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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철학, 심리

존재의 기술 | 에리히 프롬

by 릴라~ 2006. 2. 10.

에리히 프롬의 사후에 출판된 책이다. 원래는 '소유냐 존재냐'의 마지막 장에 포함시키려다가, 개개인의 소유 양식은 사회 및 경제적 구조의 변화  없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므로 제외시켰다고 한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인간 구원 영역에서의 거대한 사기'를 다루고 있다. 이십여년 전 미국 사회의 문제를 바탕으로 했지만, 그 흐름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매우 뚜렷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누구나 한번쯤 읽어볼 가치가 있다.

프롬은 삶의 목적으로 두 가지 차원의 해방을 말한다. 하나는 정치적 해방이며, 또 하나는 인간성의 총체적 해방이다. 선진국의 경우에는 후자가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휴머니즘적 해방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어느 방향에서 해답을 찾을 것인가이다. 프롬은 무엇을 피해야 할지부터 깨달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즉 존재의 기술을 배우는 데 가장 어려운 장애물은 인간 구원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사기'라는 것이다.

교육받은 사람들조차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는데 그 이유로 프롬은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지적인 개념만을 읽거나 듣고, 저자의 진정성의 증거를 찾고자 하는 '제 3의 귀'로 듣지 않는다. 두 번째 이유는 유력한 인물과 명성의 최면적 흡인력 때문이다.

이 영역에서는 상업화되고 부패되지 않은, 혹은 잘못 이용되지 않은 단어들이 거의 없으므로 그 말들을 심층적인 조망 없이 읽어서는 안 된다고 프롬은 이야기한다. 많은 경우에 그 말들은 실제를 더 또렷이 비춰주는 것이 아니라 관념들 속으로 도피해 버린다. 또한 의도적인 사기뿐 아니라 수행자들이 옳다고 믿는 사기가 더욱 위험하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진심에서 우러나는 교제 및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결핍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에 대한 처방으로 수많은 영적 프로그램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그 가르침들은 지극히 표피적이며, 위대한 스승들의 통찰력을 근거로 한 것인 양 가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 가르침이 인간성의 심오한 변화를 약속해주지만, 실제로 얻게 되는 것은 순간적인 기분 전환이나 약간의 휴식 정도라는 데에 있다.

휴식과 약간의 활력 진작 효과 때문에 명상 체험은 어떤 종류이든 긍정적인 반응을 낳는다. 그러나 프롬은 그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이 속한 전체 바탕을 보아야 우리가 입고 있는 손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상 숭배를 지지하고 자신의 독립심을 줄어들게 만들며, 우리 문명의 비인간적 측면을 강화한다. 즉 '무노력 무고통' 신조를 강화하고 자기 인식이나 기쁨, 행복 같은 것을 교묘하게 포장하여 왜곡한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환상을 거두어 참된 실재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상들로 가득차게 된다.

휴식은 때로 바람직하나 자기 존재의 중심에서 나오는 내적 자유와 근본적인 인간적 변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그러한 사이비 명상은 휴식 이상인 척 함으로써 그것이 아니라면 '해방으로 가는 진정한 길'을 추구했을 많은 사람들의 길을 가로막아 버린다. (이 책 3부에서 프롬은 한 가지만 바라기, 깨어 있음, 자각, 자기 분석, 참된 명상 등의 존재의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자기 변혁은 어떤 경우든지 현실에 대한 자각과 환상으로부터의 탈피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프롬은 주장한다. 순진하거나 쉽게 속아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오늘날 우리 주변을 둘러싼 만연한 허위들은 우리로 하여금 진짜 위험에 대해 눈멀게 만든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개인들과 집단들의 추악함과 사악함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지 않고서도 인간의 풍요로운 가능성을 믿을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고.

