직원은 컬럼바인 사태를 이해 못 하겠다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분노를 통제하는 방법을 배우면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학생과 교사를 위한 '분노 관리 프로그램'에 10만불을 투자하고 있다고.

과연 그럴까? 우리가 우리의 슬픔과 분노를 잘 통제하기만 하면 세상엔 문제가 사라질까? 슬픔과 분노의 원인은 제쳐두고, 이 안전한 매트릭스 안에서 감정 조절만 잘 하면 되는 것일까?

언젠가 내 친구는 이 물음에 탁월하게 대답한 적이 있다. 삶이 삶답지 못할 때, 내가 나답지 못할 때 발생하는 게 슬픔과 분노라고. 그 힘이 안으로 향할 때 생기는 게 슬픔이고, 밖으로 향할 때 생기는 게 분노라고 했다. 그러므로 슬픔과 분노는 우리 영혼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세지라고 했다.

도둑을 열심히 잡아 가둔다고 이 세상에서 도둑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빈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사람들의 일탈 행동은 그 사회가 앓고 있는 병을 앞서 알려주는 지표이다.

에릭과 딜런은 왕따였다. '호모'라고 놀림을 받았다. 비사교적으로 자기들끼리 따로 놀았으며, 볼링장에선 룰을 무시하고 공을 집어던졌다. 삶이 뿌리 뽑힌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학교에서 900여발이나 되는 총알을 퍼부어댄 다음 그들 자신도 살해했다.

전문가들은 유독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총기난사사건의 원인으로 폭력 영화, 가정 파탄, 빈곤, 해비 매탈, 마를린 맨슨 등을 꼽지만 마이클 무어 감독은 그 설명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극의 원인을 볼링공에 돌리는 것과 같다. 

영화의 제목은 '컬럼바인을 위한 볼링'. 볼링핀은 눈에 쉽게 보이는 표적일 뿐, 진짜 원인은 아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볼링핀을 향해 공을 굴리지만, 그 핀 너머에 있는, 계속해서 핀을 갈아치우고 있는 시스템은 인식하지 못한다.

에릭과 딜런 역시 볼링장에서 볼링공을 던지듯이, 자신들의 분노를 학교와 친구들에게 퍼부었다. 그렇지만 그들 자신도 자신들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이끈 동인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고 죽어갔으리라.

컬럼바인 고교에 재학 중인 학생의 부모 대부분이 <록히드 마틴>에서 일하고 있고, 한 달에 한번씩 어두운 밤을 틈타서 미사일을 실어나르는 차가 학교 옆을 지나간다.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난 날은 미군이 코소보에 최대의 공습을 퍼부어 병원과 학교까지 무차별 폭격의 희생이 된 날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컬럼바인 참사와 아무 상관이 없을까? 단지 화가 난 학생 둘이 문제였을까?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미국의 모든 행위가 컬럼바인의 비극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데에 감독의 의도가 있다.

 


2. 공포를 조장하는 사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현실은 미국에 총이 많다는 것이다. 총의 천국 미시건에서 감독의 추적은 시작된다. 그도 이 미시건주 플린트 출신이다. 은행 계좌를 개설할 때 사은품으로 총을 주는 곳.

오클라호마 연방 빌딩 폭파 사건의 용의자들도 미시건주 출신이고, 에릭도 여기에서 가까운 오스코다에서 한동안 살았다. 문제아로 낙인 찍힌 적이 있는 브렌트와 디제이는 왜 그렇게 되었냐는 감독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이 동네가 사람을 미치게 하거든요.' 

