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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1.
인간은 구조의 산물이지만 그 구조를 깨달을 수 있는 존재다. 자신의 인식, 자신의 경험을 추적하여 자신의 많은 부분이 프로그램화된 것임을 깨달을 때 그는 비로소 주체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니오가 구조의 틈새를 발견하고 구조의 외부에 다가서고 결국 그 외부를 통해서 구조를 변혁하는 것처럼. 그 구조는 사회 구조이자 그 사회 구조의 산물인 우리들의 신체다. 우리들의 신체가 코드화되어 있는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다. 주체라고 착각할 뿐.
매트릭스는 진실을 못 보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라고 모피어스는 말한다. 우리 마음의 감옥, 우리의 감각이 창조한 세계가 매트릭스라는 것이다. 우리를 통제하는 것, 컴퓨터가 만든 꿈의 나라. ‘매트릭스는 너가 누군지 말해줄 수 없어’
매트릭스는 우리로 하여금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우리가 세상을 파악하는 방식은 사회적/문화적으로 양산된 것이다. 우리의 감각 기관이 방향짓는 코드에 따라 보고 듣고 느끼며 그것을 유일한 세계로 착각한다. 우리들의 감정 역시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 감정의 내용도 두뇌에 좌우되는 것이다.
그러나 매트릭스에는 틈새가 있다. 시스템은 완벽하지 않고 언제나 에러를 노출한다. 매트릭스에 균열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시스템이 에러를 일으키는 순간, 우리가 어떤 감각적 충격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 삶에 빨간 경고등이 켜진다. 그 때 비로소 우리 신체는 코드 너머, 매트릭스 너머의 세계를 보게 된다. 그리고 대체 매트릭스가 어떻게 구성되어 우리를 지배하는지 알아차린다.
단일한 욕망 기제로 코드화된 몸과 코드화된 사회를 발견하는 때가 매트릭스의 ‘외부’를 엿보고 '외부'를 모색하게 되는 때다. 매트릭스의 참모습은 매트릭스의 외부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모든 구조에는 틈새가 있고 인간은 그 틈새를 발견한다. 틈새를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틈새를 통해 다른 세계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하리라. 외부는 저 너머 초월적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와 공존하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 외부는 지금 이 세계보다 훨씬 큰 세계, 우리보다 앞서 존재한 세계다. 우리의 출발점이지 우리의 종착점이 아니다. 우리는 그 세계의 모든 잠재성으로부터 앞으로 도래할 세계를 이끌어낸다. 공즉시색.
매트릭스는 우리를 통제하는 시스템, 우리 마음속 컴퓨터 프로그램이고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 모든 제도와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를 비롯해서 우리를 지배하는 수많은 매트릭스가 있다.
매트릭스는 우리가 누군지 말해줄 수 없다. 우리가 누군지 알기 위해서는 매트릭스의 균열이 발생시키는 소리를 따라 매트릭스 바깥을 보아야 한다.
아는 것으론 충분치 않다. 그 소리를 따라 걸어보아야 한다.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 그 소리를 나 자신의 소리로 믿을 때, 믿을 수밖에 없을 때 경계 없는 세상,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매트릭스에 갇혀 있는 한 자유는 없다. 자유는 매트릭스의 '외부'를 볼 수 있는 자, 그 외부를 찾아낸 자의 몫이다. 매트릭스 밖으로의 탈주. 탈주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인간에게 수많은 자유가 주어져 있는 것 같지만 실상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모피어스의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 빨간 약을 먹고 매트릭스 안에서 만족하거나 파란 약을 먹고 끝까지 가보거나. 자유는 그 시작에서 유의미할 뿐. 자유롭게 파란 약을 선택했다 해도 그 다음에 무엇이 펼쳐질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믿음을 갖고 끝까지 가보는 것 밖에는. 마치 사랑에 빠지듯이, 다른 사람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우리 자신은 뚜렷이 느끼고 있는 그 길로 가보는 것 밖에는...
영화의 엔딩 대사.
‘시작을 말해주는 거다. 나머진 알아서 하라구.’ ^^;
매트릭스 2.
매트릭스의 ‘외부’에서는 매트릭스 안이 좀 더 잘 보인다. 매트릭스 안에선 자기 주변의 것들만 눈에 들어오지만 매트릭스의 외부에서는 전체적인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외부’의 역할이고 우리가 ‘외부’를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우리 삶에서, 익숙하게 보던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모든 지점이 바로 ‘외부’이다. ‘외부’를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좀 더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서 미래까지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시간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예측에는 한계가 있다.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아는 존재는 신이다. 라이프니츠의 말대로 시간을 무한 미분한다면 우리 역시 접혀진 것들이 하나씩 펼쳐지는 생의 모든 전개를 낱낱이 헤아릴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오라클은 니오에게 말한다.
