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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영화, 드라마

<디어 한나>, 치유에 대한 정직한 이야기

by 릴라~ 2012. 4. 21.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장면이 딱히 잔인하거나 비참하거나 슬프거나 해서가 아니다. 화면은 오히려 상당히 절제되어 있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서 언뜻언뜻 내비치는 주인공들의 아픔이 비수처럼 마음에 스며든다. 우리의 감성을 만족시켜 줄 그 어떤 아름다운 장치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불편함은 환상이 제거된, 생의 본모습 그대로가 전달되는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주인공 조셉의 일상은 영국 노동 계층이 처한 삶의 조건을 보여준다. 그의 삶엔 출구가 없으며 삶에 대해 더는 아무 기대를 할 수 없다. 조셉의 가슴엔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가지만 그는 자신의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다만 주변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그것을 표출할 뿐이다.

 

또 다른 주인공 한나는 유복한 중산층이다. 그녀의 삶 역시 출구가 없다. 남편은 대외적으로는 멀쩡하지만 폭력/의처증/변태성욕 등 복합적인 정신 질환을 가진 인물로 한나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한다. 조셉이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 자신의 무의식적 분노를 투사해왔다면, 한나는 신께 기도하고 의지하며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이야기를 홀로 내면에 삭이며 살아왔다. 이들 모두 자신을 덮치는 고통 앞에 외롭게 무기력하게 내팽겨쳐졌다는 점에서 같은 처지에 놓인 인물들이다.

 

출구는 이 둘의 우연한 마주침에서 발생한다. 자기 삶에 불쑥 끼어든 예상치 못한 타자. 조셉과 한나는 서로의 삶에 침투해 들어간다. 그리고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을 넘어서 그 이면에 자리한 상처와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마주침은 조셉과 한나에게 자신의 삶을 다른 관점에서 돌아볼 기회를 선사한다. 오랜 기간 남편의 폭력 앞에 무기력했던 한나는 신께 기도하는 대신 남편에게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목격한 조셉 또한 자기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그가 처음 한 일은 이웃 주민을 공포로 몰아넣고 그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어주던 어린 친구 샘의 얼굴을 물어뜯은 개를 몽둥이로 때려 죽인 것이었다. 개 주인은 이 개를 몰고다니며 조셉을 비롯한 사람들을 위협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조셉은 자신이 지극히 아끼던 애완견을 홧김에 죽이고 괴로워하는데, 영화의 말미에서는 자신의 뚜렷한 의지로 자신의 삶을 가로막는 것을 죽이고 그 대가를 치른다.

 

이 영화의 원제는 'Tyrannosaur'(티라노사우루스)이다. 조셉이 자기 아내를 부른 별칭이다. 그의 아내는 한때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나 그와 살면서 몸무게가 백 킬로가 넘는 거구가 되었고 합병증으로 일찍 죽음을 맞았다. 조셉은 뚱보가 된 아내를 무시하고 경멸했으나, 그가 정말로 물리쳐야 할 괴물은 다른 곳에 있었다. 한나 또한 신의 사랑을 믿듯이 남편을 사랑으로 감싸고자 했으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나약함이었다. 그녀가 남편을 죽인 것은 자신의 나약함에 맞선 승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정말로 죽여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분노를 엉뚱한 곳에 투사하거나, 혹은 자기 가슴 속에만 감추어둔다는 점에서 우리 또한 조셉과 한나와 다르지 않다. 이 영화는 상처를 치유하는 두 가지 길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서로를 가슴에 안는 사랑과 자신을 서서히 죽이는 것들과의 싸움이다. 우리 삶에서 끊어내고 결별해야 할 것들은 무엇이며, 우리가 극복해야 할 괴물은 무엇일까. (새누리와 박근혜 무리를 제발 극복하고 끊어냈으면...!!) 주인공들의 상처는 점점 자라 괴물이 되었다. 그들이 싸워 이기지 않으면 그것은 그들을 죽일 것이다.

 

평화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괴물은 우리 안에도 있고 우리 밖에도 있다. 삶은 괴물과의 투쟁을 동반하며, 그러한 싸움에는 값비싼 대가가 따른다. 보통의 사람들은 치러야 할 대가가 싫어서 싸움을 회피하지만 그것은 치를 만한 가치가 있다. 조셉과 한나는 대가를 치르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정과 사랑을 선물로 받았다.

 

조셉이 기차를 타고 한나가 수감된 교도소로 가서 한나를 면회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환하고 따스하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는 장면에서 영화는 막을 내리는데, 이들이 말없이 서로 인사하는 장면은 가슴에 오래 남는다. 그들은 자신을 변화시켜준 사랑에 마음을 열었다. 그 사랑은 그들에게 구원이었고 그것은 상대방을 자기 삶의 자리에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자기 삶을 옥죄는 괴물이 무엇인지 분명히 인식했고 그것과 맞서 싸웠다. 죽음 같은 고통을 넘어서 평화를 발견한 이들이 가질 수 있는 따스함이 두 사람의 표정에 깃들어 있었다.

 

조셉 역은 피터 뮬란, 한나 역은 올리비아 콜먼이 맡았다. 연기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삶처럼 느껴질 정도로 최고의 몰입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명연기 덕분에 조셉의 거친 행동 속에 감추어진 사랑에 대한 갈망과 한나의 온화한 외모 속에 감추어진 절망적인 상처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 두 배우가 전하는 '인간의' 고통과 상처, 치유의 몸짓이 관객을 감동케 하는 영화다.  

 

 

 

 


디어 한나 (2012)

Tyrannosaur 
8.5
감독
패디 콘시다인
출연
피터 뮬란, 올리비아 콜먼, 에디 마산, 시안 브렉킨, 폴 포플웰
정보
드라마 | 영국 | 91 분 | 201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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