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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사회, 과학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 신영복

by 릴라~ 2011. 4. 20.

신영복 선생의 서울대 초청강연집. 이분의 문장에 깃든, 체화된 언어에서 나온 품격과 깊이는 이 책에서도 변함 없었다. 얇은 책이지만 삶과 세상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넉넉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에밀레종처럼 멀리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소리랄까.

선생은 감옥 생활 20년이 자신에게 진정한 의미의 큰 배움터 '대학'이었다고 말한다. 주체와 대상을 딱 갈라서 주체가 대상을 분석하는 근대적 문맥을 존재론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곳이었다고. 선생에게 그곳은 주체가 자신의 사유의 테두리 안에서 대상을 해석하는 데서 벗어나 타자의 삶의 자리 속으로 침투해들어가 그와 공감하는, 그래서 자신의 삶까지 스르르 변화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선생이 감옥에서 겪은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하나같이 심금을 울리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선생은 자신이 경험한 관점의 변화가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생성 혹은 되기(becoming)'의 맥락과 닿아 있음을 이야기했다. 근대가 도달한 최고의 가치가 타인과 그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관용'이라면, 탈근대가 추구하는 가치가 '되기'라는 것이다. 진정한 관용은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끼리 서로 공존하는 '조화(調和)'의 '和'가 아니라 내가 너와 더불어 함께 변화하는 '化'라는 말씀이 좋았다. 진정한 공존은 차이의 인정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변화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는 다름의 인정에도 이르지 못했지만 우리의 미래에 필요한 가치가 '化'임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선생은 감옥 안에서 자신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20년 후 세상에 나가보니 친구들이 옛날과 꼭 같다고 해서 많이 놀랐다 한다. 그러면서 변화의 의미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개인적 변화의 한계를 고민하면서 개인적 변화가 세상의 변화로 이어질 때 변화의 참뜻이 살아난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생에게 나무의 완성은 '숲'이다. 우리 삶은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이다.

혹자는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에 어디로 갈지 '방향성'이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단다. 신영복 선생은 목적이나 방향을 미리 설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여럿이 함께 가다 보면 길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미리 정해진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가는 길 속에 답이 있다고. 길을 가노라면 방향이 생성되기 마련이라고. 목적을 딱 정해놓고 그리로 가는 것이 근대적 사유라면 선생은 나아가면서 길을 만드는 생성과 변화로서의 삶, 탈근대적 문맥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 삶이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누구와 더불어 가고 있는지, 우리가 이루려는 변화는 어떤 것인지 곰곰 되짚어볼 수 있는 참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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