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첫사랑이어서가 아니다. 스무 살 새내기지만 이들이 공유했던 '꿈'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잊지 못한다. 음대생인 서연이 꿈꾸던 이층집, 그리고 그 집을 지어주고 싶어했던 새내기 건축학도 승민. 이들이 꿈꾼 집은 단순히 건축물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미지의 나날에 대한 설렘과 기대를 포괄한다. 그들은 젊었다.
그래서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 만남이 흔치 않게 주어지는 축복이라는 것을. 진심을 품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을. 이들은 자신들의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조차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 열정은 있으나 이해와 인식이 부족한 시절이다. 그래서 그 만남과 교감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한 채 서로를 떠나보낸다.
사랑은 리듬이다. 박자가 딱딱 맞듯이 서로의 감정선이 일치하는 계기가 필요하다. 남녀의 감정선은 많은 경우 엇박자를 낸다. 한쪽이 달아올랐을 무렵 또 한쪽은 식어버린다. 남자가 빨리 타오르는 편이고 여자가 천천히 마음을 여는 쪽이 많다. 스무 살 서연이 사랑을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돈 많고 뺀질거리는 준호에게 먼저 시선이 가지만 늘 승민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승민은 서연의 말이 아니라 행동에 담긴 뜻을 읽지 못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다가 준호에게 기죽고 제풀에 나가떨어졌다. 준호에 대한 열등감이 서연을 향한 애정보다 더 컸다고 볼 수도 있다.
첫사랑이 이루어지 않는다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조차 감정조차 동기와 욕구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처음 경험하는 낯설고 강렬한 감정이기 때문이고, 내 감정과 상대방의 감정을 어떻게 맞추어가야 할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순수하기 때문이고 계산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 역할을 구분하면 구시대적이란 비난을 들을 지도 모르지만 남녀의 선천적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사랑을 시작하는 데는 남자의 용기가 필요하고 그 템포를 조절해가는 데는 여자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타이밍을 알아볼 줄 아는 선수들이 연애를 잘한다. 승민에게 부족했던 건 과감하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였다. 그러나 나는 선수인 준호보다 찌질한 승민에게 마음이 간다. 그의 순수함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승민과 서연의 모습은 스무 살 시절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기억 속으로 사라진 그 날들을 다시 현실에 불러내는 것도 서연이다. 우리가 과거를 되집어 볼 때는 자신의 삶이 뭔가 잘 안 풀리고 있다고 느낄 때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고민할 때 과거를 적극적으로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십오 년만에 승민을 먼저 찾아가는 건 서연이고(결혼에 실패) 바쁘게 생활하는 승민은 처음에 서연을 알아보지 못한다. 서연은 고향 제주에 집을 짓고 싶어한다. 부서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은 것이다.
십오년 만에 만나 함께 집을 짓는 이들. 이 과정은 그들의 과거에 대한 치유이자 새출발이었다. 승민은 처음엔 내켜하지 않지만(집 짓는 건 자기 일이 아니라고) 작업을 진행하면서 변모한다. 서연의 꿈이 자신의 꿈이 되고 승민은 스무 살의 꿈 한 조각을 되찾는다. 그는 서연에게 가장 어울리는 집을 밤샘 작업을 하며 완성한다. 이 집은 그가 처음 자기 손으로 짓는 집이다.
승민은 곧 결혼을 앞두고 있던 터라 이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러나 스무 살 때 둘이 했던 약속은 실현된다. 그들은 뒤늦게나마 자신들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해낸다. 그 시절 너를 좋아했었노라고. 네가 첫사랑이었노라고. 첫사랑의 상흔은 완성된 집과 함께 예쁘게 아문다. 집을 다 짓고 나서 둘은 각자의 자리로 떠나가지만 하나의 매듭은 또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자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들의 첫만남은 '건축학 개론' 수업이지만 이들의 재회는 직접 집을 짓는 것이었다.
이들이 함께 짓는 집이 바로 이 두 사람의 성장을 암시한다. 승민은 낡은 옛집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짓자고 하지만 서연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결국 옛집의 골조는 그대로 살린 채 증축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 집엔 서연이 키를 재던 담벼락과 어린 시절 콘크리트가 굳기 전에 발을 디뎌 생긴 작은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옛 것을 살리면서 새로움을 덧붙이는 것이다. 확 트인 전망창과 이층에 서연을 위해 새로 올린 방(스무 살 때 꿈꾼 집 그대로)은 다가올 새로운 시간을 암시한다. 서연은 새로 지은 아름다운 집에서 다시 무언가를 기다리고 맞이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잔잔한 영화지만 마음을 울리는 장면이 참 많았다. 건축학 개론 강의 시간, 저녁 무렵이면 울려나오던 학교 방송, 어리버리한 신입생들의 모습, 재수생 친구 납득이이 유머, 정릉 거리, 낡은 주택가, 철없이 어머니께 투덜거리던 승민, 스펠링이 틀린 게스 티셔츠, 승민과 서연이 나눈 아기자기한 대화, 첫눈 소복소복 쌓이는 날 한옥집 마루에 앉아 승민을 기다리던 서연의 고요한 뒷모습, 전람회의 음악........ 이 모든 것이 그때 그 시절 우리들의 모습과 꼭 같았다. 대상은 분명치 않지만 무언가를 향한 설렘과 기다림이 있었던 시절....
영화 <건축학개론>은 섬세한 디테일로 잃어버린 시간 속에 우리를 흠뻑 젖게 만든다. 그리고 첫사랑의 상흔을 지닌 우리 모두의 마음을 예쁘게 어루만져 준다. 서툴고 미숙했던 시절을 거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말해준다. 이 영화가 단순히 첫사랑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이십대의 성장통에 관한 영화이자 치유에 관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90년대 학번이라면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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