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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기록/동남아시아

캄보디아 스텅트렝에서의 하룻밤

by 릴라~ 2013. 6. 18.

솔로 여행 중에 가장 힘든 순간은 언제일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지방에 그것도 캄캄한 밤에 혼자 도착해서 숙소를 찾는 일이 아닐까? 이럴 때면 하룻밤 몸을 누일 곳을 찾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버거운 일로 다가온다. 그리고 직전에 떠나온 곳, 비록 며칠이지만 정들었던 그곳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이 마음을 점령해 버린다. 프놈펜을 떠나 캄보디아 북부의 국경 도시 스텅트렝에 도착했을 때가 바로 그러했다.

 

스텅트렝은 캄보디아에서 육로로 라오스로 넘어가는 여행자들이 거쳐 가는 곳이다. 하루 온종일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스텅트렝에 도착했을 때는 날은 이미 어두워진 뒤였다.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하고 낯선 거리에 피곤한 육체를 내려놓는 순간, 여행의 모든 기쁨은 증발되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초라한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여행자들의 활기로 북적이던 수도 프놈펜과 달리 이 변방의 썰렁한 소도시엔 제대로 된 숙소 하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예까지 와서 길을 돌이킬 방법이 없는 줄 나 자신 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둘러보니 다행히 건너편에 호텔 간판이 보인다. 방을 보여 달라 해서 2층에 올라갔는데 남은 방들이 모두 창문이 없다. 숙소를 찾아 돌아다닐 기력은 없었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그런 곳에선 잠을 청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두 번째 들른 호텔에 창문이 있는 깨끗한 방이 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운 물에 몸을 씻고 침대에 누워 그대로 두 눈을 감았다. 다른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인들과 다정하게 며칠을 지내다가 갑자기 이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밤은 그 공기의 무거움으로 인해 다른 생각의 가능성들을 죄다 눌러버렸다. 어쩌면 그 밤에 내가 도착한 곳은 물리적인 장소로의 스텅트렝이 아니라 밤의 어둠과 육체의 피로와 정신의 외로움이 만들어낸 내 마음속의 막다른 한 지점이 아니었을까.

 

이성을 돌려준 것은 개운한 잠이거나 혹은 환한 아침 햇살의 도움 덕분이었으리라. 혼란한 마음에 질서를 부여하는 건 언제나 거창한 것들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온기이다. 다음 날, 짐을 꾸려 밖으로 나갔을 때, 간밤의 공포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피곤과 두려움이 가셔진 눈으로 바라본 스텅트렝은 그리 작은 마을도, 그리 외딴 곳도 아니었다. 그곳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 수많은 곳들 중 하나였고,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아침을 맞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개운한 마음으로 국경행 버스표를 끊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백발의 머리를 한 인상 좋은 프랑스인 노부부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6개월째 동남아를 여행 중이란다. 여행 이야기가 얼마간 오고 간 후에 그들이 내게 표를 얼마 주고 끊었냐고 묻는다. 나보다 두 배쯤 지불한 것을 알고는 어디가든 서양인들한테 값을 더 높게 부르는 모양이라고 체념한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아무런 짜증이나 화가 담겨 있지 않은 점이 마음에 남았다.

 

정류장 앞 공터에서는 꽤 큰 규모의 시장이 열리기 시작한다. 각양각색의 농산물이 진열된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시끌벅적 모여들었다. 이곳이 간밤의 그 쓸쓸한 동네가 맞나 내 눈이 의심스러운 순간이었다. 내가 품었던 정체 모를 두려움과 고립감이 스텅트렝에 대한 매우 부분적인 이미지를 근거로 구성된 것임을 알게 되자 그저 웃음만 나왔다. 대상에 대한 몇 가지 부분적인 인상이 당시 나의 육체적, 심리적 상태와 결합하면서 한 순간이지만 내 감정을 지배할 만큼의 강한 힘을 발휘한 것이다.

 

우리가 주관적 인상을 넘어서 풍경의 전체에 다가갈 수 있는 시선을 확보하는 것은 그래서 언제나 만만치 않은 과제인 것 같다. 여행을 통해서 어떤 장소에 관한, 그곳의 삶에 관한, 전체적인 시선을 얻는 것이 가능할까 . 우리의 시선은 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 제한을 조금 넘어설 수 있는 한 가지 길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의 굴절된 시선을 넘어서 그 풍경이 지닌 원래 빛깔을 돌려주는 건 사람이다. 사람을 만날 때 어떤 장소에 대한 우리의 시야는 비로소 균형 감각을 갖게 된다.  그가 열어주는 창문을 통해 우리는 풍경의 다른 부분들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텅트렝은 그 어느 곳이든 사람 사는 곳이면, 불필요한 두려움을 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내게 말해주었다. 또한 내 눈에 아무리 남루하게 비치는 곳이라도 그곳에는 내가 발견하지 못한 고유한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아름다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그들 또한 일상의 제한된 시선으로 인해 비록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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