미국 사회가 대체 어떠하길래 총으로 희생된 사람이 연간 만천 명이 넘을까? 감독은 묻는다. 미국 사람들은 원래부터 폭력적일까? 하지만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도 미국 못지 않게 학살의 역사를 지녔다. 파탄 가정은 영국이 더 많고, 실업률은 캐나다가 더 높지만, 총기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총이 많은 것이 문제의 전부일까? 사냥의 전통을 가진 캐나다도 미국 만큼이나 총이 많은 나라다. 그러나 총기 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왜? 캐나다 사람들은 공포로 세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범죄률은 20퍼센트가 줄었지만 범죄 뉴스 보도는 600퍼센트 증가했다는 사실은 언론이 의도적으로 공포를 조장하고 있음을 잘 대변해 준다.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어서 이득을 보는 자들은 누구일까? 무기 회사다. 냉전 시대가 끝난 후 무기 회사들은 새로운 무기 공급처, 즉 내부의 적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언론으로부터 범죄의 원인으로 지목 받은 락 가수 마를린 맨슨의 인터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쉽게 노출된 표적일 뿐 대통령만큼 영향력이 없음을 말하며 두 가지 점을 지적한다. 첫째는 대통령이 폭력의 주동자라는 사실이다. 정부부터 전쟁 놀이에 몰두해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둘째는 TV의 문제이다. 방송은 겁주기 일색이다. 이 물건을 사지 않으면 왕따될 거라고, 애인을 구하지 못할 거라고 위협한다. 이렇게 공포를 이용한 광고가 경제의 기초를 이루고, 그것을 매일 보는 대중은 두려움에 길들여진다. 미국은 폭력과 공포가 일상화된 사회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인의 공포는 극에 달하여 총기 소비가 대폭 늘었다고 한다. '내 가족은 내가 지켜야죠.' 미국에서 비무장은 무책임한 일이 되었다. 이것이 사람 사는 사회일 수 있을까? 

미국인들이 마음의 공백을 총으로 메우고 있음은 나를 경악하게 했다. 목숨만 부지한다고 사는 것일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세상을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세상을 친구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 쌓인 곳은 지옥이다.

미국인들은 두려움으로 마비되었기에, 그들 삶의 슬픔과 분노를 정직하게 대면할 힘을 잃었다. 총에 의지하고 세상을 두려워하며, 이웃으로부터 고립된 것이야말로 가장 슬퍼하고 분노해야 할 현실인 것을.

이렇게 공포로 얼어붙은 대중에게 결코 총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감독은 주장한다. 그들이 총을 쏘아대는 이유는 겁이 나서이다.

 



3. KKK와 NRA(전미총기협회), 총이 우리의 신!

 


언론이 조장하는 공포가 미국 사회에 이처럼 쉽게 스며드는 까닭은 미국인들의 뿌리 깊은 공포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흑인에 대한 백인의 두려움이다. 

인디언들을 몰아낸 후 백인들은 흑인 노예를 통제하기 위해 총을 믿기 시작했고, 노예 해방으로 그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1871년 KKK와 NRA를 만들었다.

흑인들에게 린치를 가한 불법 테러조직 KKK와 전미총기협회 NRA가 같은 해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영화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실이었다. 영화는 이 두 단체가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반어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이들은 흑인들을 소외시키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실제로 흑인들 대다수는 총기 소지에 반대한다. 총기 소지를 미국인의 권리라고 끊임 없이 외쳐대는 이들은 백인들이고, 총으로 큰 사고를 저지른 이들도 대다수 백인이다. 두려움은 백인들에게 훨씬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전미총기협회 회장 찰튼 헤스턴의 뻔뻔스러운 행보는 실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컬럼바인 참사 후 불과 열흘이 지난 시점에서 콜로라도 덴버에 나타나 대규모 NRA 집회를 열었고, 초등학교 1학년생이 죽은 플린트에도 잊지 않고 모습을 나타내어 총은 결코 포기할 수 없노라고 외쳤다. 

총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찰튼 헤스턴이 NRA의 이익을 위해서 연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총이 필요하다고 믿는 것인지 내가 알 도리는 없지만 인터뷰를 보면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다. 

