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 Everybody stop!!!
메이슨 총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열차 안을 가득 메웁니다. 부조리한 것들을 멈추기 위한 외침이 아니에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순간에야 그녀는 학살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Stop, Everybody stop!!!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검은 복면을 쓴 이들의 동작이 순간 정지합니다. 이는 비극적인 순간이자 희극적인 순간이었어요. 그 일순간의 정적이 우리 모두가 꼭두각시라는 사실을, 스스로 중단하는 법을 잊어버린 존재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영화를 보는 내내 틸다 스윈튼의 이 한 마디가 입 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우리가 멈추어야 할 것들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화 <설국열차>가 제기하는 질문입니다. 윌포드의 감언이설은 그럴싸합니다. 시스템 유지를 위해서는,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희생을 기꺼이 수용하면서 시스템을 관리하는 자가 진정한 강자, 세상을 지배할 능력이 있는 자라는 거죠. 그래서 그는 꼬리칸에서 엔진칸까지 진격해온 커티스를 환영합니다.
윌포드의 말에 담긴 건 전형적인 강자의 논리예요. 다름 아닌 동물 세계의 논리죠. 그와 메이슨이 생태계의 균형에 대해 계속 말하는 건 자연에 기대어 약육강식의 논리를 정당화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연이 과연 그러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오늘날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들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실제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기계화된 인간이 자연 또한 기계의 구조처럼 인식하는 모습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커티스는 흔들리지만 결국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그는 꼬리칸에서라도 목숨을 부지하며 사는 게 어디냐는 식의 강자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예요. 또한 서로에게 자기 몸을 내어주며 살아남는 약자의 논리 또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길리언의 희생은 위대하지만, 그것 또한 꼬리칸의 생존을 위한 보다 인간적인 방식에 불과합니다. 그 결말은 슬픔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그런 희생이예요. 커티스는 끝까지 싸우는 길을 택하고, 그 싸움의 끝에서 자신이 진정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기계 속에 갇힌 한 아이를 구해냄으로써 그의 혁명이 깨끗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약자들끼리의 희생이 아니라 강자가 된 커티스가 시스템의 유지, 관리를 거부하고 가장 약한 아이를 위해 희생한 것입니다. 이제 미래는 살아난 그 아이들의 것이에요.
커티스가 '싸우는 자'라면 남궁민수는 '보는 자'입니다. 커티스가 아이의 생명을 구했다면, 이 아이들에게 열차 밖을 향한 가능성을 열어준 건 남궁민수예요. 닫힌 문 너머의 세상으로부터 오는 소리에 귀기울이는 남궁민수 캐릭터는 아마도 예술가에 대한 은유일 거예요. 그들은 다른 세상을 앞서 봅니다. 그리고 열차 바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춥거나 어둡지 않다고, 이 세계를 탈출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커티스가 보지 못하는, 진짜 다른 세상을 본 건 예술가들이예요.
한 인간을 체제 유지의 도구로 쓰는 세상을 우리가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럭저럭 살 만한 세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이 그럭저럭 살 만하다고 느껴지는 건 우리가 중간 칸에 타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요. 열차의 중간 칸쯤에 탑승하고 있는 이들이 자기가 속한 세계를 버리는 것은 쉽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남궁민수에겐 이 시스템 자체가 감옥이었죠. 그가 감옥칸에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혁명가들이 그를 감옥에서 꺼내준 이후 그는 진격 도중에도 때때로 바깥을 깊게 응시합니다.
그 자신은 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꿈은 아이들을 통해 실현됩니다. 한 소년과 소녀가 세계를 끊임없이 순환하는 열차, 그 안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혁명과 반동의 윤회의 고리로부터 탈출합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모든 것이 낯선 땅, 그러나 그들이 태어난 열차보다 더 진정한 현실인 땅을 튼튼히 밟고 서 있어요. 이는 전혀 다른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영화 <설국열차>는 우리 사는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한 세계의 착취를 통해 또 한 세계가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연결되어 한 몸으로 움직이는 기차칸이라는 선명한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련된 낡은 이야기 대신 '탈출'에 관한, '해방'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들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희망은 낡은 기차를 버릴 때만 얻을 수 있는 거라고. 그때 비로소 '다른' 이야기들을 삶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남궁민수처럼 열차 벽을 넘어서 '창 밖'의 풍경을 응시하는 것이 그 출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대로 '보는' 행위 없이 다른 것을 꿈꾸기란 요원하기 때문이에요. 예술이란 다름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봄'에 대한 비판이면서, 다시 '봄'의 기회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설국열차>는 우리의 시선이 지금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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