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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기록/동남아시아

뚤슬랭의 소녀 / 캄보디아 프놈펜

by 릴라~ 2011. 11. 24.



소녀는 거기 그렇게 있었다. 사진 속 수많은 얼굴들 사이에서. 그 많은 얼굴 중에 이 사진이 유독 눈에 띈 건 이 아이의 눈빛과 표정 때문이었다. 다른 얼굴들 속에는 체념과 절망, 깊게 가라앉은 '무표정'이 드리워져 있다면, 이 어린 소녀의 얼굴엔 그가 느낀 공포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원망 그리고 막막함. 그래서 나는 이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뚤슬랭 고등학교는 크메르 루즈 집권시 사람들을 고문하던 장소로 쓰인 곳이다. 이들은 특이하게도 사람들을 죽이기 전에 한 명 한 명 찍은 사진을 남겼는데 그 많은 사진 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얼굴이었다. 체념한 듯 무표정한 어른들의 얼굴들 사이에서 이 소녀의 얼굴은 인간 존엄성을 아프게 증명하며 거기 그렇게 있었다. 이제 그 사진은 그 아이가 그곳에 있었고 그곳에서 죽어갔음을 알리는 유일한 표지가 되었다.




뚤슬랭은 프놈펜 시내에 있다. 이곳에서 고문당하고 죽어간 사람들 상당수가 쯔엉아익에 묻혔다고 한다. 건물마다 당시 고문 침대와 도구, 핏자국까지 그대로 있어 쯔엉아익보다 더욱 섬뜩한 느낌을 준다. 마당에는 교수대가 서 있고 마지막 동에는 죽은 사람들의 사진과 뚤슬랭의 유일한 탈출자가 고문 장면을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 속 장면은 잔혹하기 그지 없다. 게다가 이 모든 일들을 자행한 이들은 십대 청소년들이었다. 15세 전후의 소년들에게 완장을 쥐어주고 그들 멋대로 폭력을 휘두르게 했다. 앙코르왓 부조에 새겨진 지옥도에 나오는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기도 했다고 하니, 비현실이 현실이 된 셈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묻혀져 있던 가장 잔혹한 것들이 현실에 살아나온 무서운 시간이었다. 뚤슬랭에서 나는 '악마'라는 중세적 단어가 실감이 났다.

 

인간의 마음속에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건 인류의 오랜 통찰이었다. 악의 문제에 대해 철학적 혹은 신학적 문제 제기를 할 생각은 없다. 내가 다룰 수 있는 주제도 아니고. 다만 인간이 '집단적 악'에 대해 굉장히 취약하다는 것, '공존의 룰'을 얻기까지 집안간 부족간 국가간 수없는 다툼을 해왔음을 기억한다. 우리가 역사를 떠올릴 때 비극이 먼저 연상되는 이유는 그런 피흘림이 역사의 중요 순간들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갖지 못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위험에 처해졌다. 이 모든 일이 자행되는 동안 그것을 목숨 걸고 말릴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음이 더 큰 비극으로 다가왔다. 국민의 교육 수준과도 관련 되지만 목숨 걸고 '아니오'를 외칠 수 있는 지식인 집단을 갖지 못한 사회가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었다. 외세의 압력과 국제 정세도 문제겠지만, 한 사회에서 국가적 위기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가 과거를 되짚어보는 이유는 미래를 위해서이다. 다음 세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들을 위해 무엇을 준비할 것인지 알기 위해서. 과연 이들이 자신들의 사회를 이끌어갈 그룹을 그들 안에서 키워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기를 바랬다. 이곳의 미래는 자라나는 새로운 세대에 달려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없는, 폐허나 다름 없는 이 나라에서 나는 교육이 지닌 힘과 가치를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캄보디아를 여행하면서 줄곧 여행자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그들이 겪은 비극에서 비롯된 한의 정서 때문인지, 이 빠르고 바쁜 세상 속에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이들이 주는 처연한 인간성 때문인지, 이들의 소박하고 따스한 인간미와 그들이 갖지 못한 지성의 예리함 사이의 간극 때문인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곳곳에서 마주치는 킬링필드의 상흔, 팔다리를 잃은 상이 군인들의 모습, 더 큰 욕망이 없는, 무언가를 꿈꿀 수 없는 그 소박한 사람들 사이를 거닐면서 생각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그러나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지성이 없다면 우리가 가진 것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욕망할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를 사로잡는 온갖 욕망 사이에서 길을 잃고 말 거라고.

 

@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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