삶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은 현실적 태도라는 단단한 암반 위에 세워져야만 한다. 말하자면 악이 어디 있는지를 볼 수 있고, 협잡과 파괴성과 이기심이 분명하게 드러났을 때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많은 변장을 하고 합리화되어 있을 때에도 볼 수 있는 능력 위에 세워져야 한다.
믿음, 소망, 사랑은 다 벌거벗겨진 대로의 현실을 보고자 하는 그러한 열정과 합치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속임수의 체계 안에서는 게임을 하지 않겠다는 거부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단순한 자'(예수가 가르쳤던)에 대하여 '그는 속이지 않지만 그러나 속지도 않는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것을 간결하고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사실 부처도, 성서 속의 예언자들도, 예수도, 에크하르트도, 스피노자도, 마르크스도, 슈바이처도 '물렁이들'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들은 고집 센 현실주의자들이었고, 그들 대부분이 박해받고 중상 모략을 받은 것은 그들이 덕을 설교했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력과 직위나 명성을 중히 여기지 않았고, 황제가 벌거숭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권력이 '진실을 말하는 자들'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즈음 '마음 수련원' 같은 곳이 폭발적인 선풍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적 공허감'을 느끼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 없이, 노력 없이,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다 가짜이다. 일주일만에 깨닫는다고 하여, 뭘 깨닫는다는 건지 궁금해서 서점에 들렀을 때 거기서 나온 월간지를 잠시 서서 읽어본 적이 있다. 한 마디로 헛소리, 철학에서는 이미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유심론'의 다른 버전에 불과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고통 없이, 혹은 삶을 바꾸지 않고도 뭔가 평화롭고 즐거울 수 있다는 말에 혹하게 되고, 그래서 전통 종교보다는 그러한 수련이 더욱 인기를 끈다. 그냥 마음의 평정 자체는 아무 의미 없으며 결국 공허함으로 이어질 뿐이다. 고통을 통과하지 않는 영성은 다 가짜이다. 자기 삶을 진정으로 변혁하고 싶으면, 삶을 직시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변화에 수반되는 고통 즉 스스로를 갈고 닦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 길은 긴 여정이다. 어쩌면 우리 인생 전체가 순례길인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반갑지 않게도 내가 만났던 사이비 명상가들이 떠올랐다. 영광스럽게도(?) 나는 그들과 잠시 교제하는 행운 혹은 불운을 누렸다. 그들의 다정한 가면 뒤에는 불성실함, 나르시시즘,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 것에도 관심 없음, 무절제함, 타락한 인간성, 파괴적인 성향 등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 쓴 맛은 아직도 혀끝에 남아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그렇게 겉모습에 현혹되었을까 싶다. 삼십년 가까이 성당을 다니면서 수많은 수도회의 전통을 보고 들으며 자랐고, 실천하는 명상가들을 많이 만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속은 까닭은 내가 어리석어서이고 또 새로운 것이 주는 호기심과 매력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언어에 현혹된 것이다. 또한 나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나의 무의식 한 켠에도 우상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웅크리고 있었던 것 같다.

사기꾼들의 방식은 대개 이렇다. 그들은 실재를 신비화시켜서 뭔가 저 높은 초월적인 세계를 이야기한다. 일반 사람들은 그 세계를 본 적이 없으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줄 알고 속는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그 세계가 어떠한 세계인지 결코 설명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그 나름의 방식대로 삶의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사이비 명상은 결코 '고통'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지 않는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해 얼마나 정직한 태도를 갖고 있느냐를 보아야 한다.

도(道)덕(德)이 있다. 도(道)가 근원의 진리라면, 덕(德)은 진리의 실천 즉 사랑이다. 도는 덕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덕은 우리가 나날이 행하고 쌓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이비 명상가들의 특징은 도에 대해서만 떠들 뿐 덕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는 덕으로 드러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래서 도덕(道德)이다.

우리는 프롬이 묘사한 바와 같이, 소외되지 않은 사람, 아직도 민감하고 느낄 줄 아는 사람, 고귀함의 감각을 잃지 않은 사람, 아직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아닌 사람, 아직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할 수 있는 사람, 소유 양식의 삶을 완전히 익히지 않은 사람, 그런 인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덕'의 자유가 아니라 '의지'의 자유를 확립해야 한다. 반권위주의 투쟁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긍정적인 의미가 있고 지금도 그렇지만, 자기도취적 방종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변질될 수도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매사에 자기 마음(변덕)대로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현실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법칙으로부터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

감정적, 정서적 욕구든 물질적 욕구든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태를 꿰뚫어볼 줄 알아야 한다. 능동적으로 현실과 접촉하고, 필요한 것을 배우기 위한 고통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그렇게 우리를 둘러싼 베일을 벗겨내고 깨어나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든, 타인에 대한 것이든.

