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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기록/유럽, 중동

전 세계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 프랑스 떼제 마을 '97

by 릴라~ 1997. 8. 30.
떼제공동체에서 보낸 며칠은 내 이십대의 가장 빛나는 시간 중 하나다. 그곳에서 전세계 사람들과의 우정, 웃음, 친교, 삶에 대한 빛나는 축복을 선물로 받았다.  만 서른이 되면 내 삼십대를 새로 시작하는 의미에서 떼제에 꼭 다시 가리라 늘 생각했는데, 올해 서른을 넘겨버렸다. 조만간 다시 가보고 싶다.

아주 오랜만에 이 글을 보니, 어릴 때 쓴 것이라서 떼제가 지닌 풍부한 의미를 제대로 표현해내진 못했지만, 내가 무엇에 강한 인상을 받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때 기록을 남겨두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로제 수사와 떼제 공동체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여,
나로 하여금 하느님과 함께 매 순간을 경축하게 하시고,
화해한 마음으로 투쟁하게 하시며,
소박한 생활로 주님과 함께 걷게 하소서.  (떼제의 기도에서)

 

1997 떼제 공동체 순례
전 세계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 프랑스 떼제(TAIZE) 마을을 다녀와서

 

1. 떼제 이야기

 

삼사 년 전 쯤이리라. 기대했던 대학에 대한 실망감과 지향점의 상실, 앞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매일 매일을 무의미하게 느끼며 갈등 속에서 지내던 무렵이었다.

 

그때에 나는 우연히 프랑스의 로제라는 사람이 쓴 아주 얇은 책자를 읽게 되었다. 그가 세계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희망과 확신으로 가득 찬 메시지였다. 글을 읽고 그처럼 감동하기는 사실 처음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살아가는 보람을 주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고 그러기에 내 일상에 작은 빛을 던져 주었다.

 

알고 보니 그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 1940년, 제 2차 대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폐허가 되다시피 한 동부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 로제 슐쯔라는 젊은이가 홀로 도착한다. 그는 전쟁, 분열, 상처, 당대의 고난 한 복판에서 매일 매일 화해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세우려는 꿈을 품고 있었다.

 

그가 처음 했던 일은 피난민, 특히 나치 점령지를 피해 나온 유대인들을 그의 집에 숨겨주는 것이었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온갖 오해를 무릅쓰고 독일군 포로들을 맞이했다. 로제는 첫 2년 동안 혼자 지냈으나 차츰 그의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 오늘날 공동체는 다양한 종파를 지닌 20여 개국 출신 백 여명의 수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의 가난한 지역에서 나눔을 실천하며 산다.

 

1960년대 이래로 해를 거듭할수록 세계 각지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한 주간 혹은 그 이상씩 머물기 위해 떼제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거듭 발견하기 위해서, 생활의 활력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 떼제의 언덕을 메우는 발걸음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이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살아가려면 뭔가 붙들게 있어야 한다. 희망이 분명치 않을 때, 그래서 삶의 의욕이 소진되어 일상이 버겁게 다가올 때마다 나는 떼제와 떼제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 동경의 대상이 관념 속에서가 아니라 이 땅에 실재한다는 데서 분명히 힘을 얻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KBS 일요 스페셜에서 떼제 마을에 모인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 이후로는 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깊어졌으나 워낙 먼 길이라 뜻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올해 나는 학교에서 자리를 잡게 되고 시행 착오 속에 정신없이 몇 달을 보냈다. 방학이 가까워 오자 나는 내 틀이 굳어지기 전에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갖고 싶었다. 떼제에 가면 그런 바램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가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2. 그곳을 향하여

 

 

