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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교육 관련

거짓주체성에 대하여;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 - 사토 마나부

by 릴라~ 2016. 10. 2.

이 책의 가장 훌륭한 부분은 저자가 일본의 각급 학교의 교실로부터 '거짓 주체성의 신화'를 읽어낸 대목이다. 교실에서 학생들의 관심, 의욕, 자기 결정, 자기 표현 등을 강조하는 것(아이들의 '주체성'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오히려 아이들의 주체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지금의 한국 교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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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학교 교실의 특징은 '소란스러움(발언 과잉)'에 있으며 중, 고교 교실의 특징은 '침묵(발언 거부)'이다. 저자는 서구 여러 나라에서 온 방문자들에게 학교를 안내하는 일이 많다. 그런 경우 먼저 첫인상을 물어보면 위의 두 가지 특징을 이야기한다. 저자도 매년 외국의 학교를 방문하여 많은 수업을 참관하면서 거의 같은 인상을 받고 왔다. 대체, 왜 서구 소학교의 아이들은 작은 소리로 더듬거리는 발언에서 출발하여도 중학교, 고등학교, 상급 학교로 가면 갈수록 활발하게 발언하고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성장하는 것일까? 그에 비해 왜 일본은 소학교에서 소란스러울 만큼 지나치게 발언하던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로 가면서 표정조차 잃어버리고 발언하는 일을 거절하거나 침묵해 버리는 것일까? 이 문제는 일본의 수업을 바로잡는데 있어 최대 문제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학급정원과 일제식 수업양식, 효율중시 교육과정 등 제도적인 제약으로부터 파생되고 있는 문제도 많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학교(교실) 문화의 문제에서 본다면 거짓 주체성을 추구하는 수업에서의 형식주의가 더 큰 문제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유치원, 소학교에서 지나치게 거짓 주체성을 강제당하고 있기 때문에 중학교나 고교에 들어가서도 소학교 시절에 길들엳진 거짓 주체성에 저항하는데 정신을 잃어 자기 자신의 신체를 자유로이 살릴 수 없게 된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발언을 거절하고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교실에 앉아있는 중학생이나 고교생의 광경은 수업을 하는 중학교, 고교 교사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치원, 소학교 교사의 책임이기도 하다. p43-44

 

자리에서 일어나 발언하는 풍경, 이것도 서구 나라들에서는 아주 옛날에 사라졌지만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교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많은 교실에 보급된 '설명을 보태기'라는 말. 어떤 발언도 그 자체가 하나의 이해방식이나 사고방식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면 '설명을 보태기' 등은 당연히 사라졌을 것이다. 게다가 일부 교사들 사이에서 실천되고 있는 발언한 아이가 다음 아이를 지명하는 방식. 이것도 거짓 주체성을 표현하는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p.45

 

재미가 없거나 무의미한 과제에 대해서 흥미를 보이지 않거나 활발하지 못한 아이들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건강하다고 하는 당연한 감각을 우선 교사 자신이 되찾을 필요가 있다. 어떤 과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관심, 흥미, 태도'를 가진 아이는 지성적으로는 건강하지 못하며 논리적으로는 태만한 학습자이다. p. 45

 

늦어도 좋다. 더듬거려도 좋다. 아이들과 차분하게 좋은 시간을 보내자라는 의식으로 교실에 서는 것이 정확한 해결책을 준비해 준다. 그렇게 하다보면 아이들의 발언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으며 발언을 끌어내거나 조직하기 전에 아이들 한명 한명의 말을 '듣는 일'과 '음미하는 일'로 교사의 의식을 이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발언 잘 하는 교실이 아니라 서로 잘 듣는 교실이다. 서로 잘 듣는 교실이 발언을 통해서 다양한 사고와 감정을 서로 교류시킬 수 있는 교실을 준비한다. p.46

 

