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불로동(不老洞). 팔공산에 갈 때 늘 지나가는 동네다. 바로 근처에 대구공항이 있고 신도시 이시아폴리스가 들어서긴 했지만 전통시장을 비롯하여 여전히 서민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동네다. 불로동의 이름에도 오랜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불로동은 후백제와 고려의 격전지였다. 왕건이 후퇴하다가 여기 오니 어른들은 모두 도망가고 아이들만 남아있어서 늙지 않는다는 뜻의 불로동이라 불렀다 한다.
이 불로동에 왕건이 활약한 시대보다 훨씬 오래된 유적이 있다. 5세기 전후에 축조된 고분 200여 기가 발굴된 ‘불로동 고분군’이다. 근처 봉무동 고분을 더하면 300기가 넘는다고 한다. 고분 하나하나의 크기는 경주 왕릉과 비교되지 않지만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크고 작은 고분들의 행렬은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신비롭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십 년쯤 전에 갔을 땐 야산에 그냥 방치되어 있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산책로를 단장하여 고분공원으로 가꾸어놓았다. 아직 말끔히 정리되진 못했지만. 국민소득 3만불, 세계 10위 경제대국의 위상을 생각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셈이다. 자국 문화에 이토록 무관심했구나 싶다. 유적 바로 옆, 산허리를 자르며 지나는 경부고속도로의 소음도 아쉬운 부분이다.
천 오백 년 전, 여기엔 누가 살았을까. 이 정도 규모의 유적이면 왕에 버금가는 세력일 텐데 고분을 조성한 이들이 누구인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안내판에도 이 지역의 '유력 정치 세력'이 만든 고분이며 출토된 유물로 봐서 신라의 영향권으로 보인다는 설명 뿐이다. 우리 고대사는 이처럼 아직 많은 부분 베일에 쌓여 있다. 삼국시대의 존재만 알 뿐 각 지역에서 실제로 살아가고 활약한 사람들에 대한 연구는 미진해 보인다. 대구의 역사가 어쩌면 여기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저 옛무덤으로만 인식한다. 고분이 천 오백 년 전 것이니 적어도 이천 년 전부터 이 일대에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내 생각에 이곳은 가야 문화권의 일부가 아닐까 싶다. 고령 대가야 유적처럼 고분이 산 능선을 따라 들어서있기 때문이다. 평탄한 곳에 고분을 만든 신라와 뱃제와 달리 가야 사람들은 하늘과 맞닿은 능선에 고분을 축조했다. 그런 면에서 대구 불로동 고분군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겉보기엔 매우 흡사하다. 물론 이건 내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다. 정확히 밝혀지면 좋겠다.
고분공원을 천천히 걸어서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쯤 걸렸다. 이른 봄이라 초록의 싱그러움을 품에 담지는 못했지만 차갑지 않은 하늘과 땅의 기운이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공원 정상에서는 병풍처럼 늘어선 팔공산 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대구의 젖줄, 금호강도 근처를 굽이쳐 흐른다. 팔공산과 금호강이 만나는 곳에 이천 년을 넘나드는 시간의 흔적, 불로동 고분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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