세계 속에서 한 인간의 위치가 가지는 힘은 그의 현실 파악력이 얼마나 충분한가에 달려 있다. 그 파악력이 부족할수록 그는 더 방향 감각이 없어지고 그리하여 더 불안정해지고 그리하여 기대어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우상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 현실 파악력이 충분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제 발로 설 수 있고 자기 내부에 자신의 중심축을 가질 수 있다.

진실을 자각하는 것은 해방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한다. 진실의 자각은 힘이 나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해준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더욱 독립적인 사람이 되고 내부에 자기 중심을 가지게 되며 더욱 생기 있게 된다. 그는 현실 속의 아무 것도 바꾸어놓을 수가 없다는 것을 완전히 깨닫게 되겠지만 그는 한 마리의 양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살고 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고통의 회피와 최대의 위안이 최고의 가치라면 정말로 환상이 진실보다 더 나을 것이다. 반면에 역사 속의 어느 시대에든 모든 사람들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나며, 더 나아가 죽음으로써 그 사람에게 주어진 한 번의 기회가 끝나버린다는 생각을 해보면, 환상을 떨쳐버리고 최고의 개인적 성취를 얻는 것의 가치란 대단한 것이다. 게다가 개개인이 더 많은 것을 보게 될수록 그들이 사회적, 개인적 변화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

또 한 가지의 유익한 태도는 깊은 불신의 태도이다. 우리가 듣는 것들의 대부분은 분명코 진실이 아니거나, 아니면 반은 진실이고 반은 왜곡된 것이며, 우리가 신문에서 읽는 것들의 대부분은 실제라고 제공되는 왜곡된 해석들인 까닭에, 애초부터 회의주의와, 우리가 듣는 것들의 대부분이 거짓말이거나 왜곡이기 쉽다는 가정에서 시작하는 것이 최상책이다.

이것이 너무 끔찍하고 시니컬하게 들린다면, 내가 얘기했던 것이 거짓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는 말들의 진실에 관한 것이었음을 강조한다면 내가 권장한 방법은 아마도 덜 염세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면, 즉 페르소나(persona)를 관찰할 뿐 그 표면을 뚫고 들어가서 그 가면을 걷어버리고 그 뒤에 숨겨진 사람(person)이 누구인지 보지는 못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 사람에게 집중할 때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든-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완전하게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나르시시즘은 너무나 많은 위장으로 숨길 수 있어서 찾아내기 가장 힘든 심리적 성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찾아내서 꽤 많이 없애버리지 않으면 자아 완성을 위한 그 이상의 길은 막힌다.

노력 없이, 그리고 고통과 불안을 기꺼이 체험하겠다는 마음 없이는 아무도 성장하지 못하고, 성취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 자기 분석 ;

1. 움직이지 않는 동안에 끼어들어오던 생각들을 기억해내고, 그 생각들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 그리고 그 연관성이 어떠한 것인지 알아볼 목적으로 '그 생각들 속으로 더듬어들어가려' 시도해 볼 수 있다. 아니면 피곤함, 울적함 혹은 분노 같은 특정한 증상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것이 무엇에 대한 반응인지, 드러난 그런 느낌 뒤에 숨은 무의식적 체험이 무엇인지 '두루 느껴' 볼 수 있다.

2. 이제까지는 자신의 자각에 들어 있지 않았던 어떤 요소들이 전면에 나타날 때까지 생각의 통제를 그만두고, 자신의 생각들이 들어오도록 허용하고, 그 생각들 사이의 숨겨진 관련과 줄줄이 이어지는 생각들을 그만 중단하고 싶어지는 '저항의 거점'들을 발견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그 생각들을 꼼꼼이 조사하려고 애쓴다.

3. 자서전적 접근법

4. 의식적 플롯과 무의식적 플롯의 불일치 대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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