7월 21일, 드디어 김포 공항을 출발했다. 서쪽으로 열 두 시간을 날아간 끝에 빠리의 관문 샤를르 드 골 공항에 도착했다. 밖은 오후 여섯 시가 넘었는데도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지구의 이쪽 편에는 밤 열 시나 되어야 어두워 진다고 한다. 이국 땅에 와 있음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첫날밤은 빠리 외곽에 위치한 호텔에서 묵고, 다음날 이른 새벽에 호텔을 나섰다. 첫 번째 목적지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 떼제를 향해.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사방이 어스름한데 새벽 공기가 우리 나라 가을 날씨같이 차다. 나는 어둠을 가르며 모험을 떠나는 소년처럼 신선한 마음이 되어 빠리 리옹 역에갔다. 일곱 시 출발 기차표를 끊는데 내 바로 뒤에 줄을 섰던 머리 희끗한 한 아저씨가 말을 건넨다. 떼제에 가느냐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자신도 다녀 온 적이 있다며 좋은 시간 보내라고 내게 축복의 인사를 했다. 낯설고 먼 땅에서 홀로 조금은 불안해 있던 터라 그의 따뜻한 마음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떼제베에 올라 남쪽을 향해 달렸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곳인가! 들판 사이를 약 두 시간 쯤 달렸을까 기차는 마꽁 떼제베 역에 닿았다. 프랑스 국영 철도 회사는 목적지까지 철도와 버스를 연결해 주는 편리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나는 바로 떼제 마을까지 가는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한적한 시골이라 그런지 승객이 대여섯 뿐이다. 내가 관광객임이 금방 표가 나는 가 보다. 얼굴이 마주치는 이들마다 내게 빙긋이 미소 짓는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따스한 마음씨가 살풋이 전해 와 나 역시 미소로 인사했다. 프랑스 시골 사람들은 참 친절하다.

 

버스에서 바라보는 프랑스 농촌 풍경 역시 빠리 거리와는 달리 소박하기 그지 없다. 언덕, 목초지, 한가로이 누워있는 소떼들, 붉은 빛깔의 흙과, 같은 색의 소박한 집들... 고만고만한 크기의 작은 마을을 몇 곳 거치자 떼제의 언덕이 눈 앞에 나타났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북적대는 젊은이들로 마을은 활기에 넘쳐 보였다. 마을 입구에 CASA라고 쓰인 곳이 일종의 안내소였다. 멈칫거리며 문을 여는데, 담당자가 환한 미소로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녀는 폴란드인이며, 떼제에 네 번째 왔으며, 그래서 지금 사람들을 안내하는 봉사를 하고 있다고 자기 소개를 했다. 그리고 내게 이곳 생활에 대해 이것 저것 설명해 주고 숙소를 알려 주었다. 그녀가 길 안내를 맡고 나서서 우리는 함께 내가 닷새 동안 머물 바라크 106동으로 향했다.

 

가면서 보니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Casa, ‘화해의 교회', 수사들의 거처, 배식소, 바라크 등이 있었으며, 서쪽은 캠프촌이었다. 마을 구석구석에 Clypte(기도하는 곳), 모임을 위한 천막들, 작은 숲과 쉼터가 보인다. 꾸밈없이 아기자기한 마을이다. 손님들로 이루어진 마을. 마을 주위로는 전형적인 프랑스 농촌답게 나즈막한 언덕들이 겹겹으로 펼쳐진다.

 

바라크에서 짐을 풀고 룸메이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내 룸메이트는 폴란드인이 셋, 독일인이 둘, 스웨덴 인이 둘이다. 그들의 거리낌없는 환영 인사가 다소 어색해 하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스웨덴 친구가 지금 떼제에 전 세계로부터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와 있다고 말한다. 여름 이맘때가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한다. 그들은 무엇을 찾고 있을까?



3. 멋있는 젊은이들

 

 

다음날부터 떼제에서의 본격적인 일과가 시작되었다. ‘화해의 교회’에서 드리는 아침, 점심, 저녁 세 차례의 기도와 international meeting, small group meeting, song practice 등에 참여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낯선곳에 대한 경계심과 긴장이 사라지고, 떼제의 분위기, 그 독특함에 점점 젖어들었다.

