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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시와 소설

[책] 정거장에서의 충고 / 박해현 외

by 릴라~ 2023. 3. 19.

기형도 시인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론을 모은 책이다.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꺼운 책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사실 매우 듬성듬성 읽었지만)
여러 책 중에서 기형도 시인에 대해 대략적인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었던
유일한 책이다. 
 
책장을 덮으며 한 청년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노래 부르기와 음악을 좋아했던 활달하고 유쾌한 청년,
그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속삭여오는
아픈 유년의 그림자, 
가난과 가족의 병고로 인해
외로움으로 점철됐던 어린 날,,
학교에서 받은 상장을 아무도 알아줄 이 없어
종이배로 접어서 개천에 띄워버릴 만큼.. 
중풍으로 드러누운 아버지, 
비극적 사고로 죽은 누이,
여공으로 일한 다른 누이들과
힘겹게 생계를 꾸려가던 채소장수 어머니...
 
그는 인생이 주는 실존적 물음에 
그 자신이 해답을 찾는 방식으로 
시인이 되었다.
그에겐 누구보다 섬세한 감수성과 언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
그의 개인적 우울은
60~80년대, 거칠과 혼란했던 시대의 우울과 포개지면서
그의 시 세계에 독자적인 깊이와 개성을 부여했다. 
 
슬픔 뒤의 기쁨과 희망을 말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섣부른 전망을 내어놓지 않고
부정적인 현실을 부정성 그래도,
비극을 비극 그대로
안개가 걷힐 날을 노래하지 않고
그 시대의 '안개'를 '안개'로만 노래했던 시인. 
 
그 부정적인 언어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건
세계에 대한 그 정직성과 더불어
그 정직함이 진짜 강인함임을
그 부정성 속에서도 그가 우뚝 서 있고
삶을 헤쳐가고 있음을 은연중에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누구나 바라는 정치부 기자를 자의로 때려치고
문화부로 옮겨가서 취재에 열을 올렸던 청년. 
그러면서도 시인이 되고자 습작을 계속했던 시인. 
 
출구 없이 닫힌 시대에
닫힌 빈 방을 노래하면서
우리에게 그 닫힌 빈 방의 존재를 일깨워주었던 시인. 
 
