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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을 적다

눈을 감으면 세상이 더 잘 보인다

by 릴라~ 2004. 7. 23.

눈을 감으면 세상이 더 잘 보인다. -톰 웨이즈

불과 2년 전 일이지만 까마득한 오랜 일로 느껴진다. 다른 허다한 중병에 비한다면 병도 아니라 할 만큼 가벼운 암이었고, 치료 과정도 길지 않았지만 그 암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과 함께 내게는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또한 서른을 눈 앞에 둔 나이, 삶의 기로에 서서 여러 고민이 많던 때라 당시로선 마음의 충격이 컸다.

직장에 찾아온 보험설계사 아주머니께서 암보험을 들라고 권유하셨을 때만 해도, 나는 암 같은 것 걸릴 일은 없을 거라면서 손을 내저었는데, 그로부터 두 달 뒤에 수술을 받게 되었으니 앞 일은 절대 장담할 수 없나 보다.

목에서 만져지는 단단한 종양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듯해서 그 해 5월 초에 종합 검진을 받았고, 악성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날짜가 나오는 대로 즉시 수술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5월 말에 갑작스럽게 수술을 받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

수술 전날 밤, 수술 동의서를 작성하면서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 따위는 으레 하는 이야기라 가볍게 넘겼지만, 하필이면 종양 위치가 성대 신경에 닿아 있어서 암세포가 성대를 먹었으면 성대를 살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뇌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가져다주시는 신경안정제를 먹고서야 간신히 잠이 들 수 있었다.

3시간이 좀 넘게 걸린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제일 궁금했던 건 내 목소리였다. 의사 선생님이 말을 해보라 하셨을 때 다소 쉰 목소리였지만 소리엔 이상이 없었다. 선생님께서는 미소 지으시며, 회복되면 목소리가 좋아질 거라고, 다행히 종양과 성대 신경이 딱 붙어 있어서 종양만 살짝 떼어냈다고 하셨다.

그날 밤은 호흡도 가쁘고 다소 힘들었지만, 몸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꼼짝 못하고 가만 누워 있던 이틀이 지나고 소변줄을 떼어내었을 때에야 비로소 내 몸이 내 몸처럼 느껴졌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입원해 있으면서 목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수술 부위가 목이다 보니 목을 좌우로 전혀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늘 똑바로 누워 자야 하는 것이 곤욕이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엉덩이 부위가 아파 왔고, 옆으로 돌아누울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할 것 같았다.

열흘이니까 견디지 만약 내게 한 달 이상 이렇게 누워 있으라면 그대로 죽고 싶을 거란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허다한 중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병원에 누워서야 비로소 그분들의 고통을 십 분의 일 혹은 백 분의 일 정도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즈음 2002 한일 월드컵이 시작되었고 한국의 첫 경기 폴란드전을 병실의 작은 텔레비전으로 보았다. 텔레비전이 워낙 작아서 공이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월드컵의 첫 승리는 병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에게 신선한 감격을 선사했다. 우리 팀의 승리는 그 순간만큼은 우울함을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수술 직후 거의 죽어 있던 것처럼 느껴졌던 내 몸도 퇴원할 무렵엔 거의 정상이 되었다. 하루하루 조금씩 몸이 회복되기 시작해서 평소 상태를 되찾아가던 그 열흘 간의 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내 몸에 피를 돌게 하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이 생명의 힘, 이 힘의 정체는 뭘까. 내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내 세포들을 깨워서 내 몸을 회복시켜주는 이 시스템!

인간의 몸에 대해 참 많은 것을 느꼈다. '피'와 '살'을 지닌 인간! 성서의 표현은 그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절묘하다. 삶에서 몸이 차지하는 자리를 그만큼 깊이 인식한 적이 없었다. 몸이 곧 법당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몸은 내 영혼이 머무는 집. 인간의 몸이 성스러움을,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성스러움을, 아니 그 몸을 움직이는 '생명의 힘'이 성스러움을 느낀 시간이었다.

인간은 외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마치 나무 끝에 매달린 나뭇잎과도 같이, 큰 물 속의 작은 물방울과도 같이, 우리들 각자가 지구와 우주라는 이 큰 생명의 일부임을 깊이 깨달은 시간. 늘 그 품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음을 얼마나 자주 잊고 살았던가. 이 생각은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느낀 절절한 고독감을 견딜 수 있게 해준 힘이 되었다.

정밀 검사 결과 종양은 결국 악성으로 판명이 났고, 두 번째 치료가 시작되었다. 갑상선을 완전히 제거했기 때문에 수술 후에는 매일 갑상선 호르몬제를 복용했는데,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를 위해서 한 달 동안 호르몬제 복용을 중지해야 했고, 마지막 2주 동안은 소금이 들어간 음식을 죄다 끊어야 했다.

호르몬을 끊은 지 보름을 넘어서자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했으며, 특히 밤에 온 몸이 저려서 자주 깨었다. 어머니가 주물러주시고 나서야 잠이 스르르 들곤 했다. 때론 저녁을 먹을 때 숟가락 들 힘이 없었다. 어서 한 달이 가라고, 그래서 시큼한 김치를 사각사각 베어 먹으면 좋겠다고 소원했다.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

갑상선암은 순하고 전이가 잘 되지 않는 성질 때문에 방사선을 직접 쬐는 치료 대신에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를 받는다. 그래서 한의사인 동생은 내가 운이 좋은 거라고 했다. 동위원소 치료는 방사성 처리를 한 요오드를 먹는 것이 전부이다. 혹여 수술로도 제거되지 않은 작은 갑상선 세포들이 남아 있을 수가 있는데 그 세포들은 몸에 요오드가 들어오면 재빨리 흡수한다. 그 요오드는 방사성 처리가 되었기 때문에 남아 있던 갑상선 세포들이 그것을 흡수하는 동시에 죽게 되는 것이다.