 

떼제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 있다. 그런 면에서 떼제는 지구상의 유일한 장소이리라. 사람들의 맑은 표정, 투명한 얼굴이 특히 나를 감동시켰다. 우리는 서로 그토록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진실하게 마음이 통함을 느낄 수 있었다. 눈빛만 보아도, 표정으로, 오가는 미소만으로 통하는 것. 이는 살아있음의 기쁨을 내게 안겨 주었고, 그것은 잊지 못할 내 일생의 참 소중한 순간이었다.

수천 명의 식사 준비, 설거지, 화장실 청소, 기타 마을 운영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여기 머무는 이들이 자원해서 한다. 다들 진짜 열심히, 작은 일에도 기쁨과 성실을 담아 일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서, 얼굴에서, 태도에서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은 내 마음을 끌어 당겼다. 참 멋있는 젊은이구나. 그들은 놀라울 만큼 진지했고, 그래서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삶에 대한 성실, 열정, 그런 게 느껴졌다.

 

국제 모임은 네 다섯 개의 주요 언어 별로 이루어진다. 이 삼 개국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이들이 많으므로 사회자가 영어로 말하면 서로 서로 통역해 주는 모습이 퍽 재미있다.

 

International meeting 후의 Small group meeting 시간에 만난 세 명의 독일 소녀들로부터 가족이 있는데도 병원에서 홀로 죽어간 할아버지 이야기,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이혼하여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럽 사회의 그늘진 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의 맑고 순수한 그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룹 미팅에서는 대개 20대 이상이 특히 진지하게 참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캠프 분위기를 내며 흥겹게 놀며 보내던 십대들도 공동 기도 시간에는 더할 나위없이 훌륭한 태도를 보여주어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참으로 각박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유럽인들은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건 간에 매우 풍부한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인간에 대한 배려와 존중 같은 것은 우리 나라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다. 내게 보여준 미소와 친절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몹시 부러웠다.

 

내가 머무는 동안에도 세계 각지로부터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러시아에서 사흘 씩 기차를 타고, 폴란드에선 버스로 하루 종일 걸려서. 한 스위스 아줌마는 자신은 이곳까지 기차로 아홉 시간 걸렸는데, 내가 그 멀리에서 비행기로 열 두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웃으셨다.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들른 사람, 텐트를 짊어지고 오는 사람, 각양각색이다. 십대들도 무지 많다. 방학을 이렇게 보내는 아이들을 보니 나는 보충 수업을 코 앞에 둔 우리 학생들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4. 떼제의 정신 - 화해와 나눔



여기에 지속적으로 오는 이들은 떼제의 보다 근본적인 것에 이끌리는 것 같다. 룸메이트 모니카는 여름 방학이면 늘 이곳에서 한두 주간 머문다고 한다.

 

왜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생을 소박하게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고국에서 그녀는 많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같지만 여기 오면 극히 적은 물건들로도 만족하며 기쁘게 생활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고. 고등학교 2학년 생, 앳된 얼굴의 그녀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또한 아쉬울 것 없는 부유한 젊은이들이 왜 평범한 이곳에 매력을 느끼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실제로 떼제의 모든 것이 지극히 소박하다. 일과가 그렇고 떼제의 노래가 그렇다. 단순한 말과 멜로디가 어우러진 떼제의 음악은 사람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 있다. 이곳의 모든 시설 또한 소박하다. 돈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조금도 불편하지 않다.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상상력을 발휘해서 잘 꾸몄다.

 

소박함이 축제 분위기를 더 돋워 준다고 로제는 말했었다. 이러한 단순 소박함은 복잡한 일상에, 또 물질에 찌든 현대인을 매료시키는 면이 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우리는 흔히 백인 하면 다 부유하다고 여기기 마련인데 여기에는 동유럽 등지에서 온 가난한 젊은이들도 퍽 많다. 부유한 국가 출신이든 가난한 국가 출신이든 젊은이들은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 떼제로 모여 든다. 인종, 국가, 종교, 빈부, 나이, 학력, 직업 기타 어떤 껍데기에도 구애되지 않고 서로 통하는 느낌! 이 속에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삶을 삶답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는 하잘 것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웃과 이웃 사이에 얼마나 큰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가.