그는 인종주의자고 미국 땅은 백인들만의 것이고 다른 인종들이 함께 사는 것을 자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 옛날 KKK단의 망령은 지금도 미국 땅을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로운 이 땅에서 악을 물리치지 위해 하나로 뭉치자.'  '자유로운 이 땅'은 그들만을 위한 땅이고, '악'은 물론 흑인을 비롯한 유색 인종일 터. 그들이 줄곧 외치는 자유라는 말에 나는 소름이 끼쳤다. 정의와 평등이 뒷받침되지 않은 자유, 그들 자신들만을 위한 자유는 끔찍하리만큼 공허하다.

나는 또한 그 말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의 얼굴을, 아울러 미국 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청교도 즉 기독교 근본주의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악(?)에 대한 공포를 심어준다는 점에서 미국의 종교와 NRA은 닮은 꼴이다. 

미국은 개신교 신자가 특히 많은 나라인데, 미국식 개신교는 서부개척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미국인들의 마음 속에 선악의 이분법을 뚜렷이 그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믿는 것은 '두려움'의 하느님이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 아니다.

그들은 악을 필요로 하고, 악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 그들이야말로 악을 끊임 없이 재생산하는 원천이다. 그 악은 한때는 인디언이었고, 또 한때는 흑인이었으며, 공산주의였고, 제 3세계 좌파 정부이고, 오사마 빈 라덴이고, 테러 집단이고, 그리고 또 이라크다.

나는 부시 일파가 믿는 것이 하느님인지 총인지 헷갈린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총이다. 그들이 총을 필요로 하는 까닭은? 역시 두렵기 때문이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가진 것을 잃을 까봐 두려운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자원과 부를 자신들만을 위한 것으로 소유하고 간직하고 싶어할 뿐, 자국 내 다른 인종과 나누고 싶어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 사람들과도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기심의 극치이다.



4. 풍요 속 빈곤, 미국의 진정한 모습


시종일관 비꼬는 웃음으로 영화를 이끌던 감독의 어조는 영화 중반을 지나면서 잔잔한 슬픔에 젖어든다. 감독은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플린트시로 우리를 안내하는데, 거기서 우리는 미국의 슬픈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플린트의 뷔엘 초등학교에서는 1학년 사내 아이가 동급생 여자 아이 케일라를 쏘아 죽인 일이 벌어졌다. 플린트에 관심조차 없던 언론은 온통 이 사건 현장으로 몰려들었지만, 사건의 원인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교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소녀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는 또다른 비극과 만날 수 있을 텐데도 언론은 진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GM이 탄생한 도시인 플린트시 주민의 87퍼센트가 극빈곤층이다. 그들은 정부보조비를 일해서 갚아야 하는 부시 정부의 사회보장예산 삭감 정책으로 80마일이나 되는 먼 거리의 부촌으로 일하러 가야 하는 신세이다. 플린트시 청소년들의 주 사망 원인이 살인이다.

동급생을 쏘아 죽인 아이의 엄마인 타말라도 두 가지 직업을 가졌지만 정부보조비를 갚느라 집세를 내지 못해 결국 오빠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그녀는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느라 아이를 돌볼 새가 없었고 아이는 삼촌의 총을 가져가 친구를 쏘았다. 

언론이 전혀 주목하지 않은 타말라의 고단한 삶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감독의 카메라에서 나는 그가 얼마나 깊이 슬퍼하고 분노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타말라가 일했던 식당의 사장을 찾아가 이런 현실을 알리고자 하지만 외면당한다. 찰스 헤스턴이 죽은 케일라의 사진조차 보기를 거부했던 것처럼. 진실은 그들 마음의 두터운 벽 앞에서는 무력했다.

911 이후 부시 정부는 사회보장은 뒷전이고 군비 증강에만 몰두했다. 가난한 이혼모가 아이를 돌볼 수 없도록 만드는 정책이 사회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시 담당 관리는 말한다.

