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우리 자리를 찾아야 한다. p. 424
제레미 리프킨의 명저 <육식의 종말>은 공장형 축산업(특히 소)이 인류 문명에 가져온 폭력적 결과들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육식 대신에 채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지구와 인류를 구하는 길이 될 수 있을까. 지구 환경을 살리고자 하는 많은 선한 이들이 그런 이유에서 채식을 선택한다. 이 책의 저자 또한 그와 같은 신념으로 이십 년을 비건(유제품, 달걀류도 먹지 않는 가장 철저한 채식주의자)으로 살아왔다. 그 결과 자기 몸이 완전히 망가지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저자는 채식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를 시도한다. 그리고 말한다. 지구를 구하는 것은 '정치적 채식주의'가 아니라 우리 사는 세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라고.
물론 공장형 축산업은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그 대안이 농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살아있는 감각을 지닌 동물들을 좁은 우리에 가두고 각종 항생제와 사료를 주입하며 고통스럽게 키우는 공장형 축산업에 비한다면 농업은 평화로운 작업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일년생 곡물' 위주의 농업이 얼마나 땅을 황폐화시키는지를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농업의 문제는 농약만이 아니다. 흙은 살아있는 유기물로서 외부에서 영양소를 끊임없이 공급해야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다. 흙은 동물의 배설물을 비롯한 온갖 생명체의 사체를 필요로 한다. 그러한 순환의 고리가 유실되고 각종 질소 비료로 성장한 농작물은 땅에게도 인체에게도 치명적이다. 또한 대규모 농법과 식품산업이 등장과 함께 오늘날 대부분의 농작물은 태양 에너지가 아니라 화석연료를 태워서 얻은 결과물이다.
흔히 드는 예로 소 두 마리를 키울 수 있는 곡물이면 사람 수십 명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저자가 보기에 이 또한 오류가 있다. 소를 곡물로 키울 때에만 그렇게 많은 곡물을 소비하게 된다. 자연 상태에 가깝게 방목했을 경우 소는 농업보다 땅에 해를 키치지 않으며 땅에게 자신의 배설물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땅에 기여하고 여기서 얻는 고기가 인간에게 공급하는 에너지 역시 대량생산된 곡물과 비교되지 않는다. 수렵과 채집의 방식으로 살아왔던 구석기인들은 육류를 통해 뇌를 성장시켜왔으며 그래서 '필수 아미노산'은 동물성 단백질을 통해서만 공급된다. 필수 탄수화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다른 초식동물과 달리 몸에 채소의 독성을 분해하는 효소를 지니고 있지 않다. 식물 또한 동물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자기 몸에 독성을 지니고 있으며 콩 등에는 다량 함유되어 있으나 인체는 그것을 분해할 수 없는 것이다. 각종 성인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동물성 지방에 대한 과도한 공격도 문제가 된다. 그 결과 수퍼는 다국적 기업들이 만들어내는, 영양학적으로 문제가 있고 땅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재배된 각종 식물성 '가공식품'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저자는 육식을 제외한 식단만으로는, 값싼 농산물을 제3세계에 공급하는 방식만으로는 굶주리는 사람을 한 사람도 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선진국의 값싼 농산물(정부가 각종 보조금을 지급하여 가격이 올라가지 않는다)이 제3세계에 공급되면서 지역 농업의 기반 자체가 무너져버린 예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저자는 세계화와 곡물 카르텔에 저항할 수 있는 지역 네트워크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화석연료에 의존해 지구를 갉아먹는 방식으로 재배된 농작물이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다니는 현실에 눈을 뜨고 그 지역에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산할 수 있는 먹거리의 유통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농업이 아니라 농업과 축산업이 어우러진 혼합경작의 형태여야 하고 무엇보다도 인간과 땅과 동물과 식물이 다함께 선순환할 수 있는, 생명이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그런 방식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는 우리 문명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일만 년 전 농업혁명 이래로 이어져온 문명의 '소비 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저자는 문명의 핵심에 식량을 비롯한 소비 형태가 자리잡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 문명은 동물이 겪어야 하는 지옥 같은 세상과 제3세계의 빈곤과 하나뿐인 지구에 대한 끝없는 착취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지구의 화석연료를 계속 태워서 유지되는 문명은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원시 부족사회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이 문제는 사회적 평등과 분리해서 사유해야 한다. 남아 있는 몇몇 부족사회를 관찰했을 때 알 수 있듯이 물질적으로 지속가능하다 해서 그 사회에 인간적 권리와 평등이 자리잡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생산방식과 사회적 평등은 별개의 문제이며 저자는 이 문제를 분리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개인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해결책 또한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나마 효과 있는 개인적 해결책으로 저자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것, 차를 포기하는 것, 자기가 먹을 음식을 직접 기르는 것을 제안하지만 이 문제를 대안이 아니라 지배 문화에 대한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저항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먹거리 생산과 소비는 우리 문명의 핵심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세계화 및 권력 체제를 와해해야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채식의 배신>은 우리가 날마다 먹는 음식을 단지 건강이나 웰빙, 혹은 기아나 환경 문제 등 특정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문제들을 포함하면서 음식이 우리의 의식과 사유와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것임을 보여주고, 음식을 통해 우리 문명의 소비 형태와 권력 구조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시야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놀라운 책이었다. 어떤 현상에 대하여 상식적 판단이 아니라 정확하고 올바른 지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었다.