치료를 위해 '납차폐실'이라는 특별한 병실에 3박4일 동안 입원했다. 치료 기간 동안 몸에서 약한 방사선이 나오기 때문에 아무도 만날 수 없도록 한 조치였다. 방 안에는 환자를 관찰하기 위한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문 옆에 밥과 약을 가져다주기 위한 작은 통로가 하나 더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전화로 지시하시는 데 따라서 통로의 덧문을 여니 납으로 된 무거운 컵이 준비되어 있었다. 뚜껑을 열고 캡슐 안에 든 알약을 물과 함께 먹었다.

점차 시간이 흐르자 구토증이 시작되었다. 속이 계속 메스꺼웠다. 나는 지시에 따라 동위원소가 몸에 잘 퍼지도록 계속 몸을 움직이고 운동을 했다. 그리고 침샘 파괴를 막기 위해서 레몬 사탕을 끊임없이 먹었다. 계속 침샘을 자극해서 침을 분비해야 한다고 의사 선생님께서 당부하셨기 때문이다. 목 주변이 점점 붓기 시작해서 턱선이 사라지고 얼굴까지 뚱뚱해졌고, 거울 속의 얼굴은 내가 아닌 낯선 타인처럼 보였다.

아마 그 기간 동안 나는 내 생애 동안 가장 많은 사탕을 먹었으리라. 혹여 침샘이 어떻게 될까 하는 노파심에서 나는 사탕을 입에서 놓지 않았다. 혓바늘이 돋아서 혀가 쓰라렸지만 눈물을 삼키며 레몬 사탕을 먹고 또 먹었다. 침의 소중함을 온 몸으로 느낀 시간이었다.

고작 나흘이었지만 내겐 한없이 길게 느껴졌던 그 시간, 친구의 전화는 지루함과 막막함을 달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퇴원하고 나서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퇴근하시면서 매일 간호사실에 들러서 CCTV로 내 모습을 보고 가셨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다 큰 딸 뒷바라지에 어머니의 고생이 가장 컸다. 가족은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소중함으로 그렇게 내 곁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나를 치료해주신 의사 선생님들의 친절과 정성에도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따뜻하고 좋은 분들이었다.

건강하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충분 조건이 될 수 있음을 깨우친 시간. 일상 속에 묻혀서 그 기억은 어느새 희미해질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때 그 마음을 떠올리고, 곧이어 지금 살아 있음에 겸허해진다.

그 경험은 나의 20대와 30대를 가르는 큰 분수령이 되었다. 나는 그 일을 통해서 비로소 삶을, 그리고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 나를 괴롭힌 것은 병보다는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냐는 마음의 저항이었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지금까지도 줄곧 그래왔음을, 삶에 저항해왔음을 발견했다. 세계는 마땅히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상을 나는 품고 있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그 간극만큼 나는 허무를 느꼈으며 세상과 친해질 수 없었던 것.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인간으로 사는 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존재하는 모순과 부조리와 불완전함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며, 여기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이 말은 불의와 타협해서 아무렇게나 살겠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환경을 나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바꿔갈 힘을 갖지 못한다는 뜻이다. 자신과 세상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자신도 세상도 변화시킬 수 없다.

세상의 불완전함-나 자신의 부족함도 포함해서-이 나로 하여금 세상과 멀어지도록 하지 않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을 때, 평화가 찾아왔다. 평화의 두 눈을 보았고 그 눈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세상의 고통에 지금도 슬픔과 고통을 느끼지만, 더 이상 그것에 압도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현재 우리의 수준인 것이며,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기에.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경험을 통째로 받아 안으며, 우리 생애 동안 한 발 한 발 끝없이 진리를 향해 걸어가면 된다. 남은 걸음은 이름 모를 친구들이 이어주리니,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과정' 속에 깃든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완전한' 것이라는 것도. 인생의 답은 여정 속에 있다. 여행의 끝에 다달았을 때 우리가 이룬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몸의 고통은 불필요한 관념적인 생각도 사라지게 해주었다. 나의 고민 중 많은 것은 쓸모 없고 무의미한 것이었다.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었던 그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잡다한 폴더를 지우듯이 내 생각과 마음을 한 차례 비워내었음을 알았고, 시간의 등불이 새로 켜진 것을 보았다. 한 시절이 끝이 났고 다시 새로운 시작이었다.

수술 이후로 나는 건강을 완전히 되찾았다. 머리도 맑아져 참 오랜만에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작년에 이어 다시 검사를 받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재발을 미리 체크하기 위한 검사인데, 이번이 마지막이길 빌어본다. 그 때문에 호르몬제를 한 달간 끊고 있는 것이 다소 고통스럽지만,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한 달이란 시간은 금세 지나갈 것을 알기에 시간과 함께 내 마음을 흘려 보낸다.

우리 삶은 모두 죽음을 향해 가는데, 100년만 더 지나면 나와 내 친구들은 모두 이 땅을 떠나고 없을 텐데, 그 진실을 망각한 채, 세상의 고통도 죄다 망각한 채, 자기 혼자만 잘 살겠다고 어디로 가는지 모를 어둠 속으로 끝없이 달려가는 삶의 모습들을 볼 때면 마음이 무겁다.

질병으로 고생한 시간은 내게 있어 축복이었다. 내 삶 속에 찾아온 죽음의 흔적을 일찍이 들여다보았고, 내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던져 버릴 수 있었기에.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수술 결과가 좋았기에 할 수 있는 말임을 또한 알고 있다.

병마로 고통 받는 모든 분들이 하루 빨리 낫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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