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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이야기/여행 단상

비밀의 숲, 곶자왈 - 제주올레 11코스

by 릴라~ 2010. 1. 13.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어느새 눈으로 바뀐다. 이런 날씨에 걸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올레 11코스 곶자왈 입구, 신평리에 내렸다. 당분간 식당이 없을 것 같아서 곶자왈 입구 편의점에서 라면을 시켰다.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있는데 뒤따라 들어온 한 청년이 자신이 시킨 김밥을 절반 잘라 준다. 사양해도 계속 권해서 감사히 먹었다. 편의점을 나서니 눈보라가 그새 물러나고 햇볕이 환하다.

연말은 대개 조용히 보내는 편인데 올해(아니 작년)엔 왠지 일출을 꼭 보고 싶었다. 애초에 마음에 담아둔 곳은 마라도였다. 먼 길 운전할 필요 없이 바로 앞에서 한 해의 지는 해와 새로 떠오르는 해를 한꺼번에 맞이할 수 있는 곳. 인파로 붐비지도 않을 테고.

새해까지는 며칠 여유가 있으니 그 사이엔 올레길을 걷자 싶었다. 곶자왈, 지난 가을 이 앞에서 길이 끝났다. 통과하는데 한 시간 반쯤 걸린다고 해서 다음으로 미루어두었던 곳이다.

‘곶자왈’은 원시림을 가리키는 제주 사투리다. 용암이 쪼개지면서 요철 모양으로 생긴 지대에 저절로 우거진 숲을 뜻한다고 한다. 희귀한 식물이 많이 살고 있어서 학술적으로도 중요하다고. 다만 사유지가 많아서 보존이 쉽지 않은 게 문제라고 한다. 골프장 건설 등으로 이미 많이 망가졌으며, 그래서 곶자왈을 공유지화하려는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곶자왈은 제주 동부와 서부 지대에 분포하는데, 올레 11코스에 있는 곶자왈도 그 중 하나다.

혼자 어둑한 숲길을 통과하자니 약간 으스스한 느낌도 들었다. 저 깊은 숲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저마다 강한 카리스마를 드러내면서 내게 바짝 다가온다. 이 숲의 주인은 자신이라고 말하려는 듯이. 그랬다. 이곳은 그들의 세계였다. 나는 낯선 땅 위를 잠시 스쳐가는 나그네일 뿐. 태초의 제주의 모습이 아마 이러했지 않을까.

올레 표시 리본이 아주 많이 달려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두려움과 낯설음이 점차 가실 무렵 숲길이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걸은 구간은 한겨울에도 푸른 터널숲, 제주가 이런 아름다운 숲을 간직하고 있었다니, 놀랍고 신기했다. 초반엔 빨리 이 숲을 벗어나야지 했는데, 마을길이 나타나자 벌써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곶자왈처럼 우리 역시 가슴속에 저마다 비밀의 숲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을 것 같다. 진짜 이야기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11코스가 끝나는 지점에 무릉 생태학교가 있었다. 폐교를 개조해서 만든 숙소로 겨울에는 솔직히 좀 추웠지만, 여름이라면 아주 운치가 있을 것 같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었더니 4시인데 벌써 배가 고프다. 좀 전에 본 11코스 끄트머리 편의식당에 갔는데, 국수 종류를 빼곤 메뉴가 다 2인분 이상이었다. 내가 밥을 먹고 싶어하니까 주인장이 1인분으로 팔겠다면서 감자탕을 내놓았는데, 세상에, 밥이 찬밥이었다. 전자레인지가 없다나. 결국 냄비에 다시 데워주기는 했지만 원래 식었던 밥이 맛있을 리 없다. 10분만 더 걸으면 ‘풀내음식당’에서 5000원에 푸짐한 정식을 먹을 수 있었을 텐데(뒤에 온 올레꾼들이 이 집 밥이 맛있다고 함), 8000원치곤 너무 부실한 식사.

이야기를 들은 대학생들이 ‘11코스가 싫어졌겠어요’ 한다. 그렇진 않다. 사소한 몇 가지 때문에 그 길 전체의 아름다움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행길의 이 마음이 일상 생활에선 잘 안 되는 게 문제지. 한두 가지 속상한 일이 살맛을 똑똑 떨어뜨리니. 작은 일에 걸려 넘어지는 건 눈앞의 일에 갇혀서 삶을 더 넓은 시야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런 시간이 학창 시절은 물론이고 이후로 내가 맺어온 관계 속에도 부족했다. 청춘에 필요한 것은 입시 공부가 아니라 그런 탐색의 시간이다. 

방이 추워서 다들 난롯가에 모여들었다. 대학생, 삼십대, 사십대, 육십대, 골고루다. 장작을 태우는 이 추억의 난로를 두고, 대학생들이 자기들이 초등학교 때까지 봤다고 하자, 어른들이 세대 차가 별로 안 난다고 하며 웃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여행 온 학생들, 별 이야길 나누진 않았지만 그들의 기운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나이 들수록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힘을 잃어간다는 것. 세상의 너무 많은 것들이 우리 안으로 침투하여. 또 이미 잔뜩 늘어난 책임과 의무들로 인하여.

젊음의 힘은 자신에 대한 순수한 관심인 것 같다. 세상 속 일부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경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한 개별적 존재로 사고하는 힘을 약화시킨다. 인간은 이 세상의 일부이면서도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라는 것, 길은 여행자에게 그 사실을 깨우쳐준다. 난롯가에서 겨울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열 시를 넘어서자 다들 잠자리로 들어갔다.

*걸은 날. 2009.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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