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을 작품 속에 몰입시키는 힘이 조금 부족했다.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들의 표정이 풍부하지 못한 탓인 것 같다. 구성, 편집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게 가장 큰 듯.
주인공은 평범하지만 재치 있고 귀여운 소녀 이랑, 화려하고 고상한 척 하지만 속은 따뜻한 친구 수민, 우주비행사가 꿈인, 순수하고 열정이 있는 철수, 이렇게 세 명이다. 각자 개성이 분명한 캐릭터들인데 이 캐릭터가 원래 지니고 있는 매력에 비해서 표정이 시종일관 밋밋하게 그려졌다. 인물의 개성이 좀 더 살았으면 훨씬 생기 넘치는 작품이 되었을 텐데 많이 아쉽다. 이랑과 수민이 조금씩 성장해가는 모습도 좀 더 극적이고 풍부하게 그려졌으면 좋았을 거고. 같은 종류의 성장 드라마인 일본 애니 '귀를 기울이면'과 비교할 때 스토리가 확실히 약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장면 하나하나도 참 예쁘지만, 아, 저런 순수의 시대가 있었지, 하면서 공감할 수 있어서. 주인공들처럼 순수할 때가 있었다. 우리가 원래 그러했던 게 아니라 시대가 그랬다(김일이 나오는 걸로 봐서 영화는 내 시대보다는 좀 앞선 시대다). 돈돈돈 하던 때는 아니었으니까. 사실 경쟁은 우리 때도 치열했었다. 어른들의 세계와 일정 부분 거리가 있었고 물질을 추구하지 않는 순수함이 있어서 그렇지 그때가 정신적으로 풍요롭다 하긴 어렵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여고괴담'이 공감 가는 시절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며 행복했던 까닭은 그때는 너무 익숙해서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의 아름다움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순정만화를 가져와서 학교에서 돌려보던 일, 실장의 힘이 셌던 것, 교련 시간에 붕대 감고 예절실에서 한복 입었던 일, 친구들이 소근대던 옆 학교 남학생 이야기와 '라디오 별밤'까지. 나는 별밤보다는 영화음악을 더 많이 들었지만. 그런 영화속 작은 장치들이 소소한 기쁨을 주었다. 그때는 익숙한 일상이었지만 지금 삶의 모습과의 차이 때문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오지 싶다. 누가 그랬던가. 젊음의 특징은 삶을 비극으로 보지 않는 거라고. 이 영화 속에도 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헐리웃 영화 속처럼.
그러면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그 시절이 좋은 시절이었나 하는. 초중고 시절(80~90년대 초반)을 돌이켜보면 그땐 어떤 진공 속에서 살아간다는 느낌이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걸 알지 못하는 느낌. 이유 없는 답답함 같은 것. 한 번도 자유롭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90년대 중반, 프랑스를 배낭여행하며 처음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 자유의 분위기를 우리 사회에서 느낀 건 김대중 대통령 당선 무렵과 2002년 촛불집회 무렵이다.
(8090년대는 대중문화가 지금처럼 상업 자본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의미에서라면 풍요로운 면이 있는 시절이기도 했다.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등을 통해 대학생들이 대중문화에 참여하면서 좋은 노래들이 많이 나왔고, 대중문화가 지금보다 좀 더 고급(?)이었다. 학창 시절에 벗한 것이 문고판 고전과 퀸, 오아시스, 비틀즈, 사이먼 앤 가펑클, 에어 서플라이 등의 음악, 그리고 블록버스터가 아닌 무게감 있는 외국 영화들이었기에. 프랑스 영화도 꽤 본 것 같다.)
80년대는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때, 전두환 시절이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대통령(?)이다. TV 뉴스 틀면 늘 무표정한 얼굴로 나오는 대통령, 대통령은 늘 그 사람인가보다 해서 관심 없었다. 어린 날 내 기억으론 시대의 분위기는 결코 밝지 않았다. 한편으론 무덤덤한, 한편으론 굉장히 권위주의적인 시절이었다. 반공교육을 하도 받아서 북한 사람들은 정말 뭔가 다른 줄 알았고(학교에서 만화 '똘이장군'을 틀어줌), '무찌르자 공산당' 이런 주제로 글짓기 상 받은 적도 있다(허걱).