‘너는 이미 선택을 했어. 중요한 건 선택의 이유를 알아차리는 거지.’
우리는 '직관'에 따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선택에는 믿음이 요청된다. 우리는 '현재'에는 그 선택의 이유를 낱낱이 이해할 수 없다. 살아가며나서 우리가 내린 선택의 동기와 이유를 깨닫게 된다.
다만, 신이 있다면, 우리의 선택 역시 모두 신의 경우의 수, 신의 통제 영역 안에 있다. 그는 우리가 무엇을 택할 지 아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므로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미래를 좌우하지만 신에게는 모든 것이 환하다. 신과 우리는 관점이 다르며 다른 차원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선택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선택이 가져올 모든 가능성과 결과까지 사랑하는 것. 그것이 니체가 말한 운명애, Amor fati. 자신의 선택,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선택, 필연을 사랑하기. 의식적 선택을 함으로써, 운명을 사랑함으로써, 인과 관계의 그물 위에서 자유롭게 뛰어놀기.
오라클은 인간의 삶에 개입한다. 필요한 순간에. 개입한다는 건 희망을 가진다는 거다. 믿기 때문에 개입하는 것이다. 개입이 다른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 그래서 오라클은 인간과 공동 운명체가 된다. ‘너의 미래에 나의 미래가 달려 있어.’ 오라클은 인간과 함께 가는 것에 주사위를 던진다. 니오에게 하는 말. ‘너는 적어도 내 믿음을 얻어냈어.’
오라클의 소리를 믿을지 안 믿을지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다. 오라클도 믿고, 니오, 모피어스, 트리니티도 믿는다.
오라클이 말한 것을 믿을 때 미래는 다른 방식으로 펼쳐진다. 믿음은 다른 미래를 가져 온다. 믿음과 희망이 새로운 실천을 낳기 때문에. 그래서 ‘설계자’가 말하듯이 희망은 인간의 본질적 요소다. 희망은 ‘너머’를 보려는 인간의 몸짓이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기에 희망한다.
신에겐 환히 보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겐 아직 비결정적인 미래. 그 비결정성 때문에 우리는 희망한다. 실천이 미래를 바꿔놓으리라고 믿기 때문에.
그런데 현재의 관점에서 본 미래는 언제나 현재의 제한된 틀 속에 갇힌 미래이지 미래 그대로의 미래가 아니다. 그래서 오라클은 니오와 모피어스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 순간 그들에게 필요한 말만 한다. 그들은 길을 걸으면서 점차 의식이 변화한다. 그것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방향'은 예정된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다.
매트릭스 시스템은 거대한 인과 관계의 사슬이다. 우리는 그 인과 관계 속에서 무의식적 선택을 내리며 살아간다. 무의식적 선택을 의식적 선택으로 바꿔놓을 때가 인생을 알아차리고 그 인생에 기꺼이 동참하게 되는 때다. 니오와 동료들은 매트릭스 밖으로의 탈주의 선, 변이의 선을 타고 계속 진화한다. 그들은 사랑과 운명을 용감하게 선택한다.
(운명이란 말은 맥락에 따라 전혀 상반되는 의미로 사용된다. 매트릭스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 운명이란 말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운명과 맞서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니오와 그의 동료들은 해방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매트릭스 안의 인간과는 다른 종류의 운명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오라클과 설계자의 영향권 안에 있다. 그렇지만 ‘그’의 길이 끝나는 곳, ‘길의 끝’에서 니오는 매트릭스의 설계자와 대면한다. 매트릭스의 변종인 니오가 매트릭스의 설계자와 맞서는 것이다. 인류의 운명을 걸고.
설계자는 두 개의 문을 제시하지만, 니오의 선택은 이미 내려졌다. 그는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하나를 선택한다. 그것이 그의 운명, 자유의 모든 가능성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운명이다. 마땅히 선택해야 할 것을 선택하는 것. Amor fati.
