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메시지 전달력이 대단하다.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좀 참고하려고 빌린 책인데, 다큐멘터리 제작자도 아니면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말았다. 다큐라는 장르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인 것도 같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싶었고, 다양한 다큐멘터리 작품들을 엿보는 재미도 있었다.
저자는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불편한 지점에서 문제 의식을 찾아내고 그것을 많은 이가 공감하도록 설득력 있게 재구성하는 작업이 다큐다. 따라서 다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며, 문제의 발견에서도 그것의 전달에 있어서도 제작자의 '관점'이 가장 중요한 장르다. 그가 바라본 것을 타인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저자는 말한다. 다큐멘터리는 "내가 본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다큐멘터리는 제작 주체인 내가 본 무엇을 제3자인 다른 사람, 즉 관객에게 보여주는 행위의 총체다. 이 말을 뒤집으면, 내가 본 것이 없으면 보여줄 것도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때 이 문장에서는 강력한 의문이 발생한다. '내가 본 것'이라고 할 때, 저 '본다'는 것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다. (...)
엄밀하게 따지자면 우리가 생물학적인 눈으로 보는 행위도 실제로는 많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있는 시간에 '본' 모든 것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의식적으로 눈여겨본 것이 아니고 타성적으로 사물의 표면을 미끄러져 지나갔기에 두뇌는 그것을 본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고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본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대상을 바라볼 때, 나의 뇌는 그 대상에 대해 '해석'을 한다. A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 B를 불러 머플러를 둘러주는 모습을 보고 A는 B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C가 D를 만나 활짝 웃고 인사했는데 돌아서자마자 무표정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는 가식적이라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에서 대상을 '본다'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이런 해석적 행위가 포함됨을 의미한다. 그냥 거기 무엇이 있다는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포함됨으로써, 비로소 다큐멘터리적 '보는' 행위가 성립되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이러한 해석이 독창적일수록 그 가치는 빛난다는 조건이 따른다.
100명이 보아서 100명이 똑같은 해석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해석이랄 게 없는 진부한 무엇일 것이다. 100명이 같은 대상을 보았어도 나만이 '본', 즉 나만의 시각으로 '해석'한 무언가가 있을 때, 다큐멘터리스트와 다큐멘터리의 존재 가치가 증명되는 것이다. 이러한 보는 행위를 나는 '발견'이라 명명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나는 다큐멘터리를 '발견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스트는 어떤 현장에서 자신이 '본'(발견한) 무엇을 자신이 본 바대로 타자들에게 '보여주려는' 존재이며, 다큐멘터리는 자신이 '본' 것을 자신이 본 바대로 제대로 '보여주려는'(전달하려는) 온갖 노력의 결과다. 다르게 말해, '본다'는 행위가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보여주는' 행위는 '어떻게'를 추구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 나는 다큐멘터리의 기본 태도라고 생각한다. (p16-17)
내가 본 것, 더 정확히는 내가 발견하고 새롭게 해석한 현실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인가. 저자는 이게 다큐멘터리의 기본이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다큐멘터리의 핵심은 현실, 시각, 메시지, 설득이다. "내가 보는 행위를 통해 '현실'과 '시각'은 결정되며, 내가 보여주려는 의도와 방법론에 따라 '메시지'가 발생하고 '설득'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다큐멘터리의 기본 개념을 정립한 뒤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이야기의 기본 틀, 소재에 접근하는 법, 자료 조사, 촬영과 인터뷰, 편집 등에서 고려해야 할 점을 하나하나 짚는다. 디테일한 지점이 많음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까닭은 다큐멘터리가 바로 우리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리라. 삶의 문제 상황을 어떻게 포착하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다큐를 제작할 때 지니는 질문이 교사나 창작자들이 갖는 질문과 동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삶을 다각도에서 포착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다루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은 영감을 주리라 생각한다.
다큐멘터리스트는 기본적으로 '질문하는 사람', 영상 편집은 '리듬을 만드는 작업'이라는 말도 기억에 남았다. 책에 좋은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꼭 봐야겠다.
다큐멘터리스트는 모든 곳에서 질문을 찾아낸다. 다큐멘터리스트는 일상의 회의주의자다. 의심하고 질문할 수 있을 때, 공고한 현실의 균열로부터 '다른' 어떤 것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p47
두 말하면 잔소리지만 다큐멘터리에서는 현장이 가장 설득적이다. 백 마디 설명보다 상황 자체가 주는 울림이 더 크고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어떤 소재든 현장을 발굴하는 것은 창작자의 소명이다. (...) 추상적인 설명도 현장의 구체적 상황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 훨씬 생생하고 이해가 빠르다. p330
인물이 그 자신의 고유성을 잃어버리고 단지 줄거리를 운반하는 도구로서 존재하는 다큐멘터리는 당연히 재미없다. 인물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에서는 줄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캐릭터의 고유성을 발견하는 일이다. 고유성이 곧 그 캐릭터의 매력이다. 그 매력은 거대한 것보다 사소한 것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p331
편집에서 리듬을 만드는 방법
1) 도입에서 동기를 부여하라
2) 시퀀스와 신의 용도를 명확히 인식하라
3) 수수께끼를 갖게 하라
4) 정보는 나누어주라
5)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후반에 배치하라
6)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키며 또 배반하라
7) 현장이 가장 설득적이다
8) 인물은 이야기를 운반하는 도구가 아니다
9) 일상과 거리가 먼 소재일수록 개인적 삶과의 관계를 환기시켜라
10) 영상은 직관적 감성적 매체임을 인식하라
11) 결론을 강요하지 말라
12) 관객의 눈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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