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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영화, 드라마

이창동의 '시'

by 릴라~ 2010. 5. 30.
감독 이창동 (2010 / 한국)
출연 윤정희, 이다윗, 김희라, 안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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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좌석에서 보다보니 화면이 약간 흔들리고 살짝 지겨운 감도 있었는데 다 보고 나서 이렇게 강렬한 여운이 남을 줄은 몰랐다. 말 그대로 한 편의 '시'를 읽은 것 같다. 이 영화가 내게 한 편의 '시'였다. 시란무엇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그런 화두로 남은 영화. 해답을 주는 게 아니라 하나의 '질문'으로 남은 영화. 윤정희를 보며 내내 답답해 했는데, 이 영화가 내게 주는 질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스포일러 있음)

양미자(윤정희 역)는 인생의 말년에 자신의 삶을 시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만 시를 쓰지 못한다. 시인 김용탁(김용택 시인이 직접 나와서 놀랐다)은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시상은 가만히 있는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두 발로 찾아다녀야 한다고.

가난하지만 늘 예쁘게 차려입고 꽃을 좋아하고 소녀적 감상에 젖어있던 양미자는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 꽃과 나무와 주변 풍경을 살피던 그는 어느덧 자신의 외손자가 저지른 성폭행으로 죽어간 여중생의 흔적을 찾아다니기 시작하고, 그 불행과 비극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것을 보상금으로 덮지 않고 손자로 하여금 죄값을 치르도록 했을 때, 비로소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그 시는 그녀가 앓던 병 알츠하이머, 명사를 먼저 잊어버리고 다음엔 동사를 잃게 된다는, 망각의 진행 과정에서 그녀가 세상에 남긴 뚜렷한 자취였다. 그녀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지만, 시를 쓰려는 그녀의 강한 의지는 그 망각의 과정 속에서도 '땅에 떨어진 살구가 제 한 몸 부서뜨려가면서  다음 생을 준비한다는' 시상을 얻게 하고, 여중생 희진이 떨어져 죽은 다리 위에서 희진의 얼굴을 만나고, 그녀의 세례명 '아네스'를 영원히 기억하게 하는 시를 남긴다.

이 영화를 본 이들이 노무현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 같다. 이창동 감독은 노무현의 죽음이 그냥 잊혀져 우리들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를 원치 않았으리라. 극중 양미자가 아네스의 노래를 썼듯이 어쩌면 이 영화는 감독이 고 노무현 대통령을 위해 쓴 한 편의 시라 해도 좋을 것이다. 양미자가 알츠하이머 속에서도 시를 쓰고자 분투했듯이, 감독 역시 이 흐르는 시간의 늪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다시 불러내고자 했던 것 같다. 양미자가 희진이 죽고 나서야 희진의 존재를 알아갔듯이 많은 이들이 대통령님의 서거 이후에야 그를 알려고 노력하였으므로, 영화 전체가 그 분의 죽음 이후를 상징하고 있었다.  영화 속 양미자가 시를 썼듯이 감독은 그 분을 기억하기 위해 영화라는 '시'를 쓰고 있었다.

그 시는 표면적인 아름다움에 천착하는 것으로는 결코 가닿을 수 없으며, 우리가 타자에게로 건너갈 때, 내가 몸서리칠 만큼 슬프고 아픈 너의 삶 속으로 한 발 들어갈 때, 그 고통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껴안을 때,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세계이다. 영화 속에서 그것은 양미자가 비극을 인식하고 통곡했을 때, 간병인 노인을 받아들였을 때, 음담패설을 좋아하는 경찰관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손자를 경찰서로 보냈을 때 등으로 형상화된다. 시는 삶의 모든 추함과 아픔과 고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진정한 현실에서 피어나는 꽃임을 영화는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영상미도 훌륭했지만, 배우 윤정희의 주름진 얼굴이 주는 인상도 깊다.

영화의 말미는 희진이 사라진 자리, 그리고 시를 남기고 양미자가 사라진 자리를 보여준다. 그 빈 자리는 우리 곁에 있었던 누군가의 부재를 아주 절절히 느끼게 하는데,  이제 없는 '그'는 희진이기도 하고, 희진을 기억하다 사라진 미자이기도 하다. 우리 곁에 살다 간 그 누군가이기도 하고, 그 누군가를 기억하다가 때가 되어 또한 이 세상을 떠나게 될 우리들 자신이기도 하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기도 하고 그를 기억하는 우리이기도 하다.

외손자의 끔찍한 범행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겠다고 꽃을 쳐다보던 양미자가 내내 답답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통령님이 가신 빈 자리에, 그를 기리는 우리들의 노래만이 남았는데, 언젠가 우리들도 떠나겠지. 양미자처럼. 우리들이 남길 '시'는 무엇일까.


아네스의 노래

그곳은 얼마나 적막할까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좋아하는 음악 들려올까요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해야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 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이제 어둠이 오면
촛불이 켜지고 누군가 기도해줄까요

하지만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당신을 축복하리

마음 깊이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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