첫 임무는 곧 다가올 파시즘에 대한 예방 주사를 사람들에게 놓는 것이다. 왜? 시민 사회는 가까운 장래에 커다란 압박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산업 사회의 기본 제도가 무너지면 그 자리에 파시즘이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절박해지면 쉽고도 권위적인 해결책에 귀가 솔깃해지기 쉽다. 특히 희생양이 있는 해결책이 더 매력적이다. 제일 먼저 잃게 되는 것은 인권과 민주주의일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직접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각 지역에 참여 정부를 세워 무슨 일이 있어도 보편적 인권을 지켜내야 한다. 특히 어린이와 관련된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잊어버리자. 아이들이 외워야 하는 것은 세계 인권 선언이고, 헝겊 조각을 향해 맹세하는 대신 서로를 바라봐야 한다. 당신이 사는 곳에 시민 회의를 조직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건 어떤가. ... 이 개념과 거기에 필요한 기술이 절실해질 날이 올 것이다.
두 번째 임무는 지역 경제 건설이다. 특히 지역 식량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석유가 떨어진 후에 필요한 생존 기술을 익혀야 한다. 우리가 사회화 과정에서 배운 생활 패턴을 대체할 새로운 문화와 관행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의 모든 사회적, 영적, 성적 복지는 차 2대, 아이 둘, 행복한 이성 결혼 관계의 핵가족에 의존하고 있으며, 여기서 나오는 소비재 쓰레기는 제3세계 국가의 마을 하나를 채우고도 남는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심리적 서술 기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초원과 숲, 습지를 보호하면서 수확할 수 있는 새로운 식량이 필요하다. 동물과 식물, 흙과 우리들 사이의 동반자 관계를 북돋아 줄 식량 말이다. 이 세상에 사는 지각이 있는 존재들과 연결될 수 있는 영적 전통을 만들고, 정의로 시작되는 성적 관행도 정립해야 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문화가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문화는 지배 문화에 '의식적으로 반대하는' 움직임이 되어야 한다. ... 모든 사람이 직접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 그러나 자기가 직접 일선에 나서지는 못하더라도 이 꼭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들을 지지하는 일은 해야 한다. 저항 운동을 실제로 돕는 진정한 저항 문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권력과 직접 대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태양 전지와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있는 생태친화적 테크노 낙원 같은 동화를 믿으면 정말 편하고 쉽다. 그러나 태양 전지를 만들려면 갈륨, 인듐 같은 재료가 필요하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라면 다 이유가 있다. 그만큼 귀하기 때문이다. 이 물질들은 이미 고갈 정도가 상당하다. 이런 금속을 캐내는 것에서부터 태양 전지 제조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위기에 처한 산업 기반을 필요로 한다. 달콤한 꿈을 깨뜨려서 미안하지만 테크놀로지로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다.
이 음식들 앞에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 세상의 일부인 나는 내 부모와 형제, 크고 작은 생물들, 단세포에서부터 녹색 생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소비하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모든 생명과 더불어 탄소와 호흡을 공유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음미한다. ... 모든 관계, 주고받는 모든 과정은 상호성에서 시작해 경외감과 부드러운 친밀감으로 끝나야 한다. 우리는 땅에게 줘야 할 것을 몸에게 줘야 한다. 우리는 우리 몸과 땅을 빌려 살고 있고, 그렇게 때문에 그 과정에서 둘 다를 가꿔야 한다. 내 앞에 놓인 아침 식사는 인류가 땅에 저지른 일에 대한 사과와 치유를 담고 있어야 한다.
p. 427~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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