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서울 종로구 옛 전옥서 터에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들어선다.
123년만에 전봉준 장군이 당신이 사형당한 그 자리에 돌아온 것이다.
작고한 역사가 이이화 선생(1937-2020)이 필생의 작업으로 추진한 일이었다.
돌아가시기 전 선생께서 그 결실을 볼 수 있어서
당시 뉴스를 보며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친일사관이 판을 치던 때에 역사의 반역자로 치부되던 이들을
진정한 혁명가로 제대로 조명하며 민중사관을 정립한 분이 이이화 선생이다.
그래서 그분은 백성이 뜻을 품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움직였던
동학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다.
이이화 선생이 동학에 대해 지녔던 애정의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에도 못 미치지만,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 또한 동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유는 우리 역사에서 동학만이 주는 '경이로움' 때문이다.
첫째는 우리 역사상 가장 엄혹한 시대에 등불처럼 세상을 밝힌
사상의 경이로움이다.
어떤 사상도 동학의 평등 사상만큼 만물을 존귀하게 보지는 않았다.
생물 뿐 아니라 무생물까지 하늘이라고 여겼으며(밥을 먹는 것은 하늘을 먹는 것)
그렇게 모든 존재를 존엄하게 대함으로써
시대의 각박함을 뚫고 나가고자 했다.
둘째는 그것이 단지 사상에 끝나지 않고 한 시대를 뒤흔든
민중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남접인 호남이 중심이 되었지만 마지막엔 북접도 동참하여
이름없는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국적인 저항을 펼쳤다.
셋째는 동학농민운동 지도자들이 보여준 결기와 인격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역사에선 멋있는 도원결의를 보기가 어렵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야기보다는 배신이 많다.
전봉준, 최경선,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 농민지도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었기에 전국적인 거사가 가능했다.
물론 이들의 의견이 늘 일치했던 것은 아니고 갈등이 상존했지만
새로운 세상을 위해 함께 움직였다는 것이 놀랍고 아름답다.
비록 김개남을 밀고한 친구 임병찬과 전봉준을 밀고한 부하 김경천처럼
그 이야기의 끝에는 또 밀고가 도사리고 있지만...
암튼 우금치 패배를 생각하면 동학은 한편으로는 너무나 처절하면서도
내겐 경이로움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동학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는 얼마나 비루했을까.
방학을 맞아 동학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 '녹두꽃'을 보려고
왓챠에 가입했는데, 주인공이 전봉준이 아니고
이야기가 너무 늘어진다.
답답한 마음에 책을 먼저 읽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내게 존경하는 이이화 선생의 책이 있다.
<전봉준, 혁명의 기록>
말 그래도 혁명의 기록이었다.
전봉준은 동학사상보다는 동학조직을 활용해
세상을 바꾸고 싶은 혁명가였다.
가난한 농민의 후손으로 가난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곳을 방랑하며 살았으며 한학을 깨우쳤기에
서당 훈장 노릇을 하기도 했다.
방랑하는 시절에 세상을 보는 그의 기본 태도가 확립된 것 같다.
그는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제대로 된 세상, 평등한 세상을 열고 싶었다.
그리고 차근차근 거사를 준비한다.
1968년 정읍 고부면 고택에서 발견된 '사발통문'은
1차 봉기인 고부 봉기가 부친의 죽음을 갚기 위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준비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처음부터 서울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전봉준의 생애 중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2차 봉기 때
우금치에서 대패한 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학살에 가까운 그 엄청난 실패와 좌절에도 그는 다음을 기약하고
원평과 태인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른다.
그는, 그리고 동학농민군은 그만큼 절박했고 또 간절했다.
흰 옷에 죽창을 들고 기관총에 맞서 싸웠다.
그들이 내세웠던 건 탐관오리의 학정과 일본의 내정간섭을 물리치고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것이었다(보국안민).
당시 그 많은 유생과 선비들이 이 동학농민군만큼의
시대 인식이 없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많은 유생과 양반들이 동학토벌군인 민보군에 참여했고
동학 토벌에는 그들의 공이 컸다.
이제 전봉준 생애의 마지막을 살펴보자.
전봉준이 부하의 밀고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을 때
일본은 농민지도자를 자기 편으로 만들면 백성을 다스리기 쉽다고 여겨
온갖 부귀영화를 제안한다.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어떤 경우에도 일본이 적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회유를 물리치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가 회유에 응했더라면 그 수많은 피를 흘린 백성들의 목숨은
역사에서 그 빛을 바랬을 것이다.
전봉준이 일본의 심문을 받은 공초 기록이 남아있기에
그의 마지막 생각을 헤아려볼 수 있다는 점이
우리 역사에선 한 줄기 빛이라고 이이화 선생은 말한다.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 와중에
일본군의 종군 기록 등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다 찾아서
우리 앞에 전봉준 장군의 생애를 진실에 가깝게 복원하여 들려준
이이화 선생께 다시금 감사한다.
그분은 그 세대만이 할 수 있는 일, 그분만이 할 수 있는 일,
그러한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귀천하셨다.
책장을 덮으며 승리한 역사만이 역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금 한다.
역사는 거듭된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것이다.
130년 전 그분들이 꿈꿨던 만물이 평등한 세상,
그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니, 전지구에 몰아닥친 기후 위기와
뭇 생명체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더 오리무중인 세상이다.
만물을 존귀하게 대함으로써 시대의 각박함을 이기고자 했던
그분들의 음성이 지금 더 절실하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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