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풍부한 의미를 올올이 느끼며 살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두 항 사이의 차이를 통해서이다. 밤과 낮, 남과 여, 기쁨과 슬픔, 여기와 저기 사이에 놓인 차이와 간극을 통해서만 우리는 각각의 항이 어떤 의미인지를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때로 길고 먼 여행이 필요하다. 영화 <그래비티>는 가장 먼 종류의 여행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우주정거장에서 일하는 라이언과 멧. 그들은 지구 밖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전체적인 관점을 신의 관점이라 한다면 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특권이다. 거기에 근접한 인물이 지휘관 멧이며, 주인공은 정거장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여성과학자 라이언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모험(재난)과 이를 통한 성장, 귀환이라는 전형적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한 시간 반의 놀라운 우주 체험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영화이기도 했다.
대기권 밖 무중력 상태에서 일하는 멧과 라이언은 우리가 지상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들을 듣는다. 지구 바깥은 어둡고 고요하고 차가운 공간이다.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들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침묵이 자리한 곳이다. 그 침묵을 뚫고 비행사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들을 그곳에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들의 정신을 연결하는 통신망과 그들의 몸을 서로 묶고 있는 끈이다. 그리고 지구가 움직이고 그 위로 해가 뜨고 지는 장면을 바라보며 황홀해한다.
그러던 중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고 라이언은 우주 공간을 홀로 표류하게 된다. 영화는 무한한 공간의 침묵 속에 떨어진 라이언의 공포와 라이언과 멧의 재회가 주는 감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재회는 길지 않다. 둘을 연결해주던 우주복의 끈이 끊어지면서 그녀는 홀로 지구로 돌아가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소유즈에는 연료가 없고 그녀는 구체적으로 맞닥뜨린 죽음 앞에 두려워 몸을 떤다. 그녀가 신을 찾는 장면,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에 지구로부터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전혀 모르는 낯선 언어로 말하는 인간의 소리에 위로를 얻는 장면은 뭉클하다.
마지막 순간에 라이언은 깨닫는다. 멧은 우주 공간으로 사라졌지만 영영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그녀 마음속에 살아있어 그녀에게 용기를 준다는 것을. 네 살에 사고로 죽은 그녀의 딸 사라 또한 영영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멧이 있는 곳에, 그녀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세계에, 부르면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라이언은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을 발견해낸다. 그리고 10분 후에 불타죽던지, 무사히 지구로 귀환하던지 어느 쪽이 되든 이 여행 자체가 엄청난 여행이라고 느끼는 순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던진다. 결과와 상관없이 여행을 즐길 준비가 되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충만하게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그녀는 지구를 향해 소유즈를 발사시킨다.
이 영화의 제목은 '그래비티', 즉 중력이다. 이 중력은 '인간의 조건'으로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 존재를 땅에 붙잡아두는 힘으로서, 하나는 라이언이 딸의 죽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듯 우리를 과거의 상처에 붙박아두는 힘이다. 라이언은 그 상처를 잊을 수 없어 우주정거장을 택했지만 우주 속을 홀로 표류하고 죽음과 맞닥뜨리게 되면서 지구에서의 삶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녀는 자신을 상처에 묶어두는 끈들을 하나씩 끊어내고 지구와 연결될 수 있는 그녀만의 길을 찾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중력이 선물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고, 누군가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힘이며, 그 연결을 통해 우리를 풍부하게 살아있게 하는 힘이다. 사랑이 죽지 않았음을 깨달은 라이언은 포기하지 않고 삶이 주는 모든 도전에 응답한다. 그녀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새로 태어나듯이 바다에 추락한 소유즈에서 탈출해 땅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장면은 실로 경이롭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의 의미를 우주를 표류하는 주인공이 아니고서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영화 <그래비티>는 우리가 서로의 눈빛을 마주하고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롭고 감동적인 것인가를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절절하게 체험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지금 곁에 있는 이에게 속삭여야 하리라. 그대를 사랑한다고. 이 무한한 우주의 시공 속에서 2013년 11월, 그대의 목소리가 내게 들려옴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모른다고.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바로 기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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