길의 끝까지 가본 자가 그 얼마나 될까. 니오에게 ‘길의 끝’은 또 다른 시작, 전혀 다른 길의 시작이 된다. 당장엔 그는 자신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선택의 의미는 그가 길을 계속 걸음으로써 차차 밝혀진다. ‘너는 이미 선택을 했어. 중요한 건 선택의 이유를 알아차리는 거지.’
2편의 끝에서 느부갓네살호는 파괴된다. 그들을 거기까지 실어다 준 배는 꿈처럼 사라진다. 그들은 이제 다른 것을 꿈꿀 것이고 다른 배를 필요로 할 것이다. 스토리는 반전된다.
(덧붙임) 역시 매트릭스는 1편이 제일 낫다. 2편과 3편은 상상력의 빈곤을 액션과 컴퓨터 그래픽으로 덮어놓은 감이 있다. 1편에서 야성적인 매력을 한껏 발산했던 트리니티가 2,3편에서는 거의 백치미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 점도 무척 아쉽다.
현실과 매트릭스의 중간 지대에 갇히는 니오. 니오는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현실은 이렇게 중층적이고 다층적이다. 수만 겹의 현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니오는 매트릭스 안에서 뿐 아니라 밖에서도 초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 두 세계가 결국 다른 세계가 아님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그 세계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만다. 그는 두 세계를 연결해 주는 정거장에 있지만 기차는 그를 거부한다. 오라클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변화다. 선택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설계자와, 설계자의 방정식을 뒤흔드는 오라클. 코스모스와 카오스. 세계는 질서를 지향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미세한 차이와 흔들림은 계속해서 발생한다. 그것이 우리들이 사는 세계. 기계들의 도시는 시온을 파괴함으로써 존속을 꾀한다. 스미스는 모든 것을 파괴함으로써 존속을 꾀한다. 니오가 원하는 건 평화다. 기계들의 세계와 인간들의 세계를 연결하는 자. 평화는 공존의 법칙이다. 여러 세계가 함께 공존하기. 스미스는 agent 즉 수행자, 실행자이다. 매트릭스의 실행자. 오라클의 자식. 그의 임무는 매트릭스에서 발생하는 변종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니오의 힘이 커갈수록 니오를 상대하는 스미스의 힘도 커진다. 스미스 역시 매트릭스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차이점이라면, 스미스는 매트릭스를 파괴함으로써만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아닌 것들을 다 자기화함으로써, 자기와 동형의 것들을 계속 생산함으로써, 모든 차이와 변이를 소멸시킴으로써 그는 그 길을 향해 나아간다. 그에겐 사랑과 평화 같은 것들 역시 매트릭스처럼 조작된 것, 단일한 환각의 구성물이다. ‘내 여정은 어디서 끝나나요?’ ‘선택한 뒤의 결과는 아무도 몰라.’ 니오의 죽음은 숭고하지만, 그건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구원의 공식, 기독교적 결말의 일종이다. 그의 희생으로 세계는 평화를 되찾는다. 그래서 매트릭스 3은 레볼루션이라 하기엔 다소 싱겁고 재미없는 결말이 되었다. 오라클은 우리와 함께 걷는 신을, 설계자는 인과 관계, 결정성, 법칙, 구조를 상징한다. 미래는 니오와 오라클과 설계자의 합작품이다. 인간과 신과 매트릭스(혹은 구조, 혹은 이 세상)의 긴장과 대립, 그것의 극복. 이상 매트릭스와의 놀이 혹은 횡설수설 끝. ^^;
매트릭스 3.
그 기차를 타고 그를 되찾으러 오는 이는 트리니티다. 사랑은 ‘관계’의 다른 이름. 나와 나 아닌 것,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시켜 주는 움직임. 사랑과 광기. 이 모두는 다른 것과 연결되려는 갈망의 표현이며 방정식을 뒤흔들어 놓는, 변이의 생성이다. 필요(존재 이유)가 없는 순간 바로 삭제당하는 프로그램의 세계에서 사랑은 특이성의 발현이자 변화의 원동력이다.
때가 되었을 때 니오는 답을 얻을 곳을 알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다. 그 때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 그의 내적 성숙도에 의해 결정되고 그로써 그는 새로운 차원의 시간을 살게 되며, 주저 없이 내적 인도를 따른다. 그는 자신의 모든 선택의 이유와 목적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기꺼이 ‘포기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그 선택이 그에게 끝없는 힘을 주고 그의 운명을 완성해간다. 그는 자신이 승리할 것을 알았다기보다는 믿었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오라클이 말한 것처럼.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나요?’
‘아니, 몰랐어. 다만 믿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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