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몰아치기 시작한 바람은 쉬 그치지 않았다. 바람은 구름을 모두 흩어버릴 때까지 산을 향해 계속 달려올 모양이었다. 싱싱 불어대는 바람의 노래가 어찌나 신이 나던지 나는 단숨에 장터목 대피소까지 다시 올라갔다.
장터목에 서니 이리저리 오가는 구름 사이로 눈과 서리에 잠긴 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 무리의 검은 새들이 떼지어 날아왔다가 저 편으로 사라져갔다. 날씨가 좋아질 걸 생각하니 마음은 길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막 출발하려는데, 어제 세석에서 헤어졌던 어린 친구가 대피소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반가워 손짓을 하니 그이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이다.
"누나, 정말 아름다웠어요."
걸어오는데 갑자기 하늘이 맑아지더란다. 경치가 얼마나 좋던지 자기가 산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본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날씨가 안 좋아 많은 이들이 아침 일찍 포기하고 산을 내려갔다고 한다.
나 역시 내려가다가 다시 돌아온 거라고, 네가 걸은 길의 경치가 바로 지리십경에 속하는 연하선경이라고 말해주었다. 따끈한 캔커피를 마시며 잠시 담소를 나눈 뒤에 그는 천왕봉으로, 나는 세석으로 발길을 돌렸다.
전날 어둠 속에 정신 없이 지나쳤던 길을 아침 햇살 아래 다시 걷는다. 장터목에서 세석까지 연하봉과 촛대봉을 거쳐가는 3.4km의 길,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길. 이 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그 어느 때보다 드라마틱한 경치를 내게 보여주었다. 이런 선물을 주려고 어제는 내리던 비가 산을 꽁꽁 감추었던 걸까. 다채롭게 물든 단풍 위로 흰 설화가 소복이 피어난 능선길의 전망은 기가 막혔다.
지리산의 아름다움은 산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이 산을 둘러싼 다른 많은 것들로부터 오는 것 같다. 안개와 구름, 비와 바람, 서리와 눈, 해돋이와 해넘이, 들꽃과 고사목, 별과 달…. 수많은 존재들이 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큰 산이 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생령들을 불러 모으듯, 사람의 마음도 크고 넓으면 다른 이를 넉넉히 품어 안을 수 있지 싶다. 산이 깊을수록 골짜기엔 맑은 물이 흐른다 했는데 내 영혼의 실핏줄에도 샘물이 졸졸 흘러갔으면.
구름은 거의 다 걷혔다. 길 양 옆으로는 새하얀 나무들이 줄지어 있어서 어떤 땐 하얀 터널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쬘수록 나뭇가지를 감쌌던 서리는 부서져서 길에 작은 조각으로 떨어진다.
가을 속에 이미 찾아든 겨울, 계절의 신비에 몸을 떨며 걷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 속을 나는 걷고 있었다. 이 또 다른 세상은 내게, 산을 내려가서도 가슴으로 노래하는 법을 잊지 말라고 속삭인다.
비로 먼지가 깨끗이 씻겨가서 시야가 정말 좋다. 지리산에서 다시 남해를 볼 줄은 몰랐는데, 내 시선은 산을 넘어 바다를 지나 하늘에 닿는다. 내 눈길이 멈춘 그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푸르다는 것들이 한 데 모여 하나의 몸짓으로, 하나의 갈망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이 가을의 침묵은 겨울의 깊은 침묵과 또 다르다. 가을은 침묵을 향해 가지만 아직은 삶에 대한 끝없는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가을은 생에 대한 마지막 찬양이다. 이 모든 빛나는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만물은 겨울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오직 존재, 존재 뿐인 침묵으로. 겨울산은 존재로서만 말한다. 그 근원적인 침묵 때문에 어떤 이들은 겨울의 산야를 가장 사랑하는 게 아닐지.
자연과 인생의 신비에 대해서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던 사람들은 북미 인디언들이었다. 인디언들은 풍경의 변화와 마음의 움직임을 주제로 그 달의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인디언 달력을 보면 그들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자연의 변화에 얼마나 친근하고 다정하게 반응했는지를 알 수 있다.
1월은 마음 깊은 곳에 머무르는 달, 눈이 천막 안으로 휘몰아치는 달, 나뭇가지가 눈송이에 뚝뚝 부러지는 달, 얼음 얼어 반짝이는 달….
2월은 홀로 걷는 달, 물고기가 뛰노는 달, 기러기가 돌아오는 달, 삼나무에 꽃바람 부는 달….
3월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 연못에 물이 고이는 달, 한결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달….
4월은 거위가 알을 낳는 달,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
10월은 큰 바람의 달, 잎이 떨어지는 달….
11월은 만물을 거두어 들이는 달, 물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12월은 침묵하는 달, 무소유의 달….
어느덧 촛대봉에 닿았다. 세석평전 주위로는 이미 잎이 많이 졌다. 봄은 산 아래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가을은 정상에서부터 찾아온다. 높은 곳이건 낮은 곳이건 세상 모든 곳에 한결 같이 깃드는, 이 거침 없이 피고 지는 사랑의 힘. 끊임없이 움직이며 흘러가는 이 힘이야말로 생을 사는 힘이다. 삶도 머물지 말고 흘러가야 한다.
한신계곡으로 하산하며 지리산의 가을 향기를 마지막으로 깊이 들이마신다. 하늘은 이제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오늘밤 산에 머무는 이들은 수많은 별들이 뜨고 지는 걸 보게 되겠지. 하루 해가 저물듯이 이 가을도 저물 것이고, 그 뒤를 따라 올 한 해도 영원 속으로 사라져 가겠지.
산을 떠나며, 아라파호족 인디언들이 명명한 11월의 이름을 가만히 되뇌어 보았다.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이 가을이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고 난 뒤에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덧붙이는 글 | 10월 20~22일에 지리산을 걸었습니다.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89856&CMPT_CD=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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