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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에세이

인생이 내추럴해지는 방법 / 신이현 __ 농사 지으러 한국에 온 프랑스 농부

by 릴라~ 2023. 10. 6.

여기, "땅이 노래하게 하라"를 외치는 농부가 있다. 농사를 너무 짓고 싶어서 엔지니어를 때려치고 한국 충주에서 와인을 만드는 프랑스 남자. 왜 한국이냐고? 파리에서 생활하는 것도 향수병으로 힘들었는데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프랑스 농촌에서 늙어갈 게 두려운 한국인 아내가 한국을 택했다. "농부만 되면 되는 거지?" 하면서. 
 
대책 없이 프랑스 생활을 다 정리하고 한국에 와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다가 직접 땅을 사고 와인을 만들기까지 고군분투한 기록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꿈 하나만을 믿고 모두가 만류하는 농사를 짓기까지 그들은 많고 많은 산을 넘었는데, 어찌어찌 지금도 생존에 성공해 있다. 프랑스 농부의 아내 신이현 씨는 전직이 작가다. 글솜씨가 뛰어난 이라 이야기 하나하나가 유머러스하고 실감나게 잘 읽힌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소중한 진짜 이유는 바로 프랑스 농부의 가치관 때문이다. 그는 땅을 사람만큼, 아니 사람보다 훨씬 귀하게 생각한다. 땅이 편안하고 노래할 수 있도록, 여느 애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지극 정성을 기울인다. 미생물이 잘 자라도록 트랙터로 갈지 않고, 호밀과 각종 허브를 심어서 흙을 덮어주고, 벌을 불러모으고, 새집을 짓는다. 포도밭인지 잡초밭인지 당췌 구분 가지 않는 그 땅을 고집불통으로 그의 철학대로 가꾸어간다. 그가 이 땅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경건하고 경탄스럽다. 아, 땅이 저런 것이구나, 책을 읽으며 비로소 알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또 하나 알게 된 게 있다. 좋은 와인은 바로 그 땅의 온기와 생기와 냄새를 봉인한 것이라는 것. 땅이 다르면 와인 맛도 다르다. 한 잔의 와인이 대지의 기운을 마시는 거라고 이 농부는 생각한다. 그래서 농부가 생산하는 모든 와인은 내추럴 와인이다. 인공 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는다. 시드르를 발효시킬 때도 사과 표면에 본래 뭍어 있는 야생 효모를 이용한다. 

 

그 맛은 어떠냐고? 시드르 한 병을 주문해 마셨는데, 정말 맛있다. 청량감이 들고, 자연스러운 맛이다. 취하지도 않는다. 탄산도 자연 발생한 천연 탄산이다. 가격이 3만원 대라 자주 마시기는 부담스러우나 정말 산뜻한 맛이라 내내 생각이 난다.  다른 와인도 궁금해서 결국 못 참고 주문을 넣고 배송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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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터로 쉽게 땅을 갈 수 있겠지만 너무 무겁다는 게 문제야. 무거운 기계로 왔다 갔다 하면 땅이 딱딱하게 붙어 버려. 그러면 땅속 미생물이 죽고 식물들은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 비라도 오면 땅은 더욱 굳어져 벽돌처럼 단단해져 버리지. 이런 땅에 비료 뿌리고 제초제 치고 영양제를 듬뿍 도포한 뒤 비닐까지 꽁꽁 덮어 주다니.... 아, 내가 땅이라면 정말이지 미쳐 버릴 거야! 가엾은 흙들. 나는 너를 노래하는 땅으로 만들어 줄 거야."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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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포도 넝쿨들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우며 사랑의 밀어를 피부어댔다.


"아마도 여긴 엣날에 떡갈나무숲이었을 것 같아. 이것 봐. 떡갈나무를 벤 둥치야, 백 년은 된 것 같지 않아? 베지 말고 그냥 뒀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는이 언덕에 살다가 사라진 모든 나무를 아쉬워한다. 특히 높은 떡갈나무는 미생물을 폭발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어 주변의  모든 식물들을 치유해 준다고 한다. 식물들의 뿌리는 본능적으로 떡갈나무가 있는 곳으로 향해 가는데, 거기에 가면 온갖 좋은 박테리아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온갖 전통요법을 알고 조제해 주는 동네 할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아이가 아프면 무조건 동네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엄마처럼 식물들도 몸이 아플 때는 떡갈나무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면 나는 정말 신기해서 그를 본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냥 월급쟁이 엔지니어였다. 어떻게 이런 것들을 다 아는지 모르겠다. 떡갈나무 신의 계시라도 받은 걸까.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잖아. 나무들도 여러 종이 함께 어울려 살 때가 제일 좋아, 모자란 것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거든, 포도밭에 복분자랑 복숭아나무, 보리수나무, 회화나무 같은 여러 나무들을 심는 것도 서로서로 모자란 것을 주고받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서야. 인간 사회의 이상적인 민주주의 형태 같다고 할까."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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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열기와 농부의 땀, 먼지, 파파야 밭고랑을 흐르는 진흙탕 물의 맛이 그대로 느껴졌다. 과일을 먹으면서 그렇게 땅의 냄새와 열기를 느껴 보긴 처음이었다. 강렬했다. 그 뒤부터는 과일을 먹을 때면 그 때의 그 기분을 느껴 보기 위해 집중하는 버릇이 생겼다. 밭에서 갓 딴 복숭아를 먹으며 그 너머 희미하게 땅과 바람의 맛을 느낄 수 있을 때면 굉장히 기분이 좋아진다. 지구의 속 깊은 어딘가에서 길어 올린 물을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내추럴와인도 그런 것이다. 집에 내추럴와인 한 병이 있다는 것 은 와인이 온 땅과 그해의 비바람, 그 풍경을 병 속에 봉인해 둔 것과 같다. 내추럴와인은 기본적으로 유기농 과일을 손으로 수확해 서 착즙한 뒤 아무것도 넣지 않고, 필터링이나 살균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만든 와인을 칭하는 말이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술이다. 인간이 좋아하는 입맛에 맞추기 위해 뭔가를 첨가해 와인을 제조하는 것이 아닌 자연이 준 그대로의 과일을 발효해서 만드는 것이다. 과일이 자란 땅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다. 술을 마셨을 때 '이건 너무너무 맛있다'는 평가는 입맛에 따른 각자의 취향이겠지만, 실제로 맛있는 술에는 소비자의 입맛에 맞추려고 많은 트릭이 있다.


언제부턴가 나는 술을 마실 때 얼마나 맛있는가'보다는 얼마 나 내추럴한가', '얼마나 신선하고 살아 있는가'에 중점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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