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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 없이 순간 순간에 집중하는 것, 이것이 여행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순간 순간을 깊이 응시하는 것, 마음과 몸이 함께 움직이는 것, 그리고 살아 있음이 그저 즐거워지는 것. 마운트 쿡에서 보낸 시간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집을 떠나온 지 불과 사흘 정도가 지났지만, 작년 한 해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을 잊어 버릴 정도였다. 알랭 드 보통이 언급한 대로 여행은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을 내게 보여 주었다. 100% 나 자신을 위한 시간, 그리고 온전한 휴식. 나는 어느새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었고, 날씨와 내 주위를 둘러싼 것들에 한층 민감해져 있었다. 밤 사이 날씨는 또 변해서 아침에 잔뜩 흐린 가운데 마운트 쿡을 떠났다. 하지만 퀸즈타운에 도착하니 하늘은 다시 맑아 있었다. 호수를 끼고 있는 퀸즈타운은 이름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도시였다. 전형적인 관광지로 발랄하고 활기차 보였다.
뉴질랜드 남섬의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은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으로 500여km에 이르는 트렉을 갖추고 있다. 뉴질랜드의 아홉개 '그레이트 워크스(Great walks)'에 속하는 밀포드, 케플러, 루트번 트렉이 여기에 있다. 특히 54km에 이르는 밀포드 트렉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트렉'이란 찬사를 받고 있는 유명한 길이다. 밀포드 트렉은 내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개별 트레킹의 경우 하루에 단 40명만 입장할 수 있으므로 일년 전에 예약이 마감된다. 내년 1월에 트레킹을 하려면 최소한 올 4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출발하기 한 달 반쯤 전에서야 여행 준비를 시작했던 나는 밀포드 트렉을 포기해야 할 처지였다. 트레킹을 위해 뉴질랜드를 선택했는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여행사에 문의하니 밀포드 트렉 '가이디드 워크(Guided walk)'는 다행히 몇 자리가 남아 있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싼 것이 문제였다. 고민 끝에 결국은 큰 맘 먹고 신청했다. 뉴질랜드에 다시 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이번 참에 그 아름답다는 길을 꼭 걸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이디드 워크는 정원이 48명으로 나흘간의 트레킹과 마지막 날의 밀포드 사운드 크루즈를 포함해서 총 5일이 걸린다. 호텔급의 최고급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는 매우 고급스런 트레킹이지만, 누군가의 방해 없이 혼자 숲 속을 걷고 싶었던 내게 썩 반가운 선택은 아니었다. 뉴질랜드의 트렉은 길이 아주 잘 정비되어 있어 가이드가 필요 없으며, 산장(Hut) 역시 시설이 좋은 편이다. 개별 트레커의 경우 입장료와 산장비만 내면 되므로, 미리 예약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신혼여행객, 뜨거운 샤워 없이 며칠을 보낼 수 없다거나 잘 차려진 식탁을 원하는 분들한테는 가이디드 워크가 좋은 선택이 될 수 있겠다. 루트번이나 케플러 트렉은 밀포드만큼 예약이 어렵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행 전에 미리 신청해야 트레킹을 보장 받을 수 있다. 뉴질랜드의 산장 수용 인원이 하루 약 스무명 정도로 엄격하게 제한되기 때문이다. 루트번과 케플러의 아름다움도 밀포드에 못지 않다고 들었다. 설명회가 끝나고, 모처럼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어 호숫가 레스토랑에 들렀다. 홀로 있음의 신선함에 잠겨 있었던 게 바로 어제이거늘, 부드러운 저녁 햇살이 비치는 호숫가에 앉아 있으니 사람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맞은 편 의자에 누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마음의 해안으로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나는 속으로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대체 여기 왜 혼자 온 거지?'라고.