왜 차분한 교실이 되면 아이들이 부드럽고 편안하게 배우는가? 왜 차분한 교실이 되면 다양한 사고가 이루어지고 수업의 전개가 역동적이 되는가? ... 그 반대의 극에 있는 것이 딱딱하고 건조한 관계로 구성된 교실일 것이다. 왁자지껄하고 괴성이 터져 나오는 교실, 활발하게 '저요, 저요' 하며 손은 올라가지만 발언경쟁만 과열되어 있는 교실, 혹은 숨쉬기조차 무거운 공기가 감돌고 몸이 굳어져 버리는 교실 등은 차분한 교실에 대비되는 반대의 극에 있는 교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차분한 교실에서는 교사도 아이도 주체성이라는 신화로부터 자유롭다. 차분한 교실에는 안심하고 몸을 맡길 수 있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구축되어 있으며 으스대며 자기주장을 하지 않아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저절로 소중하게 다루어지며 인정되는 기본적인 신뢰관계가 구축되어 있다. 차분함이라는 말에 표현되어 있는 촉촉함이란 안심하고 몸을 맡길 수 있는 피부감각의 부드러움을 표현하는 것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숨결과 그 숨결의 물결이 부드럽게 느껴지는 교실로 이미지화 되는 것이다. p. 47-48

 

주체성 신화란 아이들의 관심과 의욕 태도 등을 교사와의 관계나 교재나 학습 환경과 떼어내어 아이들 자신의 성향에 따라 주체성을 구성하는 신화이며, 아이들의 내면의 주체성에 따라 수행된 학습을 이상화하는 신화이다. 이 색다른 신화는 서구에서의 주체(subject)라는 개념이 '가신, 종속'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보다 더 명료해 질 것이다. 서구에서는 신, 자연, 국가, 진리, 민중의 의지 등 자기를 초월한 존재의 종속자가 됨으로써 주체성이 획득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배움의 주체성을 겸허함에서 찾는 것은 이러한 '주체=종속'이라는 사상이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주체=종속'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다. 일본의 주체성은 오히려 모든 종속관계나 제약으로부터 자유가 되어 자기 내면의 의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체성은 '제멋대로 함'이지 않을까? 아니, 이 주체성은 종속해야 할 것을 상실한 공중에 매달린 주체로 밖에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p35-36

 

주체성 신화는 수업에서 '자학자습'을 이상화하고 '자기표현'이나 '자기결정'을 이상화하는 경향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자학자습이나 자기표현이나 자기결정은 독학의 이상은 될지라도 교재나 동료나 교사가 개입하는 수업 장면에서는 이상화되어서 안 될 것이다. 아이들의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배움은 수업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지만 그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배움도 교사의 활동과 교재와 교실의 동료와의 관계나 학습환경과의 관계에서 인식할 필요가 있다. p36-37

 

차분한 교실을 주체성 신화의 반대 극에 있다고 한 것은 주체성이 수동성을 결락한 일방적인 능동성에 의거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차분한 교실은 수동성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차분한 교실에서의 활동은 '수동적 능동성'이라 불리는 대응을 기초로 하여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p49

 

이것은 교실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도 발언하는 것보다는 듣는 편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사는 아이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발언을 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듣기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발표력이 있는 아이보다 가만히 있어도 잘 듣는 아이를 배움에서는 훨씬 우수하게 평가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아이들의 통지표에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발언합시다'라고 씌어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사실은, 무턱대로 함부로 발언하는 아이에게 '더욱 주의깊게 듣도록 합시다'라고 써야 할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만약 교실에서 언어적 표현력을 기르고 싶다면 발언을 장려하기보다는 듣는 힘을 기르도록 하는 것이 돌아가는 것 같으나 실은 지름길이 된다. 듣는 힘이 교실에 길러졌을 때 비로소 교실에서의 언어 표현도 풍부해지는 것이다.  p50

 

앞으로의 수업은 전달형의 일제식 수업 양식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개성적인 배움을 축으로 하는 활동적이고 협동적이며 반성적인 배움의 양식으로 개혁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수업의 성립을 아이들의 주체성으로 환원해버리는 주체성 신화를 극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주체성 신화로 모험하는 수업은 '저요' '저요'하며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아이들이 배우고 있는 내용은 어수선하고 질적으로는 빈약하며 아이들의 성장도 표면적이고 빈약하다.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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