83년인가 84년 무렵은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당시 나는 성 프란치스코회 수도회에 속한 범어성당에 다녔다(지금은 이 성당이 교구청 소속이다). 수도회 성당은 교구청 소속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리고 훨씬 검소한 분위기이다. 당시 성당에서 매월 작은 소식지를 발간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80년 광주의 사진들이었다. 흑백 사진이었지만 사진 속 피흘린 사람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신부님들이 진실을 알리고 싶어서 얼마나 가슴 답답했을까 싶다. 강론 중에 왜 자꾸 정치 이야기를 하냐며 신자들과 마찰이 많았다. 제발 정치 이야기 하지 말라고. 난 어린이 미사에 갔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한동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아 그런가보다 하고 흘려 들었다. 사진은 분명한데도 나는 그 일들이 차마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일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어디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그렇다고 있는 사진을 의심할 수도 없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이해할 힘이 내겐 없었다. 그 일은 그냥 그렇게 잊혀졌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이후로 일 년 내내 전경차와 최루탄이 TV 화면을 메웠다. 이러다가 나라 망하는 거 아니냐고, 올림픽 못 하는 거 아니냐고 주위 어른들이 말하곤 했다. TV를 보면서도 나는 그 모든 사건들이 왜 일어나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그와 동떨어진 것들을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책도 마찬가지, 정치성이 거세된 것들이었다. 고전 속에는 그런 것이 녹아있지만 내가 그 부분을 읽어낼 역량은 없었다. 책을 내 삶의 맥락과 함께 읽어내지 못했다.
6. 29 선언으로 또 한 차례 시끄러웠고 이후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부처님 귀 닮았다고 이 동네 사람들이 다 찍어주었던. 부모님도 노태우에게 투표했고(돈 몇 천 억 먹은 게 알려 진 후 부모님은 손가락 잘라야 한다고 인생 최대 실수라면서 다음 번엔 김대중, 노무현에게 투표했다.) 머리 흩날리던 백기완이 멋있었지만 그가 왜 그렇게 야권 후보 단일화를 외쳤는지 잘 알지 못했다.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씨의 방북이 또 크게 시끄러웠지만, 노태우가 왜 그렇게 나쁜 놈인지도 잘 몰랐다. 대학생들이 무수히 분신자살을 했지만 그건 나와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당시 우리 집에서 받아보던 신문은 조선일보였다(그러다 부모님이 주식투자를 하면서 경제신문으로 바뀌었다.)
중2 때인가 청소년 누리단 캠프에 온 대학생 자원봉사자들과 조별로 함께 게임하며 놀았는데 그때 너무 궁금했던 것을 물어본 적이 있다. 왜 화염병을 던지면서 데모를 하냐고. 잠시 생각하던 그는 경찰의 폭력에 맞설 수 있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옆에 있던 다른 대학생들이 중학생에겐 어려운 이야기라 해서 대화는 거기서 멈추었다. 성당의 주일학교 여름캠프에서 '아침이슬', '광야에서' 등의 노래를 배운 기억도 난다. 그 노래의 울림이 독특해서 좋아했다.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지만 운동권 노래 몇 곡은 지금도 좋아한다.