 

여기서의 사귐과 나눔을 통해 젊은이들은 혼자가 아니라고 느낀다.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을 인식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무언가를 하려는 용기를 얻는 것이다. 화해와 나눔. 공동체 수사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화해를 통해, 유럽 나아가 인류의 화해를 실현하고자 하며 이를 몸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적 갈등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는 수사들의 방식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의 용기와 그들의 관심, 그들의 열린 마음에서. 신 수사님, 장 수사님과의 대화는 내게 많은 일깨움을 주었다. 그들은 모든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어떤 종류의 인간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집을 지어 젊은이들을 맞아들여 서로 만나고 나눌 장을 마련해 주고, 전례에 참여하게 해 주며, 떼제 공동체의 삶을 그저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무관심이 팽배한 현대 젊은이들에게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역할을 담당하도록 이끄는 정도다. 누구든 원하는 만큼 얻어가면 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나라마다 내는 돈이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 들어올 때 내가 닷새 치의 식비로 제시받은 돈은 115-130 프랑 (100프랑=16000원 정도)에 불과했다. 비싼 프랑스 물가를 생각하면 공짜나 마찬가지이지만 꽤 많이 내는 축에 속한다. 반면에 가난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적게 내거나 혹은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 공동체 수사들은 어떤 기부도 받지 않고 방문객이 치르는 돈과 그들이 생산하는 것만으로 우리를 손님으로 맞아들여 머물게 해 준다. 나눔의 삶 그 자체이다. 떼제는 하나의 상징이고 이상이다. 평범하면서도 기적적인곳.



 

5. 떼제에서 만난 한국인, 한국 문화


 

식사를 하는 곳에 게시판이 있는데 처음 보는 말들이 적힌 색색의 온갖 종이로 가득 메워져 있다. 나라 이름이 많은 것으로 보아 아마 여기서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만나보자는 내용 같았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우리 나라 사람 비슷하게 생긴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아 나도 한 번 붙여 볼까 하던 차에 길에서 우연히 대학생 혜연 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장기 체류자 그룹에 속해 있어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으나, 저녁이면 내 바라크에 간식을 가져다 놓곤 했다.

 

나는 우리말을 하고 싶고, 우리 나라 사람이 너무 그리워 사흘째 되는 날, 이 공동체에 계신 한국인 장 수사님께 면담 신청을 했다. 떼제 공동체에 한국인 수사님이 세 분이나 계신다. 밤 기도 후에 그분을 뵈러 갔는데, 마침 거기에 나 말고도 한 명이 더 와 있었다. 세운이, 영국서 살며 영국 친구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한 고등학생이었다.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반가운지. 수사님께서 오후에 지역 모임(reasonal meating)이 있었는데 왜 안 왔느냐고 하셨다. 내가 공고를 보지 못한 것이다.

 

세운이가 여기 한국 형이 또 있다며 알려 주어 은식씨와 준영씨를 만나게 되었고, 금요일에 도착한 경희씨 까지 가세해서 우리는 총 여섯 명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선 소수 민족이다. 우리는 이 먼 곳에서 함께 만난 사실이 너무 신기했고, 식사 때마다 만나서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은식씨는 그 박학다식함으로 순진한 독일 여학생들을 감동시키고 말았다. 독일 역사, 음악가, 위인들, 지리 등 모르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너무 유럽에 대해서만 배워온 것 같다고. 돌아가면 한국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싶다고.

