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도에서 신년 일출을 볼 계획이었는데, 제주 전해상에 주의보가 내려서 30일부터 31일까지 배가 전혀 뜰 수 없단다. 송악산에서 봐야 하나 하던 차에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대학생 K가 자기는 한라산 야간산행을 하고 한라산에서 일출을 볼 거란다. 지나가면서 한 말이었는데 그 말 속에 담긴 어떤 열정 때문이었을까, 계속 한라산이 마음에 맴돌았다.
그 제안에 솔깃해진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으니(곶자왈 입구에서 만났던 김밥 청년을 숙소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버스 타고 가면서 내내 한라산 생각하다가 핸드폰까지 잃어버렸다고. 그래서 둘이는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12월 31일 밤, 성판악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한라산으로 갈까. 아니야, 거기서 일출 볼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쟤가 아직 어려서 산에서 안 떨어봐서 그래. 기껏 일출 하나 보자고 밤새도록 그 추위에 고생을 한담?’
일단 13코스로 출발하려고 짐을 챙기고 있는데, 전화통을 붙들고 있던 K가 신나서 외친다.
“마라도에 배 뜬데요.”
모슬포항은 안 되고 송악산 선착장에서 10시에 딱 한 척만 뜬다고 한다. 4박 5일 일정 동안 비양도, 가파도에 다녀왔고 다음으로 마라도, 한라산에 가려던 K는 하고 싶은 일이 다 뜻대로 되었다며 신이 나 있다. 마라도 짜장면을 꼭 먹어야 한다면서. 나 또한 원래 계획도 그렇고 해서 마라도로 일단 떠났다.
파도가 정말 심했다. 배 가장자리에는 파도가 덮쳐서 서 있을 수가 없다. 섬에 도착할 즈음 안내 방송이 나왔다. 풍랑이 심해서 한 시간 안에 배로 돌아와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마라도에서 이틀 혹은 그 이상 머물러야 할 거라고.
겨울 마라도, 바람과 파도가 온 섬을 흔들어대고 있는 국토 최남단의 정취는 남달랐다. 바람 때문에 걷기가 힘들 정도였는데, 우리는 빠른 속도로 섬을 한 바퀴 돌고 짜장면집에 앉았다. 관광객도 별로 없고 바깥에서는 바람이 윙윙 소리내며 운다.
"며칠간 배가 못 뜬데요." 물을 내오는 아가씨에게 말을 걸자 “배가 못 들어오면 그 때가 우리가 쉬는 때지요.” 라며 웃는다.
짜장면은 전에 먹었던 집보다 맛이 없다. 너무 달았다. 집집마다 맛이 다른 듯. 다 먹고 나서 K가 묻는다.
“정말 여기서 머무실 거예요?”
“그러고 싶은데, 오래 못 나올까봐 마음에 걸리네요. 날씨로 봐선 여기서 일출 보기도 힘들 것 같고.”
바람 소리를 듣는 그 순간만큼은 그곳을 떠나기 싫었다. 마라도가 지닌 독특한 분위기, 고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분위기 때문에. 네팔 히말라야 3000미터 이상 올라갔을 때의 느낌과 닮았다.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느낌.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어떤 경계 같은 느낌. 내가 두고 온 세상이 저 멀리 있고 그 세상이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다가오는 느낌. 이 느낌은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망설임은 계속되었지만, 마지막엔 한라산이 승리했다. 배를 타고 다시 뭍으로 나왔다.
*여행한 날. 2009. 12. 30.
국내여행 이야기/여행 단상
하루에 단 한 차례 뜬 배 - 겨울 마라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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