고등학교 때 좋아한 과목이 지리(인문 지리), 세계사, 역사였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신문과 TV를 보았기에 그간 일어난 '사건'은 다 알고 있었지만 그 사건의 전후 맥락과 그 이면에 놓인 진실에는 다가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닥 머리가 안 좋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교육'이 가르쳐주지 않고 '언론'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 이상 학생들이 의미를 알기는 어렵지 싶다. 내가 받은 교육은 많은 부분 맥락이 거세된 것이었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한 분이 있으니 고 3 때 세계사 선생님이다. 정년퇴임을 곧 앞둔 할아버지 선생님, 우리는 '걸어다니는 히스토리'라고 불렀다. 세계사가 선택 과목이 아니어서 그냥 담담히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그 시절이니 가능했다. 요즘이라면 자습할 듯.) 4.19 때(엄밀히는 2. 28) 경북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생들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시내 어디로 갔는데 사람들이 물결처럼 쏟아져 나왔고, 누구 집 아들이 체포됐고,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선생님도 80년 이후의 말씀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것이 누군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이건 옳지 못하며 우리가 바꿔야 한다고, 그런 이야기를 딱 부러지게 자신 있게 이야기한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입 시험을 치고 그 겨울에 읽은 책이 '태백산맥'이다. 누가 꼭 읽어보라 해서 샀는데 그게 누군지는 기억이 안 난다. 한 해 먼저 대학에 들어간 사촌오빠 같기도 하고. 그리고 입학해서 '다시 읽는 한국사'를 비롯해 몇몇 책들을 읽었고, 내가 배운 것들과 새로 읽은 것들 사이에 화면 조정이 필요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논리적 옮음을 따라갔는데, 그 문제를 더 깊이 천착하지는 못했다. 관심도 관심이지만 개인적 문제가 많았다. 책 좋아서 국어교육과 들어왔더니, 이건 1학년 때부터 가사에 고문에, 어학에, 완전 나가떨어졌다. 전공을 바꿔야 하나, 아니면 서울로 가야 하나 일 년 내내 고민하다가 재수하기는 죽어도 싫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다녔다.
대학 시절은 전반적으로 김영삼의 세계화와 함께 보냈다. 배낭여행이 시작되고 토익 열풍이 불기 시작하고 대학의 꽃이라던 학회와 동아리가 시들해질 조짐이 보이던 시절. 학내 자보에는 미군 철수 주장, 농촌과 우루과이 라운드 문제 등의 내용이 많았다. 윤금이씨 사진은 정말 끔찍했다. 한반도의 미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 사건이었다. 등록금 투쟁 자보도 많았다. 국립사대 학비가 워낙 싸서 그땐 별 관심 없었는데, 지난 10년간 학생들이 데모 안 하면서 대학들이 슬그머니 등록금을 천정부지로 올린 걸 보면 꼭 필요한 일이었던 듯 싶다.
해마다 5월이면 학생회에서 망월동으로 가는 순례단을 모집했다. 현수막과 자보를 보며 무심히 그 곁을 스쳐 지나가곤 했다. 체질적으로 독재와 권위주의를 싫어했으나 '80년 광주'가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당시의 나는 가늠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건 알았으나 그것이 그 앞선 시대의 긴 독재, 분단, 식민지와 연결되고, 87항쟁을 비롯해서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하나로 엮는 거대한 흐름 속에 우뚝 서 있다는 걸 몰랐다.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를 놓친 것이다.
'근대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교육은 치명적이라고 생각한다. 80~90년대 중반까지 우리 사회의 공기가 내가 숨쉬기에 자유롭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 늘 바깥으로 떠나기를 꿈꾸었던 이유도 그와 관련이 없지 않다. 그때 내가 발 딛고 있는 토대의 전후 맥락을 이해했다면, 더 적극적인 자세로 살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대학교육도 그래서 무척 중요하다). 대학 때는 배움이라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터라 실천에 관심이 더 가 있었는데, 학내 분위기는 나와 감성적으로 자꾸 충돌했다. 학생회는 남성적, 권위적, 보수적이었고 그들의 언어도 거친 면이 많았다. (내가 바라던 집회의 모습은 십 년 후 효순이, 미선이 촛불집회에서 보게 되었다.)
대학 시절 주로 시간을 보낸 곳은 성당이다. 따스하고 열린 분위기여서 그랬던 것 같지만 어쩌면 그곳에선 가치관의 충돌을 겪지 않아도 좋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막걸리보다는 맥주 분위기가 더 좋아서기도 하고. 자아가 충분히 강하고 성숙하면 다른 문화적 형식에 관대해진다. 당시 나는 자신의 모습을 찾는 '미성숙'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나와 맞지 않는 걸 견딜 수 없어했다. 당시 성김대건 성당에는 지금 생각하면 특별히 좋은 수녀님들이 계셨다. 그분들의 삶의 향기 때문에 그곳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나이도 젊은 편이어서 대학생들과 참 잘 지냈으며 따르고 싶은 멘토 같은 분들이었다.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사시는 분들이기도 했다.
