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역에 이렇게 글 잘 쓰는 분이 계시다니..
다른 글에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난 개인적으로 역량 중심 교육과정에 비판적이다.
지식 중심에 대한 비판으로 나온 게 역량인데
일단 역량의 실체 자체가 모호할 뿐 아니라
역량이란 게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의미가 협소한데도
과도하게 의미 부여가 되어 있다.
지식을 대화와 협동을 통해 제대로 학습한다면
학습자들은 그걸 바탕으로 자기 역량을 발휘할 거다.
역량만을 강조할 때 지나친 기능주의로 흘러서
눈에 보이는 성취에 매몰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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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학의 철학에 동의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유기성과 다양성이라는 생명 원리에 반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은 생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각 생명 개체는 서로 연결됨으로써만 존재한다. 물질과 에너지는 연결을 타고 흐르며, 그 흐름에 따라 생명체는 생로병사의 순환을 하게 된다. 모든 개체는 그렇게 접속된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의미를 실현시킨다. 그리고 접속에 참여한 모든 개체는 각기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생명의 유기성과 다양성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그것은 계몽의 소재가 아니고 생명계가 지속해서 존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인간의 능력은 오랜 시간에 걸쳐 생명을 좀 더 나은 조건에서 존속시키고자 애쓴 노력의 산물이다. 그렇다 보니 능력의 속성은 다양성과 유기성이라는 생명의 속성과 깊이 맞닿아 있다. 그런데 능력주의는 사회 주류 체계가 요구하는 선별된 능력에 배타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능력주의는 정작 사회에 요구되는 다양한 능력들을 사람들로부터 고사시킨다.
능력주의가 뼛속 깊이 스며든 우리 학교가 그러하다. 첨예한 경쟁에서의 승리가 덕목이 되는 사회에서 개인은 각자의 능력을 길러 경쟁에서 이기고 더 나은 보상을 얻고자 총력을 기울인다. 이런 사회에서 학교는 무한경쟁을 위한 역량을 기르는 곳으로 자리매김된다. 학교에서 기른 개인화한 역량은 지능에 기반해 학업 성취를 이루는 학업 역량에 집중된다. 빠르고 정확하게 계산하고, 문맥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추론하며, 지식과 정보를 수용하고 응용하는 역량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능력들은 학업과 전문적 직능의 개발을 위해 소중하다. 문제는 이런 역량이 지나치게 과잉 대표되고 상찬되고 보상될 때 일어난다. 특정 능력에 대한 과잉된 가치 부여는 사회적 보상체계의 균형을 깨뜨리고, 더 나아가 가치체계를 기형적인 모습으로 왜곡시킨다. 그 결과 능력의 다양성과 유기성은 급격히 사라진다.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능력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퇴출되고 갈수록 희소해진다. △타인에 대해 공감하고 △타인이 공감할 수 있게 자신을 표현하며 △생물을 기르고 가꾸고 △다양한 감각으로 느끼고 상상하며 △묻고 답하고 △경청하고 △위로하고 △화해도 시키고 △자신의 오류와 한계를 통찰하고 인정하는 능력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능력은 경험을 통해 연마돼야 하지만 좀처럼 쓸모를 인정받지 못하면서 학교에서 성장의 계기를 갖지 못한 채 소실되고 있다. 고도의 학업 역량을 갖춘 우리 사회 엘리트들이 보이는 공감·소통 능력의 부족은 능력주의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가장 치명적인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능력은 밧줄이 아니라 그물이다. 얽히고설켜 서로를 지탱함으로써 살아남게 되는 생명처럼 다양한 능력은 서로를 존중하고 의지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간다. 그러면서 개인은 전인적 능력을 갖추고, 사회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들로 채워질 것이다. 비로소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낳고, 태어난 아이들은 보고 싶은 동무를 기대하며 아침잠을 깨는 그런 사회. 2023년 9월4일, 거리에서 눈물 흘리신 선생님들이 꿈꾸는 학교도 여기서 멀지 않을 것이다.
https://m.hani.co.kr/arti/science/issue/1107822.html?_fr=fb
학교 이야기/펌 자료
펌) 능력은 혼자 쓰는 밧줄이 아니라 함께 지탱하는 그물 / 남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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