하지만 하루가 가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이런저런 그리움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새아침, 트레킹에 대한 기대로 들뜨기만 했으니, 여행지에서 아침과 저녁의 기분은 이토록 다르다. 7일 출발하는 가이디드 워크의 참가자는 총 35명이었다. 네 명의 현지 가이드와 함께 티아나우(Te Anau)로 출발했다. 퀸즈타운에서 티아나우까지 가는 두 시간 동안 호수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호수 건너편 산들은 호수 속에서 방금 솟아난 것처럼 보였다. 막 세수를 끝낸 듯, 깨끗한 물에 몇 번 헹구어낸 듯 지극히 청정한 모습이었다. 티아나우에 도착해 점심을 들었다. 티아나우에서부터 밀포드 사운드까지는 120km, 그 가운데 약 절반 정도를 우리가 걸어서 가는 셈이다. 티아나우에서 버스로 20여분 더 들어가자 비로소 숲으로 우거진 산들이 보인다. 남섬은 그리 크지 않은 섬이지만 다양한 기후와 자연을 지니고 있다. 마운트 쿡을 위시한 서던 알프스 산맥이 워낙 높아서 비구름이 산맥을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맥 서쪽은 늘상 내리는 비로 숲이 울창한 반면 산맥 동쪽 지역에는 건조한 목초 지대가 펼쳐진다. 남서부에 위치한 피오르드랜드 일대에는 거대한 우림이 형성되어 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티아나우 호수에서 다시 배로 갈아 타고 밀포드 트렉의 출발 지점으로 향했다. 바다 같은 느낌을 주는 티아나우 호수는 뉴질랜드에서 두번째로 큰 호수로 빙하의 침식에 의해 만들어졌다. 배는 길고 좁은 피오르드 안으로 들어갔고 멀리 보였던 산은 어느새 바로 옆에 다가와 있었다.
밀포드의 숲은 색다른 식물과 푸른 이끼로 가득했다. 다소 거칠고 광대한 느낌이 드는 열대 우림과는 또 달랐다. 더 풍요롭고 산뜻하다고 할까. 뿌리가 얼기설기 얽힌 고목 사이를 걷노라면 반지의 제왕이 연상되고 금세 어디선가 요정이 튀어나올 것 같다. 무엇보다도 숲이 뿜어내는 진한 향기가 나를 미치게 했다. 걷는 동안 그 청량한 기운에 내내 취해 있었다.
뉴질랜드 사람들이 부른 노래는 내가 잘 아는 노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연가'의 멜로디가 마오리 민요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마지막 차례인 나는 진도 아리랑을 불렀다. 작년 연수 때 전문 국악인으로부터 한 시간 동안 배운 것이 이렇게 유용할 줄은 몰랐다. 배운 대로 정확하게 부르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음률은 단연 독특했고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가 이어졌다. 홍세화씨의 책에서 한국인은 모두 가수라는 글을 본 기억이 난다. 내 노래 실력이야 그저 보통에 불과한데도, 주위에서 매우 아름답고 인상적인 노래라고 다들 한마디씩 한다. 그러나 사람들과의 즐거운 한때는 이 날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이 그룹에 대체로 적응하지 못했다. 가장 큰 원인은 언어의 장벽이었는데 뉴질랜드에 와서 영어 때문에 고생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키위 액센트'가 워낙 강해서 가이드의 설명을 알아 듣기가 힘들었다. 키위는 세 가지 뜻을 담고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과일의 이름이자 뉴질랜드의 새 이름이며, 뉴질랜드 사람도 가리킨다. 매일 밤 밀포드의 자연 및 다음 날 일정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전체 진행되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내 영어 실력이야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한 게 전부지만 그 정도로도 거의 모든 대화가 가능하다. 지금껏 어느 곳에서건 영어로 인해 불편한 적은 없었다. 처음엔 영어 종주국에 와서 이렇게 헤매는가 했지만 그게 이유는 아니었다. 5년 전 캐나다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다녔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른 곳에서 만난 프랑스인도 키위 발음이 백년 전 영국 발음이라며 불편함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가이드들은 친절했지만 그건 기본적인 친절이었고 비영어권 여행자들을 위해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는 배려는 없었다. 그것은 남섬 어디를 가든지 마찬가지였다.
클린턴 강과 계곡을 따라 이끼 자욱한 숲길이 두세 시간 동안 이어졌다. 안개와 보슬비 속에서 어스름한 숲속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고목들이 줄지어 서 있는 길은 한적하고 아름다웠다. 숲은 자신이 태어난 모습 그대로의 온전함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밀포드의 명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 오자 하늘은 점차 밝아졌다. 우리는 숲을 빠져 나왔고 눈 앞에는 초원이 펼쳐졌다. 그 양 옆으로는 가파른 절벽이 버티고 서 있는데, 그래서 클린턴 계곡은 '수직의 계곡'이라고도 불린다. 절벽 아래로 시원스레 쏟아져 내리는 폭포는 정말 장관이었다. 계곡을 통과하는 동안 놀랍게도 양 옆으로 수백개의 폭포가 줄을 잇는다. 빗방울이 거세어질수록 물소리는 더욱 힘차게 들렸으며, 폭포의 행렬도 계속되었다. 그 씩씩하고 거침 없는 광경은 가슴 밑바닥까지 시원하게 훑고 갔다. 안개에 가로막혀 원경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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