아주 가끔 경찰과 최루탄이 경대 북문에 등장했다. 김민석이 수배 중에 경대에 와서 집회 중 연설을 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4년 내내 이러저리 헤매다가 졸업할 무렵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인간 삶의 의미는 결국 역사 속에서 밝혀지는 것 같다고. 그것을 떠나서는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내가 참여한 첫 대통령 선거에서 기쁘게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이후로 한국 영화 붐이 일었다. '쉬리'를 보며 그 세련됨에 놀랐던 기억. 책도 언로도 얼마나 다양해졌는지. 사회가 열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게 감성적으로 더 어필한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세대가 더 가까워서 그렇지 싶다. 그의 체화된 언어, 똑 부러지는 직언에 가슴이 시원했다.
언제나 좋은 세상을 꿈꾸었다. 초중고 때 내가 TV 화면에서 본 얼굴들은 기름이 번들번들한, 조금씩은 다 부정부패와 연관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잘 몰랐지만 그 얼굴들이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나는 늘 '얼굴' 보고 판단하는 것 같다. 혹은 눈빛이나 언어일 것이다. 그 어른들의 얼굴과 눈빛이 무척 싫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그때는, 정직한 사람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성공=부정부패'였기 때문에 성공은 꿈이 될 수 없었다. 지금은 좀 다르리라.
삶은 '사람'을 만남으로써 성숙하는 것 같다. 학창 시절, 내 주변에서 존경할 만한, 혹은 매력을 느끼거나 좋아한 어른들을 만나지 못했다. 책 속엔 많이 있었다. 책은 위대한 사상을 제시하지만 그것을 삶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살펴보는 건 우리 몫이고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위대한 생각을 갖는 것, 그 자체로도 좋은 일이긴 하지만, 나는 구태의연하게 반복되는 내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읽을 때는 저 하늘을 날지만 곧 동일한 지점에 추락하고 마는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중요하다. 책으로 만나는 것과 사람의 향기로 만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십 분을 이야기해도 오래 남는 게 사람의 힘이다.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위대한 인물일 필요는 없다. 청소년기, 청년기에는 우리가 매력을 느끼고 다가가고 싶은 인물. 그런 친구, 어른이 주위에 잔뜩 있으면 좋으리라. 안타깝게도 초중고에서 대학 때까지 내가 매력을 느꼈던 선생님은 안 계신다. 그 자리를 신부님, 수녀님들이 채워주었고 그분들께 감사한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를 줄은 몰랐다(단락을 넘어가면서 나 자신도 이 얘길 왜 이토록 길게 쓰나 했다.) 이런 결론에 이를 줄도 몰랐다.^^ 우리들 자신이 매력적인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 곁의 청소년, 청년들에게는 멀리 있는 위대한 이보다 가까이 부대끼는 우리들이 참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 나 아닌 다른 것이 될 필요도 없고 더 성공할 필요도 없다. 그저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한껏 매력을 발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긴 안목에서 우리 삶이 가는 방향을 알고 있는, 타고난 개성이 탈색되지 않은, 우리들의 본 모습 대로이면 족하다.
이 영화의 말미엔 주인공들의 꿈 속에서 공룡이 등장한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인 대목이다. 큰 공룡들이 먼저 길을 가는 동안 작은 공룡은 걸음이 처진다. 그러나 그 작은 공룡의 뒤처진 걸음이 땅에 자국을 남긴다. 그 자국이 바로 땅끝마을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된다.
내 삶이 남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 회의가 들 때가 있었다. 결혼하지 않았음이 큰 이유로 작용하지만 올해 특히 더하다. 전문계고에 와서, 수업도 안 되고, 학생들은 살갑지 않고, 대체 내가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의미 상실'의 나날이었다.
그 학생들의 생활 세계에서, 그들이 만나는 어른들이 어떤 사람들일지 생각할 때, 내가 참 소중한(중요하다기보다는)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저 멀리 있는 훌륭한 사람보다 여기 있는 내 삶의 태도가 이 친구들에게 더 오래 남는다는 것도 알았다. 2학기에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걸음이 뒤처진 작은 공룡이지만 그들의 가슴에 발자국 하나를 남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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