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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영화, 드라마

[왓챠] 위플래쉬 __ 순수한 열정일까, 아집에 찬 폭력일까

by 릴라~ 2023. 8. 19.

(스포일러로 가득합니다)
 
뉴욕 최고 음악학교의 교수 플랫처,
실력이야 최고지만 그의 교수법은 무지막지하고 가혹하다.
저러다가 정신병원에 실려가겠다 싶을 정도로
학생들에게 인신공격을 서슴치 않는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참는 이유는 그에게 실력을 인정 받아야
예술가로서 비전이 있기 때문이다. 
음악으로 밥 먹고 살려면 최고의 연주자가 되어야 한다. 
많은 학생들이 '최고'를 원하는 플랫처의 기대에 못 미치고
그의 '분노 조절 장애'는 오늘도 계속된다.
 
신입생 네이먼은 드러머의 꿈을 가지고 있다. 
플랫처의 눈에 띄어 그가 지도하는 교내악단에 합류한다.
가정사까지 함부로 까발리는 그의 독설을 참아내는 이유는
네이먼 또한 최고의 연주자가 되어 성공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인 드러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하고
플랫처는 의도적이고 지속적으로 네이먼에게
언제든 탈락할 수 있다는 불안과 위협을 조장한다. 
네이먼은 점점 제정신 아니다 싶을 정도로 드럼에 집착하고
드럼 연습을 위해 여자친구도 버리고 피나는 연습을 한다.
실제로 손에 피가 뚝뚝 떨어져내릴 만큼 자신을 몰아붙인다.
점점 미쳐가는 네이먼.  
잠깐 늦어서 연주회에서 기회를 놓친 네이먼은
연주회장에서 플랫처에게 분노를 폭발해 난동을 부리고
아들을 염려한 네이먼의 아버지에 의해 드럼을 중단한다. 
 
플랫처도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제자, 링컨센터의 연주자 션 케이시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그의 불안과 우울이 플랫처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유족들의 문제 제기가 있었고, 그 학교 재학생의 추가 증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영화에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네이먼은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증언을 한 것으로 보이고(증언한 학생 이름은 공개되지 않는다 한다),
결국 플랫처는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둘은 우연히 한 재즈 카페에서 재회한다.
플랫처는 웬일로 다정하게 대화를 이어간다. 
그가 자주 했던 말을 한층 누그러진 어조로 말한다.
존스가 찰리 파커에게 심벌즈를 던져버렸기에
찰리 파커가 최고의 연주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학생들이 한계를 뛰어넘길 바랬었다고. 
그리고 헤어질 때, 지금 지휘하는 악단에 좋은 드러머가 없다고
합류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드러머의 꿈을 버리지 못한 네이먼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카네기홀에 들어가지만 거기엔 플랫처의 치졸한 복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플랫처는 증언한 재학생이 네이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에게 연주회 연주곡을 잘못 알려준 것이었다.
 
제아무리 실력이 출중한 연주자라 해도
모르는 곡을 악보도 없이 그 자리에서 연주할 수는 없는 법.
첫곡을 망쳐버린 네이먼은 연주장을 멍하게 빠져나가는데,
걱정되어 달려온 아버지와 포옹한 뒤 네이먼은 다시 연주장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제는 더이상 플랫처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그가 먼저 자신과 악단이 잘 아는 대중적인 곡을 시작해버린다. 
드럼의 전주에 악단이 뒤따라 연주에 참여하고
플랫처는 어쩔 수 없이 그 곡을 지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서 네이먼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고
자신의 한계를 몇 번이나 계속해서 뛰어넘고
말 그대로 신들린 연주를 보여주었다. 
그 연주에 홀린 플랫처는 네이먼에게 미소를 보내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위플래쉬’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여
스릴러 영화처럼 긴장감이 있는 영화였다.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거칠게는 두 가지로 나뉠 것 같다. 
예술의 광기에 대한 예찬, 
이쪽은 플랫처의 교수법이 필요악이라고 옹호할 것이다.
또 하나는 예술이 저렇게 해서까지 도달해야 할 만큼
절대적 가치가 있느냐는 물음일 것이다.
이쪽은 플랫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일 것이다.  
 
나는 후자이다. 
그리고 플랫처의 교수법이 필요악은커녕 절대악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최고의 실력은 물론 예술 그 자체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의 실력과 예술에 대한 사랑이 그의 행위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더 위험한 것은 그가 자신의 실력과 예술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만큼 예술을 깊게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오만이 하늘을 찔러, 자신의 예술적 목표를 위해서라면
학생들을 얼마든지 학대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게 목적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의 학생들 중에서는 한계를 넘은 이가 없었으며
링컨센터 입성에 성공한 션 케이시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플랫처는 케이시의 죽음에도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며
그의 아름다운 음악 이야기만 한다. 
그것만 봐도 그가 최고의 음악가가 되는 과정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인간임을 보여준다. 
어떤 분야(특히 예술 쪽)에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사람 중에
플랫처 같은 인간형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생뚱 맞은 예지만 박정희 같은 독재자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 역시 나라를 위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국민에게 가한 숱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했을 것이다.
나는 목적이 수단을 절대 정당화할 수 없다는 순수주의자는 아니다.
목적과 수단은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배분되고 배치되어야 한다고 보는 쪽이다. 
하지만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상관 없다는 플랫처의 가치관은
궤도를 심하게 이탈했다고 본다.  
 
최고의 실력, 최고의 안목,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절대선이라고 믿는
한 남자가 보여준 광기에 가까운 열정.
그 목표가 여러 학생들을 병들게 하는 가운데
네이먼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답을 주지 않고 끝난다. 
마지막 연주에서 네이먼은 플랫처라는 괴물을 이기는 데 성공했다.
그는 플랫처의 지시가 아니라 그 자신의 리듬과 템포로성공적인 연주를 보여준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가 플랫처라는 괴물을 이겨낼 지는 미지수다.
그래서 이 영화 '위플래쉬'는 물음으로 남는다.
위플래쉬는 채찍이란 뜻이다.
인생은 길고, 네이먼이 그 채찍을 적절하게 사용할 지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다 좌절할 지는 알 수 없기에.
네이먼의 내면에서 플랫처라는 괴물이 계속해서 말을 건다면
네이먼의 행로도 션 케이시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두 명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늘 네이먼을 다정하게 감싸주는 네이먼의 친아버지와
음악에서 길을 보여주는 스승, 플랫처.
네이먼에겐 스승이 필요했으나 
플랫처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아집과 폭력으로만 전달하는 폭군이었다.  
극단적으로 치닫는 열정은 언제나 파국을 불러온다.
우리가 어떤 것에 엄청난 열정을 지니고 있을 때
우리 자신을 한 번 경계하는 것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플랫처라는 내면의 폭군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네이먼이 마지막 연주에서 플랫처에게 크게 반항한 것처럼
자신의 연주를 시작하고 플랫처가 그것을 따라오게 할 수 있다면
그의 음악은 제대로 된 방향을 찾은 것이다.
 
이 영화는 예술을 하는 이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자기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플랫처'라는 인물로 형상화한 것 같다.  
결말은 열려 있지만 나는 이 영화를 플랫처를 이겨낸
네이먼의 이야기로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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