부정적 현실을 부정성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그의 시가 아름다움을 주는 이유 또한
삶에 대한 그 정직성과 더불어
그 부정성을 표현하는 그의 언어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의 언어가 아름답다는 건
그 부정적 현실 속에서도 그 시인이
아름다운 영혼을 지녔음에 다름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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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리얼리즘의 요체는 현실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내, 추함으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니 차라리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흙탕에서 황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가 아니라, 진흙탕을 진흙탕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이다. 그의 시학은 현실적인 것과 시적인 것의 대립 위에 세워져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꿈을 꾸지 않는다. 망가진 꿈이라도 꾸는 자에겐 희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망가진 꿈도 꾸지 않는다. 망가진 꿈은 그리움의 상태로, 그런 것도 있었지라는 쓰디쓴 회상의 상태로 존재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현실적인 것을 변형시키고 초월시키는 아름다움, 추함과 대립되는 의미의 아름다움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모습에 대한 앎(아름다움이란, 아는 대상다웁다라는 뜻이다)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목표한다. 그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소외된 개별자, 썩어가는 육체, 절망 없는 미래, 헛것인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아름-아는 대상답다. 그에게 있어, 시적인 것은 따로 없다. 그가 익숙하게 아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부정적인 것들인지. p19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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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시는 우리 시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도저한 부정성의 언어가 그것이다. 스스로 고통이 되고 부정성이 됨으로써 현실의 거짓 긍정성이라는 부정성을 거부하고 전복시키는 언어 말이다. 그 자신이 남긴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통해, 그리고 그가 연 지평을 현실 응전력과 사회성의 확충이라는 방향으로 확장해갈 그의 후배 시인들의 시를 통해 그가, 한정된 의미에서나마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빈다.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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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시는 우리 세계에서 모습을 감춰버린 아름답고 신비로운 성을 찾아가는 언어의 순례이자 그 성을 은폐하고 그 성을 향해 가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좌절시키는 현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끊임없이 모든 장벽이 사라지고 모든 거리가 지워 없어진 그런 상태를 꿈꾸었다. 물론 그는 자신이 그 성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으며, 또한 도달할 수 없음으로 해서 그 성이 아름답고 신비로울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시인이 항상 이처럼 비극적 인식에 투철했떤 것은 아니다. 매우 희귀하긴 해도 우리는 그의 시에서 그 성에 거의 다다르기 직전까지 나아간 시인의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다. 놀랍게도 그것은 그의 시에서 세계의 부정성을 의미하는 텅 빔이 존재들 간의 자유로운 소통을 가능케 하는 투명성-투과성으로 변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텅 빔의 지옥이 일순간의 반전에 의해 무한히 자유롭고 충만한 공간으로 향하는 문이나 통로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p338-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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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기형도가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 모두 20대의 시인으로서 문학에 젊음을 바쳤고, 저마다 자기의 시대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 그러나 지탱하기는 어려운 가장 무거운 고통과 어둠의 아픈 의식을 시적으로 표현한 시인들이었다. 물론 두 시인 사이에는 같은 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을 것이다. 한 사람이 식민지 시대의 억압 속에서 그 사회 체제에 저항하는 정신을 서정적 언어로 표현하였다면, 다른 한 사람은 자본주의 시대와 도시화의 시대에 개인의 고립과 절망을 참담한 비극적 언어로 담아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 시인은, 싸워야 할 적이 분명했고, 쟁취해야 할 목표가 뚜렷했던 시대에 살면서 그의 자아는 순수하고 의식이 투명하여, 자신의 시대를 어둠으로 파악하면서도 그 어둠을 넘어서는 희망은 강렬햇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80년대 자본주의 시대의 시인은 비록 그 시대가 군사 정권의 억압적 상황과 지배 아래 있었다 하더라도 싸워야 할 적이 하나만이 아니었고, 싸움의 방식도 간단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의 내면적 의식 속에서 시대적 불안과 죽음의 징후, 개인의 실존적 고통에 압도당하여, 어두운 절망의 언어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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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손에 두 장의 편도 열차표가 쥐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신의 삶을 바스러뜨린 세계의 폭력성을 그려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폭력성이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한 희원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앞서의 것이 '현실적 가치 체계'로 향하는 티켓이었다면, 나중의 것은 동경이라는 이름을 지닌 낭만주의자들의 부적이었다. 나는 물론 그 두 가지 길이 영원히 갈리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끔찍한 현실의 탐색에서 배태되는 유토피아적 꿈 그리고 유토피아적 전망 속에서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지긋지긋한 현실, 그 둘의 지양으로서의 혁명적 낭만주의 세계관이 마지막 종착역으로서 자리잡을 수 있엇으리라 생각한다. 그 역의 이름은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자연'(같은 글)이었다. 그리고 그 자연은 유년 시절의 넋과 꿈의 성숙한 모습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시의 독창성은, 황지우를 정점으로 하는 80년대 일군의 시인들의 시적 경향과 만날 수 잇엇을 것이다. 개성과 보편성이 만나는 그곳에서 아름답게 피어날 큰 연꽃과 함께. 어쨌든 그는 두 역의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출발이 미뤄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상실이란 폭퐁으로 인해서 두 선로 모두 차단기가 내려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더 이상 '안개의 성역'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속에 '가엾은 (그의) 사랑'이 갇힌 자그마한 집을 한 채 짓고는, 지상에 없는 길을 따라 떠나간 것이다. 그가 불의의 사고로 ㅉ랍고도 고통스러웠던 삶을 마감하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은 그 집은 지금도 비어 있다. p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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