 

나 역시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상대방은 우리 나라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내가 루마니아에 대해 아는 거라곤 나디아 코마네치가 전부니 미안할 수 밖에.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선 다른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저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오게 된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내게 한국말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나는 몇몇 인사말을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이 아랍어와 한국어라나. 한글의 인기는 거의 따라올 것이 없을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수첩을 들고 와서 한글로 써 달라고 부탁했다. 참 신기한가 보다. 알파벳과 비교해서 설명을 해 달라는 이도 있었다. 한 폴란드 청년은 자기 학교에 유학 온 한국인 친구를 놀래키고 싶다고 하여, 우리 한국인들은 저마다 그의 편지에 우리말로 한 마디씩 적었다. 그의 친구가 편지를 보면 무척 재미있어 했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언어를 전공했으면서도 다른 나라 말을 알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는데 그들은 달랐다. 나는 그들이 호기심이 많다는 데 주목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언어에, 그리고 그들과 다른 것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이다. 다르다는 것은 참 아름답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에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가 많았고, 나눌 것이 많았다. 그들과 나누기 위해서는 나는 나 자신의 고유함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것은 우리말과 우리 문화에서 오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에는 국제 장기 자랑이 열렸다. 나도 뭔가를 하고 싶었지만, 이런, 할 줄 아는 것이 있어야지. 정말이지 민요나 우리 춤을 진작에 배워두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한탄한 날이다. 모인 이들이 스스로 질서를 지켜가며 관람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6. 희망

 

 

토요일 밤의 공동 기도. 내게는 떼제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창설자 로제 수사와의 만남이 있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맑고 정정했다. 그의 아이디어, 꿈을 실현한 그의 용기가 아름답게 다가왔다.

 

수사님께서 베트남, 캄보디아, 지금 내가 이름을 잘 기억할 수 없는 작은 나라에서 각각 두 명씩의 젊은이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하시며, 특히 캄보디아의 어려운 정치 상황을 언급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나라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기원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으며,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드렸다. 그것이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몫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 밤은 마치 축제와도 같았다. 프랑스의 삐에르란 이름의 여섯 살 짜리 꼬마가 들꽃을 꺽어 왔다. 이 시간 여기 모인 온갖 나라에 한 송이 씩 주려고. 코리아가 방송으로 불리었을 때,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떼제에 있는 동안 줄곧 느낀 연대감을 다시금 확인한 시간이었다. 그 연대감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주고, 장벽을 부수고, 삶의 활기를 가져다 준다. 우리 모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롭다.

 

그날 밤, 우리는 세운이의 텐트에 모여 밤새 이야기했다. 마지막 밤이라 모두들 감회가 깊었으리라. 혜연씨는 한 달, 은식씨는 한 주일을 이곳에서 더 머문다. 세운이는 영국으로 돌아가고, 나와 경희씨, 준영씨 이렇게 셋이 함께 빠리로 떠나는 것이다. 준영씨는 팔월 중순까지 여행을 계속할 것이며, 나와 경희씨는 빠리에서 며칠을 관광하고 귀국할 예정이다.

 

나 말고는 다들 한 두달 이상 씩 유럽 전역을 돌고 온 사람들이라 저마다 가슴에 할 말들이 많았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유럽에서 가져오고 싶은 게 있다면 바로 이 떼제와 같은 공간이라고. 다른 지역에도 떼제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이런 다양한 시도들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유럽 문화의 본질적인 것은 보지 않고, 성 개방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받아들이는 데 대해서 안타까워 했다. 또한 어서 통일이 되어서 우리도 유럽애들처럼 기차를 타고 중국으로 만주로, 러시아로 맘껏 달려보자고 했다. 아쉬운 밤이었다.

 

일요일 아침이 밝아오고, 혜연씨와 은식씨를 남겨 두고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나는 지금 새로 도착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여기 남아 있는 이들에게 손을 힘껏 흔들었다. 눈물이 막 나려고 했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떼제에서 만난 수많은 이들의 모습이 눈 앞에 떠올랐다.

 

그토록 다양하고 생생한 얼굴들, 여기에 허무가 자리할 곳은 없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살면서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그리 많지 않구나. 그러나 머리 속에서, 생각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두려워 하는가.

 

다시 한 번 이곳에 오리라. 그때는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할 수 있으리라. 기차에 올라 다시 빠리로 향했다.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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