빈민구제기금을 삭감하고, 부자의 세금을 낮추는 정책은, 또 다른 폭력과 죽음을 낳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 전 세계 부의 절반을 소유한 나라는 가장 나눔에 인색한 나라였고, 아메리칸 드림은 운좋은 몇몇 사람들에게나 통용되는 허구의 신화에 불과하다. 미국이 나눔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다면 폭력은 종식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이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5.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 승리는 인간을 믿는 자의 것


감독은 컬럼바인 참사로 평생 휠체어 신세가 된 리처드와 수술로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된 마크와 함께 아직도 그들 몸에 남아 있는 K마트 총알을 반품하기 위해서 K마트 본사를 찾아간다. 

몇 차례의 시도에도 회장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사가지 못하도록 주위에 있는 K마트에서 남아 있는 총알을 다 구매하고는 언론사를 대동해서 다시 본사로 간다.

그 끈질긴 노력은 담당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회의 끝에 K마트는 단계적으로 총알 판매를 금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 작은 승리는 사람들을 고무시켰고 그들의 노력에 다시금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무어 감독은 <볼링 포 컬럼바인>에 이어 911의 진실을 파헤친 <화씨 911>을 제작했으며, 또 그 다음 영화를 기획하고 있다. 그의 싸움은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최후의 승리자는? 총이 아니라 인간을 믿는 자다.  

컬럼바인에서의 왕따의 경험을 만화로 훌륭히 승화시킨 맷 스톤은 누군가는 에릭과 딜런에게 희망을 주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번 낙오자가 영원한 낙오자가 아니라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그의 말은 내 가슴을 찔렀고, 내가 세상과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다시 점검하게 했다.

이라크에 폭탄을 퍼부어대며 악의 축 운운하는 부시,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포기하지 않는 NRA, 인종주의자들, 총에 의지하는 두려움에 길들여진 대중도 모두 인간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인간 본성에 내재한 선함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믿을 수 없다. 인간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신도 믿을 수 없다. 

희망은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다. 신뢰하는 사람은 대화할 수 있고, 관계 맺을 수 있고, 그리고 사랑할 수 있다. 그들은 쓰러질지언정 인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사랑' 뿐이기에, 사랑이 결국은 이길 것이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의 눈이 자기 등 뒤를 볼 수 없는 까닭은 타인이 뒤에서 지켜주기 때문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뒤는 친구가 지켜줄 것이기에 우리의 눈은 앞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마이클 무어 감독은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이 깨어나서 진실을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진실은, 찾아서 외치지 않으면, 시간 속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 그러기에 그의 노력은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고 우리의 실천을 일깨운다.

진실이 모두의 가슴에 울려 퍼지려면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 걸까. 평화로운 세상은 우리 모두의 꿈이다. 인류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빈 가슴으로 서로를 껴안을 날이 오기를.


 


**덧붙이는 말

 


이 글을 쓰고 나서 김선일씨 사망 소식을 들었다. 한 젊은이의 서럽디 서러운 죽음. 나는 내가 지지했던 정부가 그를 살려낼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 그는 살고 싶다고 외쳤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구해내지 못했다. 그날 아침 나는 울면서 학교로 갔다. 

부시의 이라크 전쟁은 이제 우리들 삶의 한가운데로까지 파고들었고 우리의 선택을 묻고 있다. 김선일씨의 죽음으로 파병 찬성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는 신문 기사에서, 테러의 원인은 살펴보지 않고, 테러범 응징에만 소리를 높이는, '전쟁을 위한 전쟁'의 길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본다.

인간을 믿을 것인가? 그것은 곧 '사랑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그 물음은 내게 숙제로 남아 있었다.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면서, 나는 답을 유보하고 있었다. 

신뢰를 회복하는 것 말고 길이 있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종식시킬 다른 방법이 있을까? 나는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우리를 구원할 것은 믿음, 희망, 사랑이지 두려움에서 비롯된 미움이 아니다. 인간을 믿을 것인가? 나의 대답은 '예'이다.



 (함께